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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어머니 모습입니다. 젊었을때는 한 인물 하셨을 울 어머니인데, 지금은 이마와 볼에 주름이 몇 줄씩 깊게 패어 있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곱고 단단하던 이빨들도 이제는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올 해 설날에 찍은 사진인데, 울 어머니는 이 사진으로 명정 사진을 대신하자고 하는데 나는 못내 손사레질을 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울 어머니 모습입니다. 젊었을때는 한 인물 하셨을 울 어머니인데, 지금은 이마와 볼에 주름이 몇 줄씩 깊게 패어 있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곱고 단단하던 이빨들도 이제는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올 해 설날에 찍은 사진인데, 울 어머니는 이 사진으로 명정 사진을 대신하자고 하는데 나는 못내 손사레질을 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권성권
그런데 그런 생각은 한낱 물거품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생각했던 바람과는 달리 시집살이는 말도 못하게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에서 밥을 짓거나 설거지를 할 때면 할머니는 꼬박꼬박 간섭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렇게도 잘 닦아 놓았는데도 괜히 그릇이 더럽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따뜻한 물을 데워서 설거지를 하려고 해도 장작불이 아깝다며 그냥 찬물을 쓰라며 구박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남편이 나서서 도와주고 또 거들어 주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하는 말에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집안 꼴이 우습게 된다고 생각했던지, 아니면 애당초 무덤덤한 성격이라 그런지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집안 일보다는 차라리 들녘에 나가 일을 하는 게 속이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들판에 나가 밭일과 논일을 하는 게 집안 일보다는 더 힘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앓이는 덜했기 때문에 속은 그래도 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몰래 노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중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몰래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를 마중나가야 하는 어머니 심정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노름으로 빚을 지고, 또 땅문서도 하나 둘 붙잡히고 있었으니, 정말로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듯 했습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에도 부부금슬만은 좋았던지 어머니는 스물 한 살에 큰 아들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들을 귀하게 여기던 터라 아들을 낳은 것 때문에 어머니는 조금 기를 편 것도 같았습니다. 집안에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다는 그 자부심 하나가 그토록 어머니 어깨에 힘을 실어 준 것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서른 여덟이 되기까지 어머니는 아들 여섯에 딸 하나를 줄줄이 낳았습니다. 물론 마흔이 되서도 아들 하나를 낳긴 했지만 그 당시 돌림병이 나돌았는지 그 녀석은 태어나자마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이름모를 병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갔다지만, 어머니는 그 녀석 때문에 지금껏 마음 아프다고 말을 합니다.

내가 철이 든 때는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인 듯 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술 때문에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떠났고 어머니는 홀로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벌써 다른 형들과 누나는 집안을 벗어나 도외지로 떠나고 없던 때였습니다. 당연히 살림살이며 논밭 일은 모두 어머니 몫이 되었고, 나와 바로 위에 형이 아버지와 형들 틈을 매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때 무렵이 철이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아직 연탄이랑 기름보일러가 들어 오기 전이었습니다. 시골 집집마다 소나무로 땔감을 구해다 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불 소시개로는 가을철 마른 소나무 이파리들을 긁어서 쓰곤 했는데, 그 이파리들을 긁어모으기 위해 큰 산등성이를 한 시간 넘게 오르락내리락 했던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땐 어디서 힘이 넘쳐났는지, 내가 지게로 그 솔잎 한 짐을 지고 집까지 오는 동안 여러 차례 쉬었건만, 어머니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머리 하나에 그 온 짐을 떠받치고 집까지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남편 없이 홀로서 하는 힘든 일을 어린 자식 둘을 거느리고 다 해야 했고, 또 남편 없이 당하는 설움들도 적잖이 겪었습니다. 그런대로 나무 땔감이며 솔 이파리들이며, 또 논밭에 풀들을 뽑고 가을걷이를 하는 일들은 힘이 들긴 했지만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것은 남자들이 나서서 해야만 하는 일이었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정말 가슴이 미어졌던 것입니다.

그 가슴 미어진 설움들 가운데 어머니가 가장 마음 아파했던 것은 그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동네 앞에 있는 논과 밭 사이에 길 하나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모두 동네 어르신들이 나서서 하는 일이었는데, 어머니는 여자인 까닭에 그 험한 일은 손도 못 댈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 뿐이었는데, 어이없게도 그 길을 내면서 옆에 있는 밭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하필 우리 밭만큼은 길을 닦는데 너무나 많이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냐고, 어머니는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밭과 나란히 서 있는 그 밭 주인 아저씨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만 쏟아 놓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남편 없는 설움을 가장 크게 느꼈고, 두 번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든 없는 일이든 동네에서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는 남편 없는 설움을 당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억척스런 우리 어머니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그런대로 아픈 무릎과 아픈 허리를 붙잡아 가며 농사일을 꾸역꾸역 했지만, 올해 들어서는 정말로 허리와 다리를 못 쓰게 되었습니다.

무릎과 허리에 침을 맞아가며 또 파스를 붙여가며 일을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쉬어야만 되었습니다. 아직도 일할 기력이 남아 있다며 욕심을 부려보지만, 마음과는 달리 어머니 육신은 힘없이 쭈글쭈글 늙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런 것은 어머니가 아직까지 정신은 멀쩡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시골 동네에 장사치들이 들락날락거리면 윗집 아랫집 할 것 없이 모두들 우리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 장사치들이 값을 제대로 매기는지 아니면 다르게 하는지, 우리 어머니가 그 셈을 맞춰주기 때문입니다.

그것 하나만큼은 동네 사람들 모두를 앞섭니다. 또 가방 끈이 길다고 생각하는 나보다도 훨씬 더 잘하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비록 받침도 틀리고 맞춤법도 다 틀리지만 그래서 초등학생의 그것에 훨씬 못 못 미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그것 하나만큼은 너무나 잘 합니다. 더군다나 킬로그램을 근으로 바꾼다든지 더하고 빼는 셈들, 그리고 곱셈까지도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정말 잘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그걸 남 앞에서 자랑하려고 들지는 않습니다. 그저 배운 재주가 그것뿐이니 오히려 목숨 다하는 날까지 동네 사람들을 위해 그 좋은 일들을 더 해 주고 싶어 합니다. 더욱이 어머니 나이 또래를 살고 있는 분들이 하나 둘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그걸 자랑하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을 따름입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험한 시집살이를 해야 했고, 또 노름과 술로 인생을 탕진하다시피 하며 젊은 시절에 저 세상으로 떠난 아버지 까닭에 정말로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섬에서 뭍으로 혼인해 와서 정말로 멋진 새 삶을 살아보려던 그 부푼 꿈은 돌연 시집살이와 아버지 뒤치다꺼리로 한평생을 살아야 했으니, 그 가슴 아픈 세월을 무엇으로 보상해 주어야 할지 생각할수록 가슴 아프기만 합니다.

더욱이 큰 아들에서 막내인 나까지 늘 걱정하며 한 평생을 살아 온 우리 어머니였으니, 일곱 자식들은 그 사랑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던 그 옛말처럼 일흔이 훌쩍 넘었는데도 어머니는 자식들 걱정에 아직까지도 제대로 한숨도 못 내쉽니다. 어엿하고 떳떳하고 또 남보란 듯이, 자식들 모두가 자랑할 만한 자리에 서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키우지 못했다며 못내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어머니 탓이 아니라 자식들이 못나서 그런 것이니, 어머니는 아무런 탓을 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버려도 될 그 걱정들을 무덤에까지 이고 갈 우리 어머니일 듯싶습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곧 5월 어버이날이 다가오는데, 그런 한평생을 살아 온 어머니 생각을 하니, 괜히 눈물이 나옵니다. 그저 어머니께 죄송하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못난 자식들 때문에
한 평생을 제대로 편히 살지 못하고
칠순 넘도록 제 몸보다는
오히려 일곱 자식들 더 걱정하느라
숨 한 번 제대로 편히 내 쉬지 못하고….
어머니! 그래도 어머니!
이 말 한 마디는 꼭 해 드리고 싶어요.
'사랑해요, 어머니, 세상 누구보다도 세상 무엇보다도….’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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