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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와 이웃에 사는 나리 이모와 함께 앞산 진달래 꽃 따러갔다 돌아오는 길
ⓒ 송성영
우리 집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 큰 아이 인효 녀석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빠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
"뭔 소리여, 걸어와. 별것두 아닌 거 가지고…."
"황사 바람인디."
"안뎌, 걸어와라. 잉."

나는 녀석들의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름드리 동구나무를 지나 논길을 가로질러 앞산으로 향했습니다. 황사 바람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간혹 회오리 바람까지 몰아쳐 가재처럼 뒷걸음질로 걸어야 했습니다.

녀석들은 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 20분 남짓을 걸어야 집에 도착합니다. 나는 녀석들이 걸어오게 될 마을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길 반대편 산 아래에 진을 쳤습니다. 두 눈을 몰래카메라처럼 고정시켰습니다.

녀석들이 걸어오게 될 마을길과 내가 진을 치고 있는 중간께는 논들이 보기 좋게 펼쳐져 있습니다. 시야가 툭 터져 있어 녀석들이 버스에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장면을 한눈에 포착할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길가에 들꽃들이 지천이고 산기슭에는 진달래꽃들이 무수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할 일없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녀석들이 어떤 모습으로 걸어올까?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올까? 아무 표정 없이 무작정 걸어올까? 뛰어 올까? 아니면….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30분 정도를 보냈는데도 아이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버스는 지나쳤는데 녀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끝에 녀석들이 학교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나보다 하고 결론을 내릴 무렵 멀리에서 또다른 버스가 다가왔습니다. 정류장에 잠시 멈췄던 버스가 출발하고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길을 건넜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분명했습니다.

가슴이 콩콩 뜁니다. 어떤 모습으로 올까? 궁금해집니다. 아빠를 보게되면 어떤 표정일까? 나는 나를 봅니다. 1년에 한차례씩 아내의 손을 빌려 깍는 빡빡 머리에 허름한 차림새, 영락없이 정신병원에서 뛰쳐나온 몰골입니다.

아이들에게 발각될까봐 똥누는 폼으로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히죽 히죽거립니다. 히죽거리는 것도 부족해 낄낄거리며 웃습니다. 웃다가 주변을 쓱 둘러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껄껄거리며 큰 소리로 웃습니다.

마을 회관에 잠시 가려졌던 녀석들이 점점 가까이 보입니다. 바람이 심하게 몰아치자 가재처럼 뒤로 걷습니다. 거꾸로 걸어오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부지런히 걸어온다 싶다가도 한 놈이 잠시 멈춰서면 덩달아 멈춥니다. 길가에 쪼그려 앉아 뭔가를 봅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20분쯤 걸릴 것이라는 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었습니다. 집에까지 1km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녀석들은 200m 정도의 거리를 걸어오는데 10분 가까이 걸렸습니다. 이런 걸음으로 간다면 집에까지 40분은 족히 걸릴 것입니다.

별 이유도 없이 녀석들이 대견스러워 내 속은 근질거립니다. 속에서 웃음이 기어 나옵니다. 웃음이 샘처럼 솟아오릅니다. 자꾸만 웃음이 나옵니다. 실성한 사람처럼 자꾸만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견딜 수 없을 만치 속이 근질거려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사정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나는 참다못해 "까악, 까악" 까마귀 소리를 냅니다. 아이들은 뭔 소린가 싶어 잠시 게 걸음을 멈춰 뒤돌아보다가 다시 걷습니다. 전혀 눈치를 못 챕니다. 이번에는 고양이 소리를 냅니다. 아이들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주변을 휘휘 둘러봅니다. 나는 연녹색 잎을 피우고 있는 나무에 몸을 바싹 붙입니다.

아이들은 다시 딴 짓을 하며 게 걸음으로 걷고 나는 다시 별의별 소리를 다 냅니다. 이번에는 알아듣게 큰 소리를 내지릅니다. 알아차린 아이들이 내 쪽으로 손짓합니다. 속아서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이지만 기분 좋게 와 하하하 웃습니다. 아이들은 아빠가 저만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넉넉하게 펼쳐진 논을 사이에 둔 저만치 길, 아이들과 부모 사이는 딱 그만큼의 거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볼 때 나는 즐겁습니다. 내가 아이들 손을 움켜쥐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천천히 가라, 빨리 가라, 참견한다면 아이들도 괴로울 것이고 나 또한 괴로울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잡지 않아도 스스로 모진 황사 바람을 헤치며 걸어옵니다. 아이들은 목적지를 정해 놓고 걷는 어른들처럼 똑바로 걸어오는 법이 없지만 제 갈 길을 씩씩하게 갑니다. 온갖 해찰을 다 부리면서도 가고픈 곳으로 갑니다. 목적지가 없어 보이지만 신통하리 만큼 목적지를 찾아 갑니다. 재미있게 걸어갑니다.

어른들에게 길은 단지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불과할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 있어서 길은 놀이터이기도 합니다. 또한 길은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길과 함께 걸으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힘들면 힘든 대로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대로 뭔가를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기 좋게 속여먹어서 기분이 째진 나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집에까지 누가 먼저 가나, 달리기 하자!"

나는 논두렁길을 냅다 뛰고 아이들은 도로를 따라 질세라 내달립니다. 앞만 보고 한참을 뛰다가 길 쪽을 보니 녀석들이 뛰지 않습니다. 느릿느릿 걸어옵니다. '메롱' 혀를 내보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당했습니다.

"왜 이리 느즌겨?"
"버스가 그냥 지나갔어. 기사 아저씨가 우리 슬쩍 보더니 고개 돌리고 그냥 치나쳤어"
"근디 아빠, 우리 19단 외워야 한대."

초등학교 4학년 짜리 큰 아이 인효 녀석이 조만간 19단을 외워야 한다고 그럽니다. 20분 거리를 40분 넘게 걸어오는 녀석에게 19단을 외라니, 뭐가 그리들 급한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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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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