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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8월14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적발해 57명 중 41명을 구속, 16명을 수배중이라고 발표했다. 사진은 사건 연루자들이 법정에서 형 선고를 기다리는 모습.
1964년 8월14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적발해 57명 중 41명을 구속, 16명을 수배중이라고 발표했다. 사진은 사건 연루자들이 법정에서 형 선고를 기다리는 모습.
그랬다. 박정희는 결국 '천벌'을 받았다. 하지만 어떤가. 아직도 민주공화국 곳곳에 시퍼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인민혁명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음은 더는 '비밀'이 아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이미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고문조작으로 사건의 성격을 규정했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여정남 이수병.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바로 다음날 살해당했다.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일찌감치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사형 당한 당사자는 물론, 유족이 겪은 고통도 심각했다. 동네 아이들이 어린 아들을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니면서 "너희 아빠는 간첩이다"라며 때렸다. 그 뿐인가. 나무에 묶어놓고 총살시키는 '놀이'를 벌였다. 초등학생 딸이 소풍 갔을 때는, 아이들이 몰려와 도시락에 개미를 넣었다. "간첩의 딸"이라며 돌을 던졌다. 어린 딸은 나무 뒤에 울면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랬다. 그것이 박정희 시대였다. 영남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사형 당한 사람 대다수가 대구와 영남지역에서 활동하던 민주인사들이었다.

박정희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주인사들에게 사법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장기집권 전략'에 있었다. 지역감정을 부추겨 영남을 영구집권의 토대로 삼는 데 '눈엣가시'가 대구지역의 민주인사들이었다.

그러나 어떤가. 참으로 생게망게한 일 아닌가. 바로 그 대구와 경북지역이 지금 이 순간도 박정희 향수의 진원지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불러대는 '박정희 찬가'는 지금도 울려 퍼진다. 30년이 다가오도록 인혁당 원혼들의 재심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못한 결정적 이유다.

그래서다. 명토박아 말한다. 사법살인의 진실 규명에 가장 적극 나서야 할 사람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다. 아버지의 죄를 딸에게 묻는 게 결코 아니다. 정치인 박근혜가 제1야당, 그것도 대구를 본거지로 한 정당의 대표인 까닭이다. 더구나 그는 아직도 과거청산의 시대정신을 모르쇠하고 있지 않은가. 고 우홍선의 부인이 산소에서 절규할 때 박근혜는 어디에 있었는가.

사법살인 명예회복에 박근혜 대표가 나서라

희망은 있다. 박정희가 죽인 민주주의의 '양심'이 대구에서 힘차게 부활하고 있다. 대구경북 25개 시민사회단체들은 4월 6일부터 나흘동안 대구 곳곳에서 30주기 추모제를 연다. 경북대 총학생회 주최로 8일에는 전야제가 열린다. 전야제에 앞서, 대구백화점 앞에서 경북대까지 벌일 '3보1배'는 뜻깊다.

참회의 절, 어찌 젊은 지성인만의 몫이겠는가. 인혁당 고문조작사건으로 살해당한 민주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사법살인, 그것은 우리 모두의 양심을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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