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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존재 자체를 없애려고 하는 파괴적인 NGO까지 대화의 상대로 삼을 이유가 없다.”
“NGO가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WTO 자체가 농업에 파괴적이다.”


WTO(세계무역기구)가 갖고 있는 유일의 시민사회 창구인 공개심포지엄 첫날인 20일 고위급패널 토론에서부터 NGO 활동가와 WTO 사이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오고 갔다. 전 WTO사무총장 피터 서덜랜드 비롯한 전직 관료들은 자유무역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빈곤퇴치와 개발의 위력적인 도구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지난 10년간 WTO가 법과 보편주의에 의한 통치와 기구운영에 있어서는 투명성과 예측성을 향상시켰고, 개발도상국의 투자를 증진시키며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자화자찬하였다.

이 모든 것은 WTO가 자유무역의 방식 중에서 유일하게 법과 규칙과 합의에 근거한 다자주의 기구이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서만 민주주의와 투명성이 보다 더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따라서 도하개발아젠다가 무조건적으로 홍콩각료급회담에서 일괄타결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심지어 호세 마누엘 바로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의장은 칸쿤에서 개발도상국이 G20, G90 등의 형태로 스스로 연합을 형성하여 선진국에 반기를 들어 협상을 실패로 이끈 것이 바로 WTO가 진화했다는 증거라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홍콩각료급 회담이 새로운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며 우리에게 선택지는 ‘다자주의 아니면 정글의 법칙’뿐이라고 협박성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한 개발도상국과 NGO들의 반박이 이어졌다.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축하인사’에서 다자주의 자체는 목적이 되지 못하며 빈곤퇴치와 개발을 위한 더 큰 의제의 한 부분이어야 하며, 윈-윈 전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지난 다자주의에 기반을 둔 자유무역의 확장이 아프리카에서 개발을 촉진시키기는커녕 빈곤과 무역 불균등 및 세계 무역에서의 아프리카의 소외만을 촉진 시켰다고 비판하였다.

요하네스버그 성공회 대주교는 자유무역이든 다자주의이건 시스템이 움직이는가 안 움직이는가가 질문의 핵심이 아니라 시스템이 누구를 위해서 움직이는가를 우리가 물어야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남반부초점의 월든 벨로는 ‘WTO는 자유무역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WTO 협상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인 지적재산권문제Trips와 농업협상에서 WTO식 자유무역의 결과는 몇몇 초국적 자본으로의 권력과 자본집중, 그리고 생산과 유통의 독점’이라며 ‘WTO야말로 자유무역을 해치는 장본인’이라고 비판했다. 농민연대를 대표하여 참석한 한국가톨릭농민회 정재돈 회장은 “자유무역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않는다”면서 “정작 자유무역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이 WTO가 아니냐”고 반문하며 “저들은 자기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비꼬았다.

자유무역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농산물이 선진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관세를 낮추고 국내보조금을 없애는 것이 저개발국가의 개발과 중소농들의 생활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도마위에 올랐다. ‘농산물 덤핑과 가격 폭락’에 대한 패널토론에서 발표자들과 참석자들은 자유무역이 저개발국을 발전시키고 중소농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일축하였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라고 소개한 한 참석자는 아프리카에서의 자기 경험은 ‘선진국 농산물 시장을 개발도상국에 개방하는 것’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역설적으로 개발도상국에서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고 있는 선진국에 있는 초국적 기업들과 개발도상국의 일부 대농들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이 개발도상국의 대농들에게 돌아가는 막대한 수입도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스위스은행 비밀 계좌’로 직행하거나 부패한 관료에게 뇌물로 들어갈 뿐이라고 소개하였다.

아프리카 소농연합에서 왔다는 한 참석자는 아프리카의 소농들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막대한 수출보조금을 받고 덤핑으로 들어온 싸구려 농산물 때문에 자기옆집에조차 농산물을 못 팔고 도산하는 형편이라고 소개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접근하고 싶은 시장은 선진국이 아니라 자기 이웃들이니 제발 내 이웃에게 내가 키운 닭을 팔 수 있게 선진국의 농산물 수출보조금이나 철폐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키운 닭에 비해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덤핑되고 냉동 닭의 가격은 5분의 1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지난 10년간 감비아의 유럽 닭 수입량은 300배 증가하였고, 자체 닭 생산은 50%정도 감소하였다.

300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유무역과 시장개방이 중소농들의 생활향상과 개발도상국의 개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자 한 참석자는 “모두가 다 이렇게 동의하는데 왜 이것이 정책화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이에 대해 한 참석자는 “그것은 여기에 WTO관료와 정부대표단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위의 폭소를 자아내었다.

사실 이 말은 WTO가 투명성과 민주주의를 보여준답시고 개최한 공개심포지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뼈있는 농담이었다. 개막식과 장관급의 정부관료가 참석했던 오전 토론이 끝나자 WTO와 각국의 정부 관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5개로 나누어져 진행된 패널토론에는 NGO활동가들만이 참석하는 듯 보였다.

WTO 공개심포지엄은 WTO와 NGO사이의 공개적인 토론이 아니라 ‘WTO 빌딩’안에서 벌어진 NGO들만의 공개 심포지엄이었다. 때마침 WTO 건물바깥에서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한 시위 참석자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써 있었다.

신은 죽었다. 그리고 WTO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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