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하동 섬진강 재첩국
ⓒ 이종찬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향 좋고 썬한(시원한) 하동 섬진강 재첩국이 왔어예.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오늘 새벽에 마악 건져올린 재첩으로 끓인 맛 좋은 섬진강 재첩국이 왔어예, 재첩국 사이소~ 하동 섬진강 재첩국!"

요즈음 남녘에서는 이른 새벽마다 재첩국을 파는 아주머니들의 구성진 목소리가 선잠을 깨운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경상도 아주머니들의 억세면서도 가늘게 휘어지는 목소리.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하는 그 아득한 소리를 잠결에 듣고 있으면 명창 임방울의 판소리가 따로 없다.

봄이 깊어가는 소리.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하는 소리는 언뜻 들으면 보리가 초록빛 대를 밀어올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버들 강아지가 노오란 꽃술을 터뜨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래. 내가 어릴 때에는 우리 마을에 재첩국을 파는 아주머니가 나타나야 비로소 뻐꾸기가 울기 시작했다.

재첩이 제철을 맞았다.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아 숙취 제거에 좋다는 재첩은 지금부터 5~6월까지가 가장 살이 통통하게 배고 향이 뛰어나며 맛이 좋다. 5~6월을 지나면 재첩은 산란을 시작하기 때문에 잘 먹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재첩국을 파는 아주머니들도 이 때를 놓칠새라 목이 쉬도록 '재첩국 사이소~'를 외치고 있는 것이리라.

▲ 섬진강에서 재첩을 잡는 모습
ⓒ 하동군

▲ 하동 섬진강 재첩은 중국산처럼 큼직하지 않고 알갱이가 자잘하다
ⓒ 이종찬
재첩은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모래가 많은 맑은 강, 소금기가 적은 민물에서 자라는 까맣고 작은 새조개를 말한다. 하동 섬진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강조개'란 뜻의 '갱조개'라고도 불리는 재첩은 물이 조금만 오염되어도 살지 못한다. 섬진강에서 재첩이 많이 잡히는 것도 바로 강물이 수정처럼 맑기 때문이다.

명의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재첩은 눈을 맑게 하고 피로를 풀어주며, 특히 간 기능을 개선하고 향상시켜주며, 황달을 치유하고 위장을 맑게 한다"고 적혀 있다. 이어 재첩은 소변을 맑게 하여 당을 조절하는 효능이 있으며, 몸의 열을 내리고 기를 북돋아주는 효과까지 있다고 되어 있다.

어디 그뿐이랴. 재첩은 10배 정도 크기인 바지락에 견주어도 영양가가 3배가 훨씬 넘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재첩을 '조개류의 보약'이라 여기며, 몸이 찌뿌둥할 때마다 강변에 모래알처럼 널려 있는 재첩을 건져 국도 끓여 먹고 회도 무쳐 먹고 전도 부쳐 먹었다고 한다.

재첩을 조리하는 방법도 간단하다. 재첩국은 재첩을 맹물에 한나절쯤 담가 해감을 토하게 한 뒤 냄비에 찬물을 붓고 끓이다가 재첩이 입을 벌리면 찬물에 담궈 재첩 알갱이를 빼낸다. 이어 재첩을 삶은 뽀오얀 국물을 면보자기에 거른 뒤 그 국물에 재첩 알갱이를 넣고 팔팔 끓여 부추를 넣고 소금으로 간만 맞추면 끝.

▲ 재첩 알갱이를 건져 무채처럼 썬 배와 부추, 상추, 봄동, 양파, 달래를 넣고 초고추장에 비비면 맛있는 재첩회가 된다
ⓒ 이종찬

▲ 재첩국과 단짝인 부추, 걍상도에서는 정구지, 전라도에서는 솔이라고 부른다
ⓒ 이종찬
재첩회는 그릇에 배를 무채처럼 썰어넣고 부추와 상추, 봄동, 양파, 달래를 넣은 뒤 재첩 알갱이를 얹어 초고추장에 쓰윽쓱 비벼 먹으면 된다. 재첩회덮밥은 그렇게 비빈 재첩회를 고슬한 밥 위에 올리면 그만. 조금 색다른 재첩회덮밥을 즐기고 싶다면 참기름, 부추, 실파 등 갖은 양념을 넣은 양념장에 비벼먹는 것도 좋다. 재첩전은 밀가루 반죽에 부추와 재첩을 버무려 기름 두른 후라이팬에 구워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섬진강에 나가면 발에 밟히는 기 모두 재첩이었다 아입니꺼. 그때까지만 해도 재첩국을 끓일 때에는 껍데기까지 같이 끓여 먹었지예. 아마 하도 먹을 게 귀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물 한 방울이라도 아끼려고 그랬던 것 같아예. 하긴 그렇게 대충 먹어도 몸 아픈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거 보모(보면) 재첩이 몸에 좋기는 좋은 모양이라예."

하동에서 재첩국 장사를 시작한 지 40여년이 훨씬 넘는다는 '동흥식당'(경남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 주인 최숙연(54)씨. 어릴 적부터 어머니 어깨 너머로 재첩으로 만드는 여러 가지 조리를 배웠다는 최씨는 "재첩국에는 다른 양념이 하나도 필요 없고. 정구지(부추)와 소금(천일염)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하동 재첩국의 종가라 불리는 '동흥식당'에서 파는 재첩조리는 크게 네 가지다. 재첩국(5천원)과 재첩회, 재첩회덮밥, 재첩부침개가 그것. 그중 재첩 원액으로 만들었다는 푸르스름한 안개빛이 감도는 재첩진국이 특미다. 이른 새벽 섬진강에 자욱하게 낀 새벽안개를 닮은 이 집 재첩진국은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을 때마다 어젯밤 늦게까지 마신 술이 저절로 씻겨내려가는 것처럼 시원하고 맛이 깊다.

▲ 재첩국이 끓기 시작하면 부추를 흐르는 물에 깨끗히 씻어 물기를 뺀다
ⓒ 이종찬

▲ 보글보글 끓고 있는 재첩국
ⓒ 이종찬
재첩진국을 먹으며 창 밖을 바라보는 풍경도 곱다. 은빛 윤슬이 톡톡 구르는 파아란 섬진강과 그 섬진강물을 거울 삼아 얼굴을 비추는 짙푸른 소나무숲. 재첩진국에 밥 한 그릇 뚝딱 말아먹고, 사각사각 씹히는 과일과 함께 쫀득하게 씹히는 재첩회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면 신선이 따로 없다.

'음식은 손맛'이라는 주방 아주머니는 재첩국은 부추와 잔파가 궁합이 딱 맞는다며 겨울철에는 부추 대신 잔파를 잘게 썰어넣어도 맛과 향이 좋다고 한다. 중국산 재첩과 섬진강 재첩이 어떻게 다르냐고 묻자 "중국산 재첩은 섬진강 재첩보다 크고 반듯하게 생겼지만 살이 질기고 국물이 제대로 우러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마치 중국산 재첩이 섬진강 재첩국으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섬진강 재첩국 본래의 깊은 맛을 잘 모른다는 투다. 하긴, 어디 그뿐이겠는가. 80년대 중반 이곳에 광양제철소가 들어서는 바람에 섬진강의 환경까지 바뀌어 예전에 비해 재첩이 그리 많이 잡히지도 않는단다.

"요즈음 가정집에 재첩국을 배달하는 재첩국 공장도 생겼다면서요?"
"재첩국은 끓여서 곧바로 먹어야 깊은 맛이 나지예. 무슨 음식이든 공장에서 대량 생산을 하기 시작하면 그 본래의 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예. 중국산이 수입되든 공장에서 대량 생산을 하든 결국 맛으로 승부를 해야지예."

▲ 요즈음 재첩국이 맛도 좋고 향이 깊다
ⓒ 이종찬
그렇다. 문제는 우리 민족 대대로 내려온 고유한 맛을 찾는 일이다. 수입 농산물이 아무리 값 싼 가격으로 백화점과 시장바닥에 날개를 휘젓고 다녀도 맛이 없으면 누가 먹겠는가. 반만년 동안 우리 민족을 지켜온 고유의 맛, 그 맛을 지키려면 우리 스스로 우리의 땅에서 나고 자란 농산물을 먹어야 되지 않겠는가.

재첩의 맛과 향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요즈음 가까운 시장에 나가면 재첩국이 많이 나와 있다. 그중 재첩 알갱이가 자잘하고 국물이 푸르스름한 새벽 안개빛을 띤 것이 좋다. 깊어가는 봄날, 오늘 식탁 위에는 맛도 좋고 향이 좋은 재첩국을 올려보자. 한 수저 한 수저 뜰 때마다 이 세상의 시름과 숙취가 씻은 듯이 사라지리라.

섬진강 재첩국 이렇게 끓여야 제맛 난다
국물 끓을 때 잘게 썬 부추 넣고 볶은소금으로 간해야

▲ 재첩국은 부추와 소금만 있으면 그만
ⓒ이종찬

재료/재첩, 부추, 소금, 물

1. 재첩을 맹물에 3~4시간 담가 해감을 시킨 뒤 바락바락 문질러 깨끗이 씻는다.

2. 냄비에 찬물을 붓고 잘 씻은 재첩을 넣어 입이 벌어질 때까지 팔팔 끓인다. 이때 생기는 거품은 모두 걷어낸다.

3. 입이 벌어진 재첩을 건져 찬물에 헹군 뒤 알갱이를 빼내고, 재첩을 끓인 뽀오얀 국물은 면보에 거른다.

4. 흐르는 물에 부추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고 4cm 길이로 썬다.

5. 재첩국물을 냄비에 담고 재첩 알갱이를 적당량 넣어 중불에서 팔팔 끓인다.

6. 재첩국물이 바글바글 끓으면 썰어둔 부추를 넣고 볶은 소금으로 간을 한 뒤 국그릇에 담아 밥과 함께 상 위에 올리면 끝.

※맛 더하기/부추를 넣은 재첩국에 팽이버섯을 넣어 먹어도 감칠맛이 나고, 재첩 알갱이에 배와 부추, 상추, 봄동, 양파, 달래를 넣고 초고추장에 비벼먹는 재첩회도 향긋하게 씹히는 맛이 끝내준다.
/ 이종찬 기자

덧붙이는 글 | ☞가는 길/서울-대진고속도로-진주-남해고속도로-하동 나들목-하동읍-하동교육청-동흥식당(055-884-2257)    
※이 기사에 있는 재첩국 사진은 섬진강에서 직접 사 온 재첩국을 집에서 조리하는 모습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