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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철이다. 보리가 익기 전에 1모작 모내기를 하고 보리를 베고나서 마당이나 공터, 논 가에 쟁여두고 부랴부랴 없는 물 잡아 2모작 모내기를 해도 삼구워 껍질 벗겨도 지난날에는 농사가 끝나지 않아 가을보다 훨씬 바빴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철이다. 보리가 익기 전에 1모작 모내기를 하고 보리를 베고나서 마당이나 공터, 논 가에 쟁여두고 부랴부랴 없는 물 잡아 2모작 모내기를 해도 삼구워 껍질 벗겨도 지난날에는 농사가 끝나지 않아 가을보다 훨씬 바빴다. ⓒ 김규환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2모작 시기에 급한 마을 방송

1모작을 끝내고 보리를 벨 때는 부지깽이도 거든다고 했다.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1978년 초여름, 어른들은 새벽별 보고 나가서는 새벽이슬에 흥건히 몸을 적시고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들로 나서야 했다.

학생들도 어떤 이는 비 오는 날엔 고구마를 심던지 고사리를 한 소쿠리 꺾어 놓고 학교를 갔다. 그냥 아이나 보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그 시절의 초등학생들은 꼴을 한 망태기 베어 놓거나 논에 모내기할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에서 학교에 가거나 아예 농번기 때는 조퇴를 밥 먹듯이 하는 아이도 있었다. 혹은 ‘공부해서 뭐하냐’며 학교 가지 말라는 통에 근 보름간은 동무들 얼굴 구경하기가 힘들기도 했다.

남도의 들녘은 중부지방의 농사와 사뭇 다르다. 농번기가 따로 없는 요즘이래도 기계화와 농업기술의 발달로 시설농가는 사시사철 농사에 매달려야 하지만 당시 쌀과 보리로 대표되는 주곡(主穀)이 중심으로 2모작을 해내기엔 어찌나 힘겨웠는지 모른다.

추위 때문에 보리가 잘 안 되는 차령이북에선 벼농사만 한 번 해내면 그 해 농사를 마치고 월동준비에 들어가면 그만이었지만 내가 살았던 남부지방은 농사의 순환이 벼 베고, 보리나 밀을 갈아 김을 맨다. 밭곡식을 심고 나서 나물 뜯으러 산에서 살다가 보리가 팰 무렵 1모작 모내기를 서두른다.

하루도 쉴 짬 없이 보리를 베어 쟁여두고 소로 논을 갈아 써레질하여 2모작 모내기를 한다. 이즈음 누에도 하루가 다르게 먹어 대니 뽕잎 갖다 바치기 힘겨웠다. 일이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곡성 석곡면(石谷面)과 산 하나 사이라 안동포에 버금가는 ‘돌실나이’ 주산지이므로 삼을 베어 껍질을 벗기고 길쌈을 해야 하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다.

김매기와 퇴비로 쓸 풋나무 할 때가 가장 한가하다. 가을에 홀태나 개상 따위의 원시에 가까운 도구와 수동식 탈곡기로 추수를 하면 1년 농사가 마무리 되니 한겨울 복조리나 대바구니, 삼태기나 망태기 만드는 며칠 빼곤 방구석이 들어앉을 일이 없이 바빴다.

어릴 때 어른들 한 사람 몫을 너끈히 해냈던 내 눈으로 보기에 5월 말에서 6월 말까지가 가장 바쁜 철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가을걷이는 초여름 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내가 4학년이던 무렵 어느 날 학교 가려고 할 참이었다. 마을마다 방송에서 무언가 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주민 여러분께 긴히 전달할 말씀이 있응께 잘 들어두시기 바랍니다. 6학년 남학생들은 모두 학교로 가지 마시고 멀리 친척집에 숨어 있기 바랍니다.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6학년 남학생들은 모두 피신하시기 바랍니다. 학부형들께서는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북면동국민학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회관이나 이장댁에 자체 발전기를 이용하여 마을마다 마이크를 설치하여 방송을 했으니 누구 집에 전화가 오는지 마을에 무슨 소식이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엔 마을 앞 미루나무에 한개, 뒷 철룽에 각각 한개씩 있었지만 만날 고장이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회관이나 이장댁에 자체 발전기를 이용하여 마을마다 마이크를 설치하여 방송을 했으니 누구 집에 전화가 오는지 마을에 무슨 소식이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엔 마을 앞 미루나무에 한개, 뒷 철룽에 각각 한개씩 있었지만 만날 고장이었다. ⓒ 김규환
2인 1조로 선생님이 급파되어 마을마다 방송을 하고 돌아갔다.

“6학년 남학생들은 모두 피신하기 바랍니다”

여태껏 학교가 생긴 이래 이런 적이 없었다. 마을이 생긴 뒤로 선생님께서 직접 마을 방송 마이크를 잡은 일은 없었다. 이제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상급생들에게 학교에 나오지 말라니! 웬일일까?

산감(山監)이 나와도 나뭇짐을 산에 버려두고 오면 그만이다. 밀주(密酒)를 담갔다가 단속원에 걸려도 “제사 모시려고 그랬다”던가 오히려 막걸리 한 주전자 따라주어 어찌어찌 피해왔지만 학생들에게 학교에도 오지 말고 집에도 있지 말란다.

숨으라니 애 어른 할 것 없이 영문을 몰라 쩔쩔 맸다. 한때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 우리 집에 빨치산 도당사령부가 며칠 머물렀지만 마을만 세 번 타고 대포와 총알이 빗발치듯했지만 큰 인명 피해 없이 무사했던 집안이다.

지긋지긋한 전쟁과 빨치산 활동이 끝난 뒤 일부러 산에 불을 지른 아이들 빼곤 감옥갈 일이 없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 아닌가. 6학년 40명 내외의 학생 중 당시에 키가 제일 컸던 두 살 위인 내 형이 주범자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품앗이를 갔다가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셔서 형 손을 이끌고 참난쟁이, 감난쟁이를 거쳐 검덕굴 산 쪽으로 사라졌다.

“엄마!”
“성”
“암말 말고 있그라와~.”
“잉.”
“애할매집에 갔다글지 말고?”
“절대로 아무 말 말고….”

걱정스런 마음으로 등교를 하였다. 곰곰 생각해보았다. 공부가 될 턱이 없었다. 얼마 전 3학년 시험을 한 학년 위였던 우리가 봐준 것도 아무 문제가 아니었는데 남학생 모두를 학교에 나오지 말라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오후가 되어서 곡성군 삼기면 수산리 외가에 형을 데려다 준 어머니께서 돌아오셨다.

대체 우리 형들이 뭘 잘못했을까. 선생님께 여쭤보려고 해도 워낙 학교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하고 함구령이 내려진 상태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입 한 번 잘못 뻥끗했다가 형들이 모두 징역살이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속으로 살이 떨리고 있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의좋은 형제가 되라고 그리 말씀하셔도 골목대장인 형이 나를 물들지 않게 하려고 했던 건지, 동생인 내가 있으면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인지 만날 따돌리는 통에 우린 싸움박질 깨나 했지만 하루 이틀 사흘을 넘기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형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다가 성아가 잽혀가믄 큰일인디’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사이 학교와 마을엔 문제의 학생들을 잡으러 왔는지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어쩌다 함지를 인 생선장수 아주머니나 아이스깨끼장수, 엿장수, 땜장이, 튀밥 튀는 할아버지, 소쿠리장수가 다였던 마을에 양복을 빼입은 간첩인지 누군지 모르는 젊은 사람들 두셋이 조를 짜서 들어온다.

마을이 술렁여도 반상회를 열어 입단속을 단단히 했지만 “김규복 학생 알아요?” 그때마다 “몰라라우”라거나 “왜 물으신다요?” 하며 말문을 닫으면 “박정환이는요? 이 학교 6학년이고 이 마을에 산다는데요” “바쁘당께라우. 딴 데 가서 알아보싯쇼”하고 말문을 닫아 버린다.

손모, 정조식, 못줄, 새꺼리, 고수레, 거머리가 생각난다. 허리가 부러질듯 아픈 철이다. 이른 아침 모를 찌고 모쟁이가 날라주면 몇날 며칠을 품앗이로 모내기를 마친다.
손모, 정조식, 못줄, 새꺼리, 고수레, 거머리가 생각난다. 허리가 부러질듯 아픈 철이다. 이른 아침 모를 찌고 모쟁이가 날라주면 몇날 며칠을 품앗이로 모내기를 마친다. ⓒ 김규환
출전하지 않은 소년체전에서 1등을 하다

모든 결정을 새벽에 내리던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허구헌날 다투셨어도 하루가 지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어제 일은 잊고 금슬 좋게 소곤소곤 나누는 말씀을 듣고서야 무슨 영문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시째(셋째)는 잘 있당가?”
“하믄이라우.”
“전화도 해 볼 수 없응께 깝깝하구만….”
“글도 어쩐다요 나가지도 않은 소년체전에서 우리 애기덜이 1등을 해부렀다 안 그요.”
“상부에서 우리 학상(학생)들을 시합에 나가서 우승을 해논께 경상북도에서 아그들을 잡우로 댕긴 거 아녀. 긍께 이녁이 재 너머 한 번 댕겨와 보더라고. 일이 되야 말이시.”

지금껏 동네에 이장 댁에 딱 하나 있던 전화도 미안해서 걸어보지 못했다. 유달리 아들을 챙기셨던 아버지였다. 벌떡 일어나 두 분 사이에 끼어 궁금증을 확 풀어버리고 싶었지만 더 들어보기로 했다.

“지비가 댕겨오싯쇼. 우리 논에 놉을 스무 명은 얻어야 씅게 품앗이 땜시 안 된당께라우.”
“카만 둬보더라고. 핵교에서 뭔 전갈이 올 때도 됐구먼. 며칠 짼가? 한 달포 돼가제?”
“열 사흘 째 구만이라우.”
“후딱 일어나서 일이나 하더라고.”

보름이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수상한 사람들은 서너 번 마을과 학교를 오가더니 포기한 건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6학년이 있는 집에 편지 한 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궁금했지만 열어 볼 수도 없었다. 국어책에 꽂아 집으로 내달렸다. 들일을 나가서 취학하지 않은 동생 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못자리로 뛰어갔다.

“아부지!”
“왜 또 뭔일 있냐?”
“그게 아니구라우 선상님께서 편지 주셨어라우.”
“니가 한번 읽어보그라.”

“먼저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금번일로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제 모든 게 끝났습니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념하겠읍니다. 이번 사태는 지난달 제주에서 열렸던 소년체전에 우리학교 학생들 명단에 배구를 잘 하는 중학생들이 출전하여 우승을 하게 됨으로써 빚어진 일입니다. 농사일로 바쁜데 본의 아니게 소중한 학생들과 학부형님들을 심란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인자 안 잡아 간다그쟈?”
“예.”

이제 윤곽이 잡혔다. 어떻게든 우승을 해보려고 벽지학교였던 산골짜기 6학년 학생 명단을 상부에서 모조리 제멋대로 올리고 실제로는 중학생을 출전시켜 1등을 하였으니 타 도에서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출전 여부를 알아봐 진상을 조사하려던 수상한 사람들도 여관 하나 없는 산골학교인근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호랭이 물어갈 놈들. 시합이 그렇게 중한가?”라고 일갈하시고 하시던 일을 급히 마무리하고 이장댁으로 가셨다. 까만 전화기를 열댓 번 돌리니 안내원이 나왔다.

1년에 예닐곱 번 넘어다녔던 화순군 북면과 곡성군 삼기면 경계에 있는 검덕굴은 해발 600미터에 가깝고 드렁칡과 다래나무로 우거져 있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1년에 예닐곱 번 넘어다녔던 화순군 북면과 곡성군 삼기면 경계에 있는 검덕굴은 해발 600미터에 가깝고 드렁칡과 다래나무로 우거져 있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 김규환
1등 지상주의가 빚어낸 촌극, 더 이상 없어야

“여보싯쇼. 곡성군 삼기면 수산리 부탁허요.”

3~4분이 그렇게 길수가 없었다.

“아 이장이신가? 여근 동복(東福 화순군 동복면. 옛 지명으로 동복현을 이름)이네. 제천이 집에 사람 있을랑가? 우리 아그가 거기 있단말이시.”

아버지와 나는 마을 방송을 하는 사이 한참을 기다렸다. 달음질하여 전화기 앞에 외숙모께서 전화를 받으신 모양이다.

“별고 없으제라우? 녈(내일) 시째 데리로 갈라요. 그간 애쓰셨구만이라우. 전화세 많이 나온께 그만 끊을라요.”

다음날 새벽 14일만에 재를 넘어 아버지께서 셋째 형을 데려오고서야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근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온 형은 살이 피둥피둥 쪄 있었다. 보리밥도 먹기 힘든 우리 집과 달리 외갓집엔 그 철에도 쌀밥에 고깃국을 맛보았으니 과연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을까 모르겠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부정행위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전례 없는 웃지 못 할 촌극이 아직도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생사람 잡을 뻔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요즘 내년에 귀향하여 일굴 산채원(山菜園 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기 위해 전국 산야와 모범적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cafe.daum.net/sanchaewon우리 산나물을 배우고 시험 재배를 하느라 바쁘다. 개인과 가족을 위한 참살이 보다는 한 지역을 일구고자 사회적 웰빙을 실천하려고 한다. 그간 <오마이뉴스>에 썼던 글 일부를 모아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간)을 냈다. 내일은 곰취를 뜯으러 산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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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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