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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전
봄은 서울은 물론 빛고을 광주에서도 오는 듯했다. 그러나 군부는 5월 16일 이화여대에서 전국학생대표자를 검거하면서 5·17비상계엄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내렸다. 당시 시민들은 직접선거로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세우려 열망했다.

하지만 계엄령에 의해 전국 주요 공공기관에 탱크와 계엄군이 진주하게 됐다. 그리고 계엄군은 유독 광주에 특전사령부 공수여단을 배치했다. 신군부는 이미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을 완료하고 광주를 공략했다. 5·18 그날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에서는 전남대학생들이 비상계엄 철회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계엄군은 즉각 전남대학교 정문에 출동해 총칼로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림동과 금남로, 그리고 시내로 질주했다. 계엄군은 데모대의 시내 진출을 막느라 탱크까지 동원했다. 여기에 시민들이 가세했고 시위대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그날의 시민들과 학생들은 총칼 앞에서도 후퇴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광주의 '이교필'이라는 친구(지금은 고인이 되었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광주는 지금 폭악한 계엄군에 의해 시민들과 학생들, 심지어는 임신부와 여학생들까지 대검으로 찌르고 총탄을 발사하고 있다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 어찌 일어났느냐며 울먹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하지만 광주를 제외한 서울과 각 도시는 군인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앞에 꼼짝도 못하고 감시와 검문을 당하고 있었다. 나도 서울대학교에 출근을 하는데 계엄군이 제지해 항의했더니 엎드려 뻗쳐 기합을 주었다. 중년의 나이로 월남전까지 다녀온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예비군 장교 출신인 교수들도 총칼 앞에 꼼짝없이 그들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오후에는 검열을 받은 중앙지들이 대문짝만한 활자로 '전국비상계엄 선포, 광주에 폭도들이 시위로 강경진압 중'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 신문들은 광주폭도시위는 김대중 내란음모자들이 정부전복을 기도한 것으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폭력시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 기사에 대해 일반 시민들과 교직원들 사이에도 이견이 속출했다. 어떤 사람들이 "전라도 광주 놈들이, 김대중이가 정부전복 음모를 꾸몄다"며 분개하고 있었다. 순간 "그 신문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계엄 당국에서 조작되었다"고 했더니 그들은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이 "너 전라도 놈이지! 그래서 두둔한 거지?" 하기에 순간 "나는 충청도가 고향이다. 그러나 전라도 사람을 함부로 욕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사실은 자기 집 셋방에 사는 전라도 사람과 대판 싸웠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편견을 갖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들이 전라도냐는 물음에 어찌하여 충청도라고 대답했는지, 참으로 부끄러웠다. 나는 왜, 내 고향 빛고을 광주를 부정했는가? 마음이 몹시도 괴로웠다. 하지만 그들이 계엄하의 신문과 방송만 보고 전라도가 마치 공산집단폭도인양, 살벌한 살기마저 띄고 있었기에 나는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나는 지역감정에 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못했기에 만약 그들과 정면충돌을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 때 일을 나는 평생을 두고 후회했다.

다음날 친구에게 걸려온 마지막 전화는 "나는 지금 시민군에게서 총 한 자루를 받아 실탄을 장진하고 있다. 언제 계엄군이 데모대원들 체포 명목으로 우리 집에 쳐들어온다면 나는 그들을 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총을 함부로 쏘면 안 된다. 신중하게 처신해라. 정당방위가 된다면 모를까"라고 했다. 뉴스와 신문은 계속적으로 김대중 일당이 정동년 전남대학 복학생을 사주해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국내외 보도는 사실을 왜곡해 보도했지만 서독을 비롯한 유럽 언론은 광주시민들의 정당한 항의라고 보도했고 군부의 무리한 학생시위대 진압이 원인이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었다. 외국의 보도는 해외에 나가 있는 친척이나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와 알 수 있었다. 얼마 후 친구와 통신이 두절되어 정확한 광주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내 고향 광주에서 일어난 불행한 그 일은 뜻있는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한없이 슬픔을 안겨 주었다. 나는 광주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기도를 했지만 광주의 계엄군들이 무자비한 학살 행위가 용서되지 않았다. 참다못해 나는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청했다.

"나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 사태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전방에서 나라를 쳐들어온 적군을 물리쳐야 할 우리 대한민국 국군이 어찌하여 부모나 형제자매 학생들을 총칼로 탱크로 학살을 한단 말입니까? 학생과 시민들은 아무 죄도 없이 평화적으로 데모와 시위를 했고 항의한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럴 때 어찌하십니까?"

나는 흐느끼면서 고백을 계속했다.

"주님은 평화를 주러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신부님은 아주 나지막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답하고 보속을 주었다.

"형제님이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은 형제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고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한 고통을 받을 때마다 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런 죄도 없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유다의 왕'이라고 했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광주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신 죄 없는 형제자매들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듯이 그분들도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선량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그들이 회개하도록 말입니다. 형제님 기도 많이 하십시오."

신부님은 보속으로 '주기도문과 성모송과 사도신경을 3번씩 하고 남을 위해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하라'고 하셨다. 성당 안에는 성체가 모신 곳에만 불빛이 있었다. 약간 어두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향해 엎드려 간구했다. 나의 심중은 착잡했다. 인과응보라는 말도 있지만 주님의 용서와 사랑은 그게 아니었다.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용서하라는 말이었다. 약간의 원망도 있었지만 깊은 심연으로 신부님의 말씀이 참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우리 본당에서 주임신부는 강한 톤으로 광주의 계엄군 폭거를 비난했다. 그리고 언제고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들 스스로 용서하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광주의 형제자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헌혈뿐이었다. 죽어간 사람도 많지만 부상자가 수천이기에 피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나는 헌혈을 자원했다.

이후 시민군들이 아세아 자동차를 앞세워 탱크를 물리쳤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광주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하지만 광주를 장악한 시민들과 시민군들은 다음의 계엄군의 반격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일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했다는 계엄군은 물러간 지 1주일 만에 반격을 가해 왔다. 마치 외국에서 있었던 엔테베 작전처럼. 결국 도청의 마지막 사수대는 무참히 학살됐고 계엄군은 도청과 광주를 장악했다.

동학농민혁명과 3·1만세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의거와 4·19혁명과 부마항쟁에 이은 광주민주항쟁은 후에 87년 6월 항쟁의 결과를 가져왔다. 아직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긴 했지만 5·18민주항쟁은 거룩한 시민들의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며 광주의 오월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동안 법적으로 광주오월항쟁을 정립하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적으로 승화된 광주민주혁명은 아니다. 다시는 그 어떤 무력으로 시민을 압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직도 광주항쟁의 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서울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리긴 했지만 더 많은 시민들이 함께해 숭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고 민주혁명을 승계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그런 기념대회가 열려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5·18민주항쟁이 광주만의 것이라고 치부하는 국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낀다.

올해로 우리는 분단 60년 환갑을 맞이했고 광주항쟁 25주년을 맞이했으며 남북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튼 역사적 6·15남북공동선언 5주년을 맞았다. 그 어느 때보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힘을 보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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