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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돈
오랜 기다림이었다. 이틀 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얼핏 장안루에서 본 적은 있었다. 독혈군자 당일기와의 손속을 나누는 모습도 보았다. 장군의 아들이라면 그런 용기와 자신감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그는 내심 흐뭇했다. 아마 그 당시 당일기가 저 아이를 어찌 하였다면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당일기 뿐 아니라 사천 당가를 쓸어버렸을 터였다.

아무도 그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그를 건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자신의 형제들도 자신으로 인하여 그를 건들지 않고 있었다. 이제 결정을 내야했다. 저 아이를 설득하던지 아니면 죽이던지 해야 했다. 무엇보다 남의 손에 저 아이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그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보다 하루가 늦었구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벅지 위에 검을 놓아두고 있는 사내의 말은 마치 친한 친구나 동생에게 하는 말투 같았다. 갑작스럽게 가는 길의 중앙에 버티고 앉아 말을 거는 사내에 대해 담천의는 의아스러웠고 호기심이 치솟아 올랐다. 본 적이 있는 사내였다. 완강한 턱선하며 떡 벌어진 어깨, 균형 잡힌 몸매는 사내가 봐도 반할 정도로 사내의 강인함을 풍기는 자였다.

“기다리고 있었소?”

그의 말투 역시 친한 친구나 동료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강명(姜明)이라 했던가? 장안루 안에서의 그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강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한번 본 사람은 절대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서늘한 느낌과 함께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 준 사내였다.

“부상을 당했느냐?”

여기저기 묻어 있는 선혈과 옷가지가 잘린 흔적을 보고 물었던 것 일게다.

“별 것 아니오. 사람이 살다보면 다툴 수도 있는 거 아니오?”

기이했다. 지금 이 사내의 눈길은 그윽하고 부드러웠다. 무엇인가? 이 사내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자신을 기다렸으며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내라면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부탁을 할 만큼 우리가 그리 가깝소?”

“물론.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가깝지. 너를 피하고 싶을 만큼 가깝다.”

이 사내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두 사람간 말을 나누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통성명한 것도 아니었다. 사내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네 거처는 마련해 놓았다. 평생 네가 편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검을 접고 무림을 떠나다오.”

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비친 모습은 진실이었다. 이런 사내는 자신이 죽는다 해도 부탁이란 것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내는 아무리 다급하고 간절한 일이 있다하더라도 사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담천의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구름처럼 일어나는 의혹에 사로 잡혔다.

“당신은 누구요?”

아마 장군은 이 아이에게 자신에 대해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 주었을까?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는 자신 혼자만이 가지고 있으면 족했다. 모르는 채 떠나 주었으면 싶었다.

“어차피 네 꿈을 펼치기 어려운 중원이다. 그들은 또 다시 너를 이용하고 버릴 것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다시 이용하고 버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누가 이용을 했고 누가 이용을 당했을까? 그리고 자신은 누구에게 이용당한다는 것일까? 의문투성이였다. 그는 재차 물었다.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소.”

“네 동생 소혜(小慧)는 소주(蘇州) 담가장(曇家莊)에 있더구나. 그 아이는 너무 아름답고 당차더구나.”

갑작스럽게 가슴이 쿵하니 내리 앉았다. 지금까지 버려두었던 자신의 여동생. 그 아이가 폐허로 변해 버린 소주의 담가장에 있다니… 소혜는 자신과 더불어 사부가 거두어 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잘 자라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동생의 소식이 저 인물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정말 의외였다. 자신을 잘 아는, 그리고 동생의 존재까지 아는 저 인물은 누구인가?

“다시 한번 묻겠소. 당신은 누구요?”

“내 이름은 강명이다.”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었다. 강명 또한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안다. 하지만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네 형이라고…? 네 부친과 네 형이 되기로 약속했던 사람이라고…? 아니었다. 특별히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간에 그것은 또 하나의 짐을 지우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관계… 글쎄…? 관계라고 말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너는 아직 내 부탁에 승낙하지 않았다.”

“내가 무림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정당하다면 고려해 보겠소.”

알고 싶었다. 이 강명이란 사내가 자신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왜 이 사내가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지… 어쩌면 자신의 사부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를 이 사내를 통해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너는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나는 네 죽음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사내는 말을 해 놓고 금방 후회를 했다. 분명하고도 솔직하게 이유를 말했지만 담천의 같은 자는 죽음이 두려워 무림을 떠날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말해 본 들 그가 떠나랴! 그의 바람은 한가지였지만 어차피 결론은 그가 생각했던 그대로일 것이다.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소. 할 일이 끝난 다음에는 떠나지 말라 해도 나는 떠날 것이오. 당신이 나와 어떤 관계라도 상관없소. 삶은 자신의 것이오. 내 삶을 다른 사람이 살아 줄 수 없듯이 내 죽음 또한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소.”

대답은 명확했다. 차라리 대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그는 훌륭하게 자랐고 사내다운 사고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호부(虎父) 아래 견자(犬子) 없다고 했다. 이 아이는 부모가 없이 자랐어도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사내다움을 가질 정도로 훌륭히 성장했다. 강명은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익혔다고 했나? 뽑아라.”

무인(武人)의 대답은 오직 검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 역시 검이었다.

“나는 귀하와 다툴 이유가 없소.”

이 자는 분명 자신과 관계가 있었다. 단지 자신 만이 모를 뿐이었다. 사정을 모르면서 검을 맞댈 수는 없었다.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다른 작자들이 너를 죽이게 만들지 않겠다. 차라리 내 손으로 네 목숨을 거두는 게 나을 것이다.”

앉아 있을 때는 모르겠더니 그가 일어서자 마치 산악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육중함이 느껴졌다. 더구나 전신을 파고드는 예기(銳氣)는 피부를 갈라놓을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검을 뽑지 않아도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만으로도 능히 상대를 살상(殺傷)할 수 있게 되는 의기상인(意氣傷人)의 경지다. 담천의의 몸이 스스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 예기 앞에 그냥 선다면 피부는 갈갈이 찢겨져 나갈 터였다.

담천의는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이유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묻는다 해도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역시 검을 잡은 무인이었다. 모든 의문은 승부 후에 따져도 될 것이었다. 그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검 집을 오른손으로 쥐고 있었다. 검 집을 버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저런 경우는 오직 한가지였다. 좌수검(左手劍)이었다.

“십초(十招)를 받아낼 수 있다면 너는 살 수 있다. 하지만 십초 안에 너는 죽는다.”

중원에서 누가 담천의를 두고 십초 운운 할 수 있을까? 그가 모습을 보인 것은 극히 일천했지만 그와 상대한 자들은 모두 손가락에 꼽을 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저 사내가 모르지는 않을 터. 담천의는 사내가 보이고 있는 기세가 결코 광무선사의 그것에 뒤떨어지지 않음을 느꼈다.

“나는 죽지 않소. 당신에게 죽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 누구에게도 죽지 않을 것이오. 나에게는 할 일이 있소.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해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오. 사내는 사내가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는 법이오.”

그 말에 강명은 검을 뽑았다. 장군은 자신에게도 그 말을 해 준적이 있었다. 사내는 사내가 할일을 피하지 않는 법이다.

“들어 본 적이 있는 말이군. 하지만 능력이 없다면 사내가 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강명은 곧바로 검을 휘둘러 왔다. 마치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주위의 공기가 산산이 부셔져 나가고 있었다.

“육합난비(六合亂飛)…!”

강명이 펼친 초식을 본 담천의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터지고 동공이 확대되었다. 분명 좌수검으로 펼쳐지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육합난비였다. 자신의 부친에게 배운 첫 초식이 저것이었고, 부친은 그 뒷 초식을 가르쳐 주기 전에 참변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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