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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운 집행위원장
박석운 집행위원장 ⓒ 김영광
'민족자주·민주주의·민중생존권 쟁취 전국민중연대'(이하 민중연대) 박석운 집행위원장을 만난 것은 4월 13일부터 사흘 간 한국사회포럼이 열린 수원 KBS 연수원에서였다. 밤 9시를 훌쩍 넘긴 시간, 인터뷰 대상자를 만나는 일이 수월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처럼 애가 탄 적은 없었다.

어렵사리 약속 정하고, 취소하고, 바꾸기를 몇 번이나 거듭한 것은 물론,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에도 그는 급한 일로 불쑥 자리를 뜨곤 했다. 곁에 있는 사람이 초조해질 만큼 동분서주한 그에게 짜증이 날 법도 했건만, 그의 바쁜 일상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지친 기색 없이 계속 일에 매달리는 그가 신기하기만 했다. 오히려 내가 바쁜 사람의 시간을 괜스레 잡아먹고 있는 건 아닌지 슬며시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한국 사회운동의 발자취, '박석운'

옆길로 빠지지 않는 외곬 운동가. 먼저 한 언론에 소개된 그의 이력을 보자. 55년 부산 생, 부산고 졸업. 73년 서울대 법대 입학. 유신반대 시위 등과 관련 두 차례의 구속과 제적, 복학을 반복. 86년에야 졸업.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시민공익법률상담소에서 노동상담.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권인숙씨의 국가배상금으로 세운 노동인권회관 초대소장, 노동정책연구소장 등 역임. 산업재해 및 직업병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인권 신장 활동과 민중으로 불리는 일반 사회운동으로의 운동 영역 확장. 현재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가 보인다. 그는 한 순간도 옆길로 샌 적이 없다. 고단한 운동의 길,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눈길이 떠난 지 오래된 그늘진 곳, 그곳의 사람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궁금했던 건 책 냄새 맡고 싶어 고등학교 도서반에 들어갔고, 법대에 합격한 '범생이'가 법관으로서의 안정된 미래를 마다하고 고달픈 사회운동가가 된 까닭이었다.

그의 운동 이력은 서울대 한국사회연구회(한사연) 활동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엄혹하고 무시무시했던 유신 치하에서 유명한 교내 학생운동 서클에 가입했던 일을 두고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거 있잖아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그냥 흡입되어 갔어요"라고 했다. "독배를 마시듯이"라는 표현도 썼다.

학생운동을 하느라 구속과 수배를 반복해서 당하다 보니, 기관원들의 '핵심관리대상'이 됐고, 준비해 오던 '현장이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감시도 피할 겸 택한 일이 "조영래 변호사의 그늘 아래" 들어가 노동 상담을 하는 일이었다.

그때 시작된 노동계와의 인연은 노조의 직선간부도 아닌 그를 노동운동의 중심인물로 만들었다. 문득 그와 함께 노동자들 곁에서 울고 웃었던 몇 사람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한 시대의 운동주역들이었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 분들이 초심을 많이 잃었고, 이미 루비콘강을 건너 버려 되돌아오기 힘든 상황이라고 판단되지만, 그들의 양심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감은 버리지 않고 있어요."

그의 입으로 듣는 루비콘강은 생생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 우리 현실은 반역자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자기 목숨을 위해 강을 건넌 시저들로 넘쳐나지 않는가. 못 돌아올 거라 여기면서도 '강을 건너간 시저들'을 담담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다.

"늘 낙관적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투지가 있다고도 하는 거 같고. 밖으론 표현 안 해도 자신 있게 살려고 하거든요."

정반대의 가치관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바라보는 시선의 바탕에 낙관성이 있다는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판단과 해결책을 가지고 상황을 자신 있게 대처해 왔던" 그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순진할 정도로 낙관적인, 안팎이 같이 낙관적인...

"겁나서 저한테 그런 제안 하겠어요?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하지 않겠어요?"

공직 제의를 받은 적 없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하긴 그렇다. 만일 그가 노동부 장관이라면? 다름 아닌 노동부 장관이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표명을 두고 막말을 해 많은 노동자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있는 지금, 그가 장관이라면? 사고 치길 희망하는 그라면? 즐거운 상상이다.

과거에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요즘도 회의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얼굴을 보는 사이지만, 한 번도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다. 좋은 기회다 싶어, 뚫어져라 살펴봤다. 천진난만한 눈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그가 군대갈 당시 병역법에 따르면,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살면 군대를 안 가도 됐다. 많은 운동권 인사들이 병역면제의 혜택(?)을 받은 것도 이 조항 때문이다. 하지만 유신정권은 운동권 씨를 말리려 했는지 바로 군대에 보내 이중징역을 살게 했다.

2년 반 만기 출소를 하니 동료들 모두 군대에 끌려가고 자기만 남았더란다. 안 되겠다 싶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긴급조치 석방자들을 조직하고 있었는데, 병무청에서 불렀다. 그는 출소 후 바로 징집하는 것은 월권이며 직권남용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 제 발로 병무청에 들어갔다.

결과는, 병무청에서 징집영장을 받는 어이없는 사태 발생. 논산훈련소로 직행할 판이었다. 그는 직원들 앞에서 칼을 들고 징집을 거부한, 이른바 '박석운 식칼 사건'을 일으키고 도망자 생활로 접어든다. 강제 징집에 나선 병무청 직원 앞에서 "법 절차상 입대 30일 전에 영장을 보내야 한다"고 떠들었던 그를 순진하달 수밖에.

그래도 소득이 있긴 했다. 그의 30년 사회운동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 부인을 도망자 생활을 하며 만난 것이다. 생계 걱정에 힘들었던 적이 없었냐는 질문에, 그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빚은 좀 있지만, 필요할 때 돈이 생겨요. 어떻게든 해결하며 살고 있어요. 비관 안 하고 살아요." 부창부수로 부인 역시 "억수로 낙관적"이라고 한다.

박석운 집행위원장
박석운 집행위원장 ⓒ 김영광

"시민운동, 진보를 향한 지향점을 찾아라"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을 잇는 다리가 되어 아마 참여연대 회원들 중엔 그가 참여연대 창립 멤버이자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했던 경력은 모른 채, 민중운동의 대표 선수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을 '상품성'이라는 잣대로 바라보는 것이 천박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알아주는 이 적고, 나중엔 애가 끓어 포기하고 마는 민중운동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그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를 인터뷰 하던 날에도 울산 플랜트 노동자들이 불법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있다며 긴급 기자회견에 참석해 주기를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궤도 노동자들이, 공무원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쫓겨나거나, 경비대에 폭행을 당하거나, 천문학적인 액수의 가압류를 받는 날, 나는 그의 전화를 받는다.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절박한 그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민중운동이 활발했다면 제가 시민운동에 집중할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 어찌 하다보니까 사람이 없더라고요. 제가 손 털고 나오면 상당히 어려워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빛은 안 나고 아우성 가득한 곳만 바라보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가 들려준 대답이자, 내가 그를 만난 이유다. 분노만 마음에 담고 거칠게 세상에 저항하는 불나방 같은 이들을 모두가 외면할 때, 그는 자기 자리 묵묵히 지키며 그들과 함께 해 온 든든한 버팀목이다.

"노동, 농민, 빈민 운동이 기층 계급운동이지만, 실제로 민주화운동이에요. 민중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공익적 과제의 책임 있는 주체여야 합니다."

그의 이런 소신은 탄핵 반대 운동,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 등 굵직한 사안이 많았던 지난해, 그에게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을 잇는 다리 노릇을 하게 했다. 그에게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은 접근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치나 지향에서 같은 곳에 닿아 있다.

"민중운동이 좀 더 사회 공익적이고 일반 민주주의적인 과제에 대해 주체적으로 복무할 필요가 있다"는 그가 반대로 시민운동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한 마디로 "진보를 향한 지향점을 더 분명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진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는 "사회공익, 일반 민주주의적 과제에 앞장서는 민중이 곧 시민이라는 인식이 부족하다"며 시민운동진영의 편협한 시민 개념을 아쉬워했다. 참여연대를 향한 주문도 잊지 않았다.

"민중운동을 더 도와 줬으면 좋겠어요. 약자, 소수자에 대해 더 헌신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서 있는 위치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유용하지 않을 때가 있다고요. 그런 점에서 참여연대의 역할이 중요해요."

비정규 문제, 운동에 대한 재점검 필요

지난 30여 년을 한결같이 낙관적으로 운동해 온 그에게도 요즘 깊은 고민이 있다.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다.

"다른 문제들은 오래 하다 보면 이렇게 풀릴 수 있겠구나 하고 보이는데 비정규직 문제는 안 그래요. 어지간한 문제는 다 나름대로 방안과 승부수가 있기 마련인데, 비정규직 문제는 작년 하반기부터 집중적으로 고민했지만 여전히 앞이 안 보여요. 답답해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실천적 상상력의 고갈"을 고백하던 그는, 요즘 전통적인 방법론이나 죽 써 왔던 방법론을 업그레이드시켜야겠다고 말했다. 재점검, 새로운 방법론이란 말도 툭툭 던졌다. 혹시 그가 다른 길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잠깐 의심이 들었다.

나만의 경험인지 모르겠으나, 살다 보니 새로운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열심히 운동하던 선배들이 '새로운 길'을 운운하면, 그것은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나 가야 할 길과는 반대의 길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재점검 방향은 우리 사회가 진보해야 할 방향과 일치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는 누구도 자신 있게 단언하지 못하지만, 그의 고뇌만으로도 길을 찾는 혜안을 얻은 것처럼 든든해진다. 새삼 그의 묵묵함이 소중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참여사회]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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