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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이 완연하여 놀러 가기에도 책을 읽기에도 더없이 좋은 계절 4월이다. <옥중서한>은 금요일 출근길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버스 안에서 첫 장을 펼쳤다가 나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졌고,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에다 힘을 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10분가량 거닐며 가는 동안에도 방금 읽은 책의 내용 때문에 주위 풍경을 돌아 볼 겨를도 없이 일터에 도착하고 말았다.

<옥중서한>은 서준식이 그의 형 서승과 함께 1971년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7년 간 감옥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엮은 책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치열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이 책은 분단된 우리나라의 아픈 실상과 인권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나에게 독서는 도락이 아니다. 사명이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저 이율배반적 욕망의 원인인지도 모른다. 즉, 한편으로는 깊이깊이 파고들고 싶은 욕심,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널리널리 알아야 한다는 당위 사이의 이율배반 말이다. 요 며칠 동안 다시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 하고 번민하다가, 결국 길게 한숨을 쉬면서 다시 결론을 내렸다.

"깊이깊이 파고들어 널리널리 알아야지." 평생의 독서계획은 나에게 '난센스'이다. 나의 독서는 사명의 요구에 따라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가운데, 그의 독서에 대한 생각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독서일 뿐이었을 테지만, 전향 거부의 이유로 그마저도 일정 기간 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한다.

저자는 사촌 동생들에게 착한 마음으로 좋은 책을 많이 읽기를 당부하며,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이나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같은 책을 권한다. 이처럼 책을 통해 또 다른 책을 만나는 기쁨은 크다.

귀동냥만 하고 잊어버려서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것은 마치 과외를 하나 시작하게 되면, 원하지 않아도 과외 하는 학생의 어머니가 주위 사람들에게 권하여 과외를 여러 개 맡게 되는 경우와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서울 구치소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는 혼자서 면회를 다니셨다. 다른 사람은 거의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는 메모를 못하는 어머니께 보고 싶은 책을 부탁할 수 없어 짜증을 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다음날 접견실에서 돋보기를 쓰신 다음 수첩을 펴고 어색하게 볼펜을 쥐시면서 어디 한 번 보고 싶은 책을 불러 보라 하셨다. 나는 뭉클해지는 가슴을 누르고 여러 번 천천히 책명을 불렀고, 어머니께서는 생각 생각하며 그것을 적으려 하셨지만 결국 끝까지 못 적으신 채 면회 시간이 끝나 버렸다.

나는 죽고 싶은 마음으로 감방에 돌아와 시멘트벽에다가 여러 번 대가리를 들이 받았다. 얼마나 안타까우셨겠는가! 배우지 못한 것이 얼마나 서러우셨겠는가!


어머니에 대한 저자의 극진한 마음이 이 글에도 소상히 나타나 있다. 이 글을 읽으며 저자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또한 코끝이 시큰해졌다.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아버지마저도 그렇게 보냈다. 부모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차가운 감옥에서 살다가 1988년 저자는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저자는 2002년 붉은 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쳤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책의 서두에 기술해두고 있다. 저자처럼 나도 그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세상에 읽혀야 할 많은 책들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양심과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며, 인생에서 독서가 어떤 의미인지 되새겨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기처럼 너무나 편안하게만 여겨지는 가족과 친지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며, 조국과 민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되새겨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 저자교열판

서준식 지음,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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