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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 중에 찍은 한 장면.
ⓒ 이선애
내일 모레가 스승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런 날은 참 난감합니다. 저는 제가 스승이라는 생각을 아직 못해봅니다. 그냥 선생이지요. 흰 찔레꽃이 무더기무더기 핀 길섶을 지나며 오월엔 어느 때 보다 많은 생각으로 어지럽습니다. 스승의 날을 2월 옮기자는 세간의 시끄러움이나 무관하게 과연 나는 올바른 선생일까 하는 반성이 아프게 저를 누릅니다.

그래서 작은 글을 하나 적었습니다.
어쩌면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강마을 아이들에게 주는 작은 바람일 것입니다.

강마을 아이들아
- 스승의 날에

이선애

흑머루빛 눈동자들 빛내는 내 아이들아
남강물 휘돌아 흐르는 의령군 작은 중학교 아이들아
쌀밥 같은 아카시아가 학교 앞산에 무성하고
그 향기에 취한 개구리는 너의 교실 앞에서 낮잠을 자는구나.

너희의 영롱한 웃음소리를 좋아하고
너희의 싱그러운 달음박질을 사랑하는 나는 너희의 선생이지.
청보리 물결 같은 푸른 꿈이 자라고
자운영처럼 고운 생각이 익어 가는 교실에서
매일
일용할 지식을 풋내 나는 잔소리를 섞어서
너희에게 배급하는
나를 너희는 '우리 선생님'이라고 부르는구나.

너희 속에 피는 무수한 꿈의 씨앗과 보석 같은 생각들
즐거이 바라본다.

청소시간 빗자루를 든 저 아이는 훗날 누군가의 스승이 될지도,
교실 창문 가에 매달린 저 아이는 훌륭한 군인이 될지도,
화분에 물을 주는 저 아이는 아픈 사람을 힘이 되는 의사가 될지도
아!
너희의 작은 손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꽃 피워라, 내 아이들아.
들꽃이 스스로의 향기로 주변을 향기롭게 하듯 너희의 생각을 향기롭게 꽃피워라.

굳세어라.
폭풍이 지나간 들판에 작은 풀들을 보렴.
비바람에 시달려도 다시 일어서듯 너희 속에 들어있는 굳센 의지를 믿고 강가의 포플러처럼 굳세게 견디어라.

나누어주어라. 강마을 아이들아.
한 톨의 알밤이 스스로 자신을 썩여 한 그루의 밤나무가 되면 수없는 생명을 먹여 살릴 수 있듯이
너희가 이룬 아름다운 열매를 자신만 갖지 말고 더 힘들고 더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주어라.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고마운 내 아이들아
너희가 있어 내가 선생으로 불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월에 피는 어느 꽃보다 더 어여쁜 내 아이들아,
너희가 있어 세상은 더 아름답구나.
오월은 더 푸르구나.
너희가 있어 세상이 살아있구나.

영원히 들꽃처럼 눈부시게 굳세게 피어나거라.
강마을 아이들아.


이렇게 글 한 편을 쓰고 교실로 들어가니, 수민이가 동아리 축구에서 빠졌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골키퍼여서 안 하겠다고 했답니다.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수민이 대신 1학년 성주가 골키퍼를 한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자기 마음에 들면 하고 아니면 안 하는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 동안 내가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뜬구름이었다는 아득함 밀려옵니다. 자꾸만 수민이에겐 ‘너에게 실망했다’고 중얼중얼 지청구가 나옵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는 동안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참으로 눈부신 오월의 자연이 펼쳐져 있습니다. 운동장가에는 파란 새잎을 가득 달고 플라타너스가 둘러서 있고, 그 너머에 푸른 보리밭, 더 멀리 무수히 작은 손을 흔드는 포플러가 선 강가가 보입니다. 강 둑 위 벼랑엔 흰 꽃으로 뒤덮인 아카시아 나무 사이로 두둥실 보랏빛 등불 같은 꽃이 핀 오동나무가 있습니다.

그냥 아이들일뿐입니다.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체를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을 찬찬히 돌아 볼 수 있다면 아마 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 혼자 정한 아이에게 실망하고 속상해하고 있더군요. 아마, 수민이도 내일이나 모레쯤 알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을 어렵게 생각해서 아는 저를 저 아이들은 선생님이라 부릅니다.

강마을의 오월은 꽃보다 더 예쁜 아이들이 있어 더 푸릅니다.

덧붙이는 글 | 조인스/까페/사이버독자위원회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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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의령군 지정면의 전교생 삼십 명 내외의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교사 이선애입니다. 맑고 순수한 아이들 눈 속에 내가 걸어가야할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죠.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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