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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1일에 '검·경 수사권 조정을 위한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이 공청회의 주요 쟁점이었던 경찰의 수사권독립 문제는 지난 90년대부터 대선을 치를 때마다 주요 공약으로 등장했었으나 그 때마다 결론을 내지 못했던 미해결 과제다.

지금까지의 논의과정에서 찬반양론이 무수한 논거로 제기되어, 일반 국민들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이 글에서는 국민·검찰·경찰의 본연적 권리·의무의 상호관계를 기술함으로써, 먼저 문제의 본질을 접근하려 시도할 것이다. 이를 기초로 현재 우리나라의 수사제도의 현실을 비판해 보겠다.

수사권 독립 문제의 본질

현대국가에서 국민은 국가에게 폭력독점을 허용한다. 그 대신, 개인은 국가가 – 여기서는 바로 범죄로부터 – 자신의 안전과 재산 보장을 요구할 권리와, 동시에 자신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 받지 아니할 권리를 가진다.

이 두 권리는 종종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18세기 유럽에서는 피해자의 범죄에의 저항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고문을 비롯한 자의적 형사소추과정을 통해 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특히 프랑스혁명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제도개선에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현재의 제도화된 범죄처리과정을 확립하였다.

구미의 선진국들과 일본의 형사소추제도는 근본적인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이는 범죄발생부터 재판까지의 전 과정을 '하나의' 행위자에게 위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범죄피의자와 국가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권력이 서로 상충되는 이해를 관철시키려고 대결할 때, 보호되어야 할 피의자의 인권이 침해될 위험성이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들은 예외 없이 범죄소추 과정의 중요한 두 권한인 실질적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여, 각각 독립된 두 기관인 경찰과 검찰에 위임하고 있다. 경찰과 검찰은 각자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게 됨으로써 피의자의 인권보호를 위한 기본 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검찰과 경찰의 위상과 환경

21세기의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노무현 정권이 대책 없이(?) 검찰을 독립시켜 버렸다는 점이다. 이를 기화로 검찰은 정권을 위한 봉사를 중지하고 국민을 위한 사법서비스 기관으로서 봉사할 기회를 스스로 찾아 나갈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 이전에는 검찰은 위로는 정권의 적극적 시녀 역할을 하거나 적절한 공생관계를 찾으려 애썼던 반면, 아래로는 경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기나긴 독재 시대를 막 지나온 지금, 불행히도 검찰을 통제할 기관이나 제도를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 현재 1) 하나의 행위자가 누구로부터도 통제 받지 않으면서 2) 기소권과 수사권을 포괄하는 범죄소추의 전 과정을 장악하고 있다.

이는 전근대적 수준의 제도에 다름 아니다.

둘째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여론의 영향력 강화와 함께 주요 공적 기관들에 대한 감시기능 또한 – 만족할 만하지는 않지만 – 그래도 상당히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부총리를 비롯해서 많은 고위 관리들이 이미 줄줄이 낙마하였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정보가 공개되는 영역은 급속도로 확장될 것이라 전망할 수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용되는 공공기관이 이전에는 소수의 뜻을 충족시키기 위해 행위했던 경향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공공 서비스의 최종 소비자인 국민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사회적 삶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지향해 나가는 중요한 시점에 있다는 점이다.

현행 형사소추제도의 문제점들

그러나 '경찰수사권 독립'의 이슈와 관련한 검찰의 주요한 논거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경찰자질론'과 '인권보호'라는 명목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방식은 일종의 '불신론'으로서 논쟁 자체를 검·경 간의 세력싸움으로 격하시켜 버리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보다 거시적이며 사회적 관점에서의 접근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의 세금으로 운용되면서 국민에게 사법서비스를 제공할 의무를 충족시켜야 할 검찰의 언행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말이 나온 김에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겠다.

우선 '경찰자질론'은 경찰을 지휘·감독했던 검찰이 상당 부분 그 책임을 함께 져야 할 문제이다. 1987년 경찰서 내에서 일어났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경찰보다 오히려 수사를 지휘했던 검찰이 그 책임을 더 크게 통감하여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경찰자질론'과 동시에 '인권보호론'에 대한 반박으로서는 '검찰 자질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검찰은 아직도 박종철 사건을 '경찰자질론'의 근거로 삼고 있는데, 그렇다면 검찰에서 더 최근(2002년)에 조사 중 피의자 사망사건이 발생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불과 1000여명의 검사들이 연간 200만 건의 사건(97년 기준)을 수사에서 기소에 이르는 전 과정을 총괄·처리해야 하는 현재의 조건 하에서 검찰은 과연 제대로 된 사법서비스를 수행해낼 수 있겠는가? 모든 사건처리가 피의자의 인권 침해를 받지 않으면서 정확한 실체적 진실이 규명되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 '제도적 한계에 의한 검찰의 자질론'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경찰대학을 비롯해 전국의 수십 개 이상의 대학과 전문대학에 경찰학과가 설립된 지금, '경찰자질론'은 시대착오적 논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더욱이, 현재의 논의는 실제로 검찰이 수행해 오고 있던 수사행위의 권리를 경찰에게 넘겨달라는 주장이 아니다. 현재 실질적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경찰을 위해, 검찰이 점유하고 있는 형식적 법적 권한을 제한 내지는 부분적으로 포기해 달라는 것이다. 경찰의 사건처리율이 약 96%인 현실을 법적으로 추인해 줌으로써 경찰이 더욱 주체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사건처리에 임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도 경찰의 수사권을 인정해주기 꺼림칙한 분이 있다면, 검찰은 수사권의 (부분적인) 포기 이후에도 경찰의 모든 노력을 기소권 행사 여부 하나로 좌지우지할 권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점을 말씀해 드리고 싶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경찰과 검찰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 국민들은 신속한 수사와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되며 보다 진실에 입각한 재판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현재 경찰이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사건도 검사의 지휘를 기다려야 함으로써 처리가 지연되는 경우가 빈번하며, 1996년의 경우 검찰의 재소환조사로 인한 교통비용만도 (건 당 1명으로 계산하여) 년간 약 230억원이 소요되고 있다.

90년대 초반에 국가는 경찰과 검찰의 억지 짜맞추기 수사로 인한 '억울한 옥살이' 가운데 922건에 36억원의 형사보상을 하였다. 36억원의 세금낭비와 그 책임소재도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인생경력에 치명적인 옥살이를 억울하게 감내해야 했다. 이는 21세를 살아간다고 자부하고 싶어 하는 우리 모두가 사법제도 개선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급성을 강변해 주고 있다.

수사권독립 토론이 지향할 점

경찰의 수사권독립 이슈는 필자가 보기에, 국민뿐만 아니라 검찰과 경찰도 수혜자가 될 수 있는 제도를 지향하고 있다.

지금까지 열악한 제도적 구조적 조건 하에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려고 노력해 주셨던 검찰과 경찰에 대해 필자는 한 편으로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점들 또한 각각 검찰과 경찰이 국민을 위해 '열심히 하려고 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생겨난 지엽적 현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고 서로 진정으로 존경하고 신뢰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면, 몇 년 동안 900여 건의 '억울한 옥살이'를 생산해 내었던 지금의 제도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성찰에 근거한 제도개선은 행정조직상으로도 다른 직제 하의 관청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이 협력적 동반적 관계를 갖추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검·경 수사권 조정을 위한 공청회'등에 관한 논란을 검·경 간의 밥그릇 다툼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언론을 존중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검·경간의 논의가 밥그릇 다툼으로 진행된다 하더라도, 언론은 심층 분석을 통해 검찰과 경찰에 시대적 요구에 걸맞게 토론을 진행할 것을 요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의 초점은 무엇보다도, 한국적 상황에서 사법서비스의 최종수혜자인 국민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제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이어야 한다.

필자는 경찰과 검찰 모두를 존경한다. 그리고 경찰과 검찰 모두가 국민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현 시점에서 필자는, 경찰과 검찰이 국민을 향한 자신의 진정성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토론에 임하며,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주요 행위자로서 진정 국민의 입장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전문인으로서의 경찰과 검찰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이끌어내며, 검찰과 경찰도 상대를 전문성 있는 협력자로서 인정하고 신뢰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사람들은 성숙된 사회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낸 검찰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사랑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철 기자는 동양대학교 행정경찰복지학부 교수입니다.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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