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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료위를 훌쩍 넘어 서 있는 현릉 홍살문과 꺾어진 참도.
ⓒ 한성희
태조에 이어 동구릉에 두 번째 묻힌 5대 문종의 현릉(顯陵)에 들어서면 꺾어진 참도와 망료위 앞에 있어야 할 홍살문이 망료위를 지나 참도 가운데 서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본래 홍살문은 망료위 앞에 서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중간에 서 있는 것일까? 짐작컨대 보수 과정에서 잘못 옮겨진 게 아닌가 싶다.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목이 졸려 죽은 아들 단종과 무덤에서 끌려나가 바닷가에 팽개쳤던 현덕왕후(1418~1441)의 기구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 곳이 문종(1414~1452)의 현릉이다.

왕릉에 꺾어진 참도가 있는 곳은 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곧게 뻗어나가지 못하고 꺾인 참도를 바라보니 문종 일가의 한 맺힌 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 현릉은 왼쪽에 문종의 능이 있고 오른쪽에 현덕왕후의 능이 있는 동원이강릉이다.
ⓒ 한성희
현릉은 문종과 현덕왕후가 양 언덕에 묻혀있는 동원이강릉이지만 당시에는 합장릉이었다. 현덕왕후 권씨는 1431년 15세에 동궁에 들어와 양원이 되었다가 세자빈 봉씨가 동성애 사건으로 폐위되자 1437년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현덕왕후는 경혜공주와 단종을 낳았고 단종을 낳은 다음날 산후병으로 24세에 죽는다. 약도 쓰지 못하고 신명에 기도도 하지 못한 채로 갑자기 죽었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세종 내외는 5일간 상복을 입었고 문종은 30일간 복을 입었다.

문종은 조선 최초로 장자 승통를 이어받은 왕이다. 28년 동안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고 29세부터 병에 시달리던 세종의 명으로 즉위할 때까지 실질적인 정사를 돌봤던 문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36세지만 2년 4개월 재위했다.

지극한 효자였고 시문과 천문,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너그럽고 온화했다고 한다.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탄탄한 정치력도 갖췄지만 일찍 죽는 바람에 단종의 비극을 맞는다. 효자였기에 아버지 세종의 곁에 묻히려고 대모산에 미리 장지를 정해 두었으나, 파보니 물이 솟는 바람에 지금의 동구릉으로 정한 것이다.

죽어서 부모 곁에 묻히고 싶은 마음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세종도 아버지 태종의 곁에 묻히려고 소헌황후의 능을 대모산 기슭에 잡고 합장릉으로 하라 명을 내렸다. 수릉을 조성하려고 땅을 파보니 물이 나온다고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굽히지 않던 왕이 세종이다. 세종의 영릉은 예종대에 와서 물이 나오는 흉당이라는 수렴이 문제가 되어 현재 영릉으로 천장했다.

세 번째 세자빈인 권씨마저 일찍 죽은 후 문종은 더 이상 왕비를 두지 않았다. 문종이 여자에 관심이 적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28세에 권씨를 잃고 39세에 죽을 때까지 세자빈이나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라도 국모인 중전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왕실 법도였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형식적으로라도 왕비를 맞지 않은 데 의문이 든다. 세종이 살아 있었음에도 문종이 배필을 맞지 않았다는 것은 문종의 고집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 문종의 자녀로는 후궁인 수칙 양씨가 옹주 하나를 낳아 1남 2녀가 전부다.

문종과 인종이 비슷한 성품을 지녔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종도 지극한 효자이며 학문에 정진했고 여자를 멀리한 임금이다. 그러나 조선의 제왕에게는 아들 생산이 종묘사직을 이어갈 중요한 의무였기에 다산이 왕실의 풍요를 상징했음에도 젊은 나이에 10년이 넘도록 홀로 산 문종을 이해할 수 없다.

▲ 문종의 능은 병풍석을 둘렀다.
ⓒ 한성희
현릉은 세종대에 정한 <국조오례의> 양식에 따라 조성된 왕릉 중 가장 오랜 왕릉이다. 세종의 영릉이 먼저였으나 세종의 능에 물이 들어차서 예종 때 천장했다. 최초의 합장릉이기도 했던 영릉의 양식을 본 딴 것도 현릉이며 두 번째 합장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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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방상씨'가 앞장서는 국장

현덕왕후의 기구한 운명
현덕왕후가 세자빈의 몸으로 단종을 낳고 죽자 경기 시흥의 군자면에 안장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면서 현덕왕후로 추존되고 소릉(昭陵)이란 능호를 받는다. 1452년 문종이 종기가 터져 경복궁 강녕전에서 승하하자 건원릉 동남쪽 줄기인 현릉에 장사지낸다. 이때 현덕왕후도 함께 천장 해 현릉은 합장릉이 됐다.

현덕왕후는 이후 세조에 의해 문종과 잠들던 현릉에서 6년만에 파헤쳐지고 시흥 군자 바닷가 10리 바깥에 내팽겨친다. 현덕왕후의 어머니 아지와 동생 자신이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된 세조3년(1456년)이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현덕왕후의 집안은 서인으로, 현덕왕후도 서인으로 폐해 개장되고 만다.

▲ 현덕왕후의 능침으로 올라가는 사초지에 박석이 길게 깔려 있다.
ⓒ 한성희
현덕왕후의 능침으로 올라가는 사초지는 다른 능에서 볼 수 없는 박석이 길게 깔려있다. 현덕왕후의 복위는 성종2년부터 꾸준히 건의됐으나 중종에 와서야 비로소 위패가 종묘에 봉안된다.

중종7년(1512) 추소복이 현덕왕후를 복위하자 건의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그 이듬해 종묘에 벼락이 치자 겁이 났는지, 문종 홀로 제사를 받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 아래 바닷가에 개장됐던 현덕왕후를 73년만에 현릉 동쪽에 천장하고 복위시켰다.

▲ 현덕왕후 능은 조선 전기 양식으로 무인석과 문인석이 서 있다.
ⓒ 한성희
사릉이나 온릉이 복위왕비의 능이라서 무인석이 생략된 것에 비하면 현덕왕후의 능침에는 무인석이 있어 추존왕과 왕비의 능에 무인석을 생략하기 이전의 조선 전기 양식임을 보여준다.

세조와 동원이강릉

세조 이후 나타난 동원이강릉의 양식을 따른 현릉은 문종이 오래 살아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찬탈을 당하지 않았다면 합장릉이었을 것이다. 승자가 주도하는 것이 역사이니 아들을 죽인 세조가 만든 동원이강릉에 묻혀있는 문종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세조 이후 왕릉은 세조의 광릉을 비롯해 예종과 성종, 중종까지 모두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된다. 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장남이 아닌 차남으로 왕위에 등극했던 왕이다. 문종의 현릉은 종중대에 이뤄졌기에 4번째 동원이강릉이다.

▲ 문종의 무인석은 호랑이 얼굴과 수염까지 해학적이다.
ⓒ 한성희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앉은 왕위는 태종과 마찬가지로 왕권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 기득권인 신권에 흔들릴 뻔한 조선왕조를 다시 기반에 올려놓은 셈이지만 찬탈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세조도 그러한 비난을 잘 알기에 종묘사직으로 연결되는 국가의 상징이었던 왕릉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세조는 찬탈이라는 비난을 모면하고 왕실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그 해답을 왕릉에서 찾았다. 그만큼 왕릉은 조선의 정신적인 기둥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세조가 풍부한 국장경험과 풍수지식을 갖췄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세종대에 수릉제도가 처음으로 갖춰지자 부왕인 세종의 수릉 택지에도 참여했던 수양대군은 왕릉의 관과 석물 제조를 담당하는 수색기제조를 맡아 국장실무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안평대군이 국장에 형식적으로 참여했던 것과 달리 수양대군은 세종에게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말이다. 이후 소헌왕후와 세종의 국장을 치르면서 세조의 풍수 실력은 더 풍부해진다. 이런 경력을 가진 세조의 풍수신봉이 동원이강릉이라는 새로운 왕릉 제도를 만들기에 이른다.

▲ 무인석 역시 퉁망울 같은 눈에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가졌고 몸과 비례가 맞지 않아 답답해 보인다.
ⓒ 한성희
문종의 능침 석물은 얼굴이 크고 표정이 해학적인 무인석과 문인석이 있다. 혼유석을 받친 북석도 5개에서 4개로 줄어든다. 문종의 능에는 병풍석이 있으나 중종때 새로 천장한 현덕왕후의 능은 병풍석이 없다.

현릉을 내려오면서 현덕왕후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를 죽이겠다고 저주를 내렸다는 야사를 생각해본다. 종묘에 벼락이 치자 서둘러 현덕왕후를 복위시켰던 중종도 그런 전설을 잘 알기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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