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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망우리에 있는 '13도창의군탑'
서울 망우리에 있는 '13도창의군탑' ⓒ 박도
무신(1908년) 1월 27일, 군사장 왕산 허위와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의병장이 진두지휘하는 13도 창의군 선봉대는 군사 300여 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으로 진군할 차비를 차렸다.

선봉대가 동대문밖 30리 지점에 이르러, 일군이 나타나면 일격을 가할 계획으로 기다렸다. 애초에는 민긍호의 관동 의병 2000명, 허위의 진동의병 2000명, 이강년의 호서의병 1000명, 신돌석의 교남의병 800명 등 후원부대가 오기로 하였는데 웬일인지 시한을 어겼다.

그런 중, 일군이 갑자기 총공세를 펴왔다. 한참동안 맹렬하게 전투를 하였으나 일군의 최신 무기를 의병들의 구식무기로는 당해 낼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규식과 연기우는 탄환을 맞고 적에게 붙잡혀 버렸다. 게다가 총대장 이인영은 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귀향하였기에 왕산이 총대장의 중책을 맡았다. 연천으로 퇴각한 뒤 군율을 정하고 군표를 발행해서 물자를 조달하며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냈다.

왕산이 후일을 기약하며 연천에 머물고 있을 때,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곧 경남관찰사로 임명하겠다고 꼬드기다가 왕산이 일언지하 거절하자, 또 사람을 보내어 내부대신으로 임명하겠다고 꼬드겼으나 왕산이 크게 꾸짖어 쫓아버렸다.

부하가 그를 붙잡고는 죽여 버리자고 하자 왕산은 “이 사람을 보낸 자는 죽여도 마땅하지마는 온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나?”하고 말리면서 놓아 보냈다. 대신 신기선이 왕산에게 투항을 권유해도 지난날 자신을 발탁시켜준 정분도 끊으면서 “죽을 때까지 국권 회복을 위해 무력 투쟁을 하겠노라”고 단호히 거부하였다.

왕산이 퇴각한 연천 임진강변
왕산이 퇴각한 연천 임진강변 ⓒ 박도
왕산이 후일 서울에 다시 진공하고자 경기 적성의 감악산에 의병 훈련장을 만들어 병사들을 훈련시키는가 하면, 병기를 제조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어려운 점은 근대적인 무기의 부족으로 일본군에 견주어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하다는 것이었다.

왕산은 화약을 구하기 위하여 김창식, 한원태, 이기상, 이계복 등을 서울로 파견하기도 하였고, 부하 경현수에게 밀서를 주어 청국 혁명당에게 보내어 무기 원조를 요청키도 하는 등 신식 소총과 탄약구입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의병장 김규식이 무기 구입을 위하여 인천에 잠입했다가 일본군에게 탄로되어 체포된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그해 4월 21일, 왕산은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전국 13도 의병의 재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하였으며 5월에는 박노천, 이기학 등을 서울에 보내어 태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반환, 통감부의 폐지 등 30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은 6월 11일 양평에서 은신 중이던 왕산이 일본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됨으로써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그날 왕산은 일본 헌병 40명이 왕산을 포위해서 압송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왕산 허위 선생에게 내린 건국공로훈장(대한민국장)
왕산 허위 선생에게 내린 건국공로훈장(대한민국장) ⓒ 허도성
일본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 소장이 경무총감을 겸무하면서 직접 심문하다가 왕산의 경력 및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동양 평화에 대한 경륜과 경제, 역학에 대한 조예가 백성들의 스승임을 듣고 마음에 저절로 공경하고 감복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고 실상은 한국을 없애버릴 계획을 품었기에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멈추려 하듯,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라고 왕산이 말했다.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은 병자를 안마하는 것과 같다. 지체를 쓰다듬을 때에 한 차례 고통은 있어도, 마침내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다.”

아카시의 말이 끝나자 왕산이 상 위에 있던 겉은 붉고 속은 푸른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언뜻 보면 붉은 빛인데 안팎이 아울러 푸른빛인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아카시는 비록 자기들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문답을 할수록 왕산의 인품과 충성심에 감복하여 왕산을 국사(國士,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로 대우하였다. 이토히로부미 통감에게 왕산의 목숨만은 살려주기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일본 수사관이 앞장 선 자가 누구이며 대장이 누구인가 물었다.

“앞장 선 자는 이토히로부미고 대장은 나다.”
이에 일본 수사관이 얼떨떨해 하면서 이토 총감을 지목한 까닭을 물었다.
“이토히로부미가 우리나라를 뒤엎지 않았더라면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즉 앞장 선자가 이토히로부미 아니고 누구인가?”

동양 평화론

일본 재판장이 재판정에서 물었다.
“아카시 사령관 조서에는 소위 그대의 동양 평화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대의 지론이 틀림없는가?”

“그렇다. 일본이 조선을 삼킨다면 중국은 일본에 악의를 품게 될 것이다.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가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면 극동의 평화가 어떻게 유지될 수가 있을 것인가? 일본이 조선을 진지하게 보호하고 성실하게 중국을 지원한다면 일본은 극동의 지도자로서 극동 내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재건을 바라는 것은 세계정세에 기초해서이며 단지 일본이나 조선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극동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이다.”

외무대신 이하영이 왕산을 살리고자 이토히로부미 통감에게 여러 번 부탁하였으나 “내가 결정하기는 어렵고 그 권한은 일본 정부에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왕산이 옥중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유서
왕산이 옥중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유서 ⓒ 허도성
이해 10월 21일 오전 10시, 왕산은 서대문 감옥 교수대에 올랐다. 서대문 감옥이 지어진 지 최초의 사형 집행이었다. 왕산의 얼굴빛은 변함이 없고 말씀도 예사로웠다.

왕산은 두 아들에게 다음의 유서를 남겼다.
“나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나. 내 지금 죽음의 자리를 얻었으니 너희 형제는 와서 보도록 하라.”

교수형 밧줄이 왕산의 목 맬 무렵에 일본 중이 주문을 외우면 명복을 빌었다. 이에 왕산이 꾸짖으며 “충의의 귀신은 저절로 하늘나라에 오른다. 설령 지옥에 떨어진들 어찌 너희들의 천도를 바랄쏘냐?”

어서 빨리 형을 집행하라

형장 입회 검사가 유언을 물었다.
“큰 의리를 펴지 못하였는데 유언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죽은 뒤 시신 거둠을 어찌 괘념할 것인가. 이 감옥 안에서 썩어도 좋다. 어서 빨리 형을 집행하라.”

왕산은 담담히 최후를 맞았다. 얼굴빛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숨을 거뒀다. 옥졸 두 사람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버리고 모자를 찢으며 울부짖으면서 “충의 대인이 억울하게 이런 변을 당했으니 우리도 맹세코 구차하게 삶을 도모치 않겠다”고 하였다. 옥에 갇혀있던 수백 명도 다 통곡하여서 그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제자 박상진(朴尙鎭)이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골짜기 헛집에 모셨다가 후일 고향 선산 구미 선영아래 모셨다. 왕산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혼은 죽지 않고 마치 민들레의 꽃씨처럼 바람에 흩날려서 삼천리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만주, 시베리아, 하와이 등 세계로 흩날려서 조국 해방의 불씨가 되었다.

후일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왕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굴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쓰면서 한국학문헌연구소편 <왕산전집>과 선주문화연구총서3 <왕산허위의 사상과 구국의병항쟁>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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