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8일 새벽에 다시 “진해 땅 고리량(古里粱)에 일군선이 머물고 있다”는 첨부를 이순신은 보고받고 즉시 출전을 명하였다. 여러 섬들을 합동 수색하면서 저도(猪島)를 지나 고성 땅 적진포(赤珍浦 통영시 광도면 적선동)에 다다랐다.

그 곳에 일대군선과 중군선을 합하여 13척이 바다에 나란히 정박하고 있었다. 왜적들은 포구 안 여염집을 분탕하다 조선 수군의 위세를 바라보고선 겁내어 산으로 도망하였다.

낙안 군수 신호는 소속인 순천 대장 유섭과 힘을 합하여 일대군선을, 같은 소속인 통장으로 고을에 사는 급제 박영남(朴永男)과 보인 김봉수(金鳳壽) 등이 합을 합쳐 일대군선 1척을, 보성 군수 김득광이 일대군선 1척을, 방답 첨사 이순신이 일대선 1척을, 사도 첨사 김완이 일대선 1척을, 녹도 만호 정운이 일대선 1척을, 정운 소속의 통장으로 귀양살이 하던 주몽용(朱夢龍)이 일중선 1척을, 좌수영 대솔 군관 이설과 송희립 등이 힙을 합쳐 일대군선 2척을, 군관 정로위(定虜衛) 송한연(宋漢連)이 일중선 1척 등을 총통으로 쏘아 깨뜨려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이순신은 군사들에게 아침밥을 먹고 쉬게 명할 참이었다. 그때 적진포 근처의 산꼭대기에서 어떤 사람이 아기를 업고 울부짖으면서 내려오면서 좌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좌수군이 작은 배로 실어왔는데 이신동(李信同)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직접 왜적들의 소행을 물었다.

“어제 왜구들이 포구로 와서 여염집에서 빼앗은 재물을 소달구지로 싣고 가서 그들의 배에 나눠 싣고선 초저녁에 바다 가운데 띄워 놓고 소를 잡아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날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그 곡조를 숨어서 들어보니 모두 우리나라의 곡조이었고, 오늘 이른 아침에 반수는 배를 지키고 반수 가량은 육지로 내려와서 고향으로 향하였습니다. 저의 아내와 늙은 어머니는 왜적을 보고, 헤어지게 되어 간 곳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아주 민망하도록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며 호소하였다.

그 참상이 가련하고 포로가 될 것이 걱정되어 이순신은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 사람은 어머니와 아내 자식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모든 장수들이 더욱 분히 여겨 서로 마주보며 한마음이 되어 기운을 더욱 내었다. 이들은 곧 천성, 가덕, 부산 등지로 향하여 적선을 섬멸할 작전을 세웠다.

순천대장 유섭이 구출한 조선 소녀는 겨우 4, 5살로 신원을 알 길이 없었다. 보성 군수 김득광이 구출한 소녀는 나이는 좀 들었으나 머리를 깎아 왜인 같아 여러 상황을 살펴 심문해 보았다.

그녀는 임진년 5월 7일 동래 응암리에 사는 백성 윤백련(尹百連)으로서 14살이었다. 이순신은 순천 보성 관원들에게 ‘각별히 보호하라’고 명하였다.

흉악한 왜적들에게 살육되고 약탈당하여 모든 백성들이 부모나 자식을 잃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순신은 연해안을 두루 돌아보니 산골짜기마다 피난민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들은 전라 좌수군을 만나 아이나 늙은이나 짐을 지고 서로 이끌며 흐느껴 울며 부르짖으며 다시 살아날 길을 얻은 것처럼 좋아하며 어떤 이들은 왜적을 동태를 알려 주었다.

이런 사람들을 참담히 여겨 이순신은 다 함께 싣고 가고 싶었으나 가득 군선에 실으면 배의 운용도 편리하지 못하여 안타까이 여겨 타이르며 말하였다.

“돌아올 때 데리고 갈 예정이니 각각 잘 숨어서 왜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여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피난민들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 남은 양곡마저 다 떨어져 굶어 죽을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끝까지 탐방(探訪)해서 찾아 모아 들여 구호하기 바랍니다.”

이순신은 그 도의 관찰사에게 통보하였다.

하지만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지형이 좁고 얕아서 판옥선으로는 싸우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전라 좌수군만으로는 적중으로 진격하기에는 세력이 너무 약해 위태로워 경상 우수사 원균과 함께 작전 계획을 논의하였다. 별도로 기발한 작전을 마련하여 적을 섬멸키로 하였다.

그런데 전라도 도사(종5품의 관리 감찰을 맡은 관리) 최철견(崔鐵堅)의 첩보가 도착하였다. 뜻밖에 선조가 북방으로 피난을 갔다는 기별이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접한 좌수군은 통분하여 하루 종일 서로 붙들고 울부짖으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초 9일 오시(午時)에 이순신은 좌수군 장수들에게 군선을 거느리고 무사히 좌수영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좌수영의 여러 장수들에게 잘 알아듣도록 말하였다.

“군선을 더 한층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

이 첫 전투의 제1차 옥포승첩을 아뢰는 임진장초(李忠武公全書 券 2 ‘玉浦破倭兵狀’)에 남긴 기록을 살펴보자.

“대체로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모두 분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적진에 돌진하여 함께 대첩을 기약하였습니다.

지금까지의 해전에서 40여 척을 불살랐으나 왜적의 머리를 벤 건 다만 둘 뿐이므로 신이 섬멸하고 싶은 대로 다 못하여 한층 통분하옵니다. 다만 접전할 때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듯하여, 우리 배를 보고 미리 도망치지 못하게 되면 으레 기슭을 따라 고기두름 엮은 듯이 행선하다가 형세가 불리하면 육상으로 도망하였기 때문에 이번 길에 섬멸하지 못하여 간담이 찢어질 것 같아 칼을 어루만지면서 혀를 차고 탄식하였습니다.

왜선에 실렸던 그 밖의 물건은 모두 찾아내어 다섯 간 창고에 가득이 채우고도 남았으며, 그 밖의 사소한 잡물은 다 기록하지 못하고, 그 중에서 전쟁에 사용할 만한 물건은 골라서 별도로 그 종류를 모아 놓았는데 김해부의 인이관안(人吏官案 : 각 지방의 하급 사무에 대한 세습적 인원들의 명단 및 서류를 말한다)과 분군성책(分軍成冊) 및 각종 활, 화살 등은 아울러서 차례로 조목조목 기록하였습니다.

왜선에 실려 있던 물건 중에 우리나라의 쌀 300여 석은 여러 전선의 굶주린 격군(格軍 : 노를 젓는 군사를 말한다)과 사부들의 양식으로 고루 나누어 주고, 의복과 목면 등의 물건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적을 무찌른 뒤에는 이익이 따른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합니다. 아직은 그대로 두고 조정의 조치를 기다립니다.

왜적들은 붉고 검은 철갑을 입고, 여러 가지 철 투구를 쓰고 있었으며, 입 언저리에는 ‘말갈기’가 종횡으로 뻗쳐있어서 마치 ‘탈바가지’ 같았으며, 금관과 금빛 나는 깃과 꽂이 새의 것으로 엮어 만든 옷, 우췌(날짐승의 깃으로 만든 비), 나각(소라) 같은 것들은 기이한 모양으로 매우 사치하고 호사하여, 귀신같기도 하여 보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성을 깨뜨리는 여러 기구의 대철정(大鐵釘), 사주(沙注) 같은 물건도 매우 괴상하였으므로 군용 물품 중에 가장 긴요한 것 한 가지씩 뽑아서 봉하여 올립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적을 막는 방책은 수군이 작전을 하지 않고 오직 육전에서 성을 지키는 방비에만 전력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수백 년 기업이 하루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목이 매여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적이 만약 뱃길로 본도를 침범해 온다면 신이 해전에서 결사적으로 담당하겠으나, 육지로 침범해 오면 본도의 군사들은 전마(戰馬)가 한필도 없어서 대응할 도리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순천 돌산도(突山島) 백야곶(白也串 : 지금의 승주군 화양면 백야리)과 흥양 도양장(道陽場)에서 기르는 말 중에서 전쟁에 쓸만한 말들이 많이 있으므로 넉넉하게 몰라내어 장수와 군사들에 나누어 주어서 살찌게 먹이고, 달리기를 훈련시켜서 전쟁에 사용한다면 승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5월 4일부터 9일까지 6일간의 1차 출동에서 세 차례의 전투를 치러 왜선 42척을 격파하고 불태우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피해는 부상당한 한 명이었다. 옥포 합포 적진포 등의 해전을 총칭하여 ‘옥포해전’이라고 부른다.

그때 서울을 떠난 선조는 옥포승첩일인 5월 7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그 다음 날인 6월 11일까지 평양에 머물렀다. 선조가 이순신의 승첩 보고서를 받은 것은 평양에서였다.

개전 이후 육전의 패전 보고만 받다가 처음으로 승전보고를 받은 선조는 5월 23일 이순신에게 가선대부(종2품)에 임명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는 일본군이 쉽게 서진(西進)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나아가 남해안 일대에 조선 수군의 용기를 북돋아 준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의 통신 및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제해권 획득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육상의 모든 육군과 수군의 사기를 충천시켰다.

덧붙이는 글 | 다음은 당포해전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