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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헐어져 없는 상안초등학교 옛 터.
건물이 헐어져 없는 상안초등학교 옛 터. ⓒ 성락

파헤쳐진 교정.
파헤쳐진 교정. ⓒ 성락

그런데 선생님, 저는 그만 눈물을 쏟을 뻔했습니다. 선생님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 있는 '멸공소년 이승복상'과 '효동 정재수상'이 예전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방과 후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학교 창고에서 몇 달간을 시멘트 가루와 씨름하시던 존경스런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힘든 일을 왜 혼자 하시느냐고 용기를 내어 여쭙는 제게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학교에 있을 때에도 동상을 만들었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머물렀던 곳에서 기억될 수 있는 자취를 남기는 것이 중요해. 먼 훗날에도 이 동상을 보면 선생님을 기억할 수 있지 않겠니?"

어느 날부터인지 저는 방과 후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선생님의 작업을 도왔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지, 아니면 저 스스로 한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5학년 어린 제가 뭘 얼마나 도왔겠습니까? 그러나 어린 제 눈에도 엄청난 '공사'였던 동상 만드는 작업에 진지하게 임하시는 선생님과 함께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제가 큰 일을 하는 듯 뿌듯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시멘트와 잔모래를 섞는데 필요한 물을 길어다 붓고, 또 작업도구를 집어드리는 조수역할이 제게는 모두 생소한 경험이고 즐거움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효동 정재수' 상
선생님의 작품 '효동 정재수' 상 ⓒ 성락

'이승복 어린이'상
'이승복 어린이'상 ⓒ 성락
하루는 사모님께서 그런 제가 기특하다 시며 라면을 끓여 내 오셨습니다. 노란색 양은냄비 속에 담긴 노릇노릇 잘 익은 라면을 저는 아까워서 조금씩 오래도록 먹었습니다. 그 시절에 라면은 매우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저는 생전 처음 맛 본 라면입니다. 지금도 가끔, 제 딴에는 맛나게 열무김치를 넣고 끓여 보지만 그때의 라면 맛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동상 하나를 완성하신 어느 날, 선생님은 동네 청년 여럿에게 도움을 요청하셨지요. 드디어 시멘트로 만들어진 육중한 동상을 창고에서 교정으로 옮기게 됐던 것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이승복 어린이 동상을 제자리에 놓는 작업을 하시던 선생님은 동상의 앞으로 뻗은 손끝에 눈언저리를 부딪치셨습니다. 흐르는 피를 손수건으로 훔치시면서 걱정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제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오랜기간 관리되지 않아 칠이 벗겨지고 일부 훼손된 동상.
오랜기간 관리되지 않아 칠이 벗겨지고 일부 훼손된 동상. ⓒ 성락
선생님은 제게 큰사랑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사랑으로 매사에 용기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산 속이나 다름없는 외딴 곳에서 숫기 없이 자란 저의 부족함을 발견하시고, 스스로 고쳐 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신 것입니다.

그 시절, 아이들은 누구나 교무실 앞에 매달린 종을 직접 쳐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은 '땡, 땡, 땡, 땡' 네 번이고, 끝을 알리는 종은 '땡, 땡, 땡' 세 번이었지요. 선생님은 저에게 그 기회를 가끔 주셨습니다. 당당함과 용기를 길러 주시려는 깊은 배려이셨다고 저는 이제야 느끼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시고 몇 달이 지난 5월 어느 날, 선생님은 직접 쓰신 웅변원고를 저를 비롯한 몇 아이에게 주시면서 학교 옆 벚나무 숲 속에서 소리 내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생전 처음 대하는 웅변이라는 것을 선생님의 지도로 열심히 연습한 저는 6월 열린 교내 웅변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했습니다.

'지난 휴일, 저는 산 너머 영동고속도로 닦는 곳에 가 보았습니다. 육중한 불도저와 중장비들이 큰 산을 깎아내느라 요란했습니다…'

그때 외웠던 웅변원고의 맨 앞 구절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웅변실력을 발휘해 많은 대회에서 입상했습니다. 남들 앞에서 말 한마디 똑떨어지게 할 줄 몰랐던 촌아이를 수백 명 청중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연설할 수 있는 배짱 있는 아이로 키워 주신 것입니다.

제가 원주 큰댁에서 대학에 다니던 1983년, 우연히 집 앞을 지나시던 선생님을 뵙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원주 근교 초등학교에 계시면서 모 대학 행정학과 야간부 학생으로 편입한 늦깎이 대학생이셨습니다. 자택이 멀지 않은 곳인 줄 알면서도 한 번 찾아뵙지 못하고 직장취업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버린 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발길이 끊어진 운동장과 녹슨 놀이기구들.
아이들의 발길이 끊어진 운동장과 녹슨 놀이기구들. ⓒ 성락
선생님의 손때와 정신이 배어 있는 동상 앞에 저는 한참 머물렀습니다. 지나간 일들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크고 작은 선생님과의 추억들이 참 많았습니다. 졸업식 날, 교문 앞까지 따라 나오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감추려 황급히 돌아섰던 아쉬운 순간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 자리에 서 보았습니다. 교문에 새겨져 있던 '상안초등학교' 대신 한쪽 옆에 안내문을 적은 표지판이 덩그러니 꽂혀 있습니다. 그 문구들 속에서 시끌시끌하던 옛 학교의 모습과 선생님을 조금이나마 추억할 수 있겠기에 몇 번이고 읽어보았습니다.

<안내문> 횡성군 안흥면 상안리 517-2번지에 자리잡은 이곳은 삼백예순날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로 메아리치던 옛 상안국민학교가 자리했던 곳으로, 이 나라의 내일을 짊어질 미래의 동량들이 오순도순 고운 꿈을 엮어가던 배움의 요람이었습니다. 곧고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 사회 각계각층에서 당당히 제몫을 다하고 있는 졸업생들의 큰 뜻이 살아 숨쉬는, 이 고장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었기에 우리 모두는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1962년 4월 1일 개교하여 28회에 걸쳐 64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농촌인구의 감소에 따라 1995년 3월 1일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 향토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우리 모두의 꿈 밭이었기에 아끼고 보존하는 일에 모두가 앞장서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1995. 5. 31. 횡성군 교육장.

존경하는 선생님, 저도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넘었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이자 평범한 남편입니다. 제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그 옛날 저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자라서 또 지금의 저만한 나이가 됐을 때, 제가 선생님을 생각하듯 그 아이들도 그럴 수 있을까요?

밤이 깊어졌습니다. 못 다한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그 때는 이왕이면 선생님과 마주앉아 쓴 소주라도 한잔 올리면서 오래 전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밤에는 선생님과 스물일곱 땟국 흐르던 아이들을 꿈속에서나마 보고 싶습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십시오.

깊어 가는 초봄 밤에 불초 제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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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며 각종 단체에서 닥치는대로 일하는 지역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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