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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을사늑약이 맺어졌던 중명전. 서양식 2층 건물에 아치창이 이채롭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을사늑약이 맺어졌던 중명전. 서양식 2층 건물에 아치창이 이채롭다. ⓒ 이덕림
건물은 썰렁한 느낌이었다. 2층 구조에 아치창이 이채로웠으나 어딘가 우중충하다는 인상으로 다가왔다. 회색 외벽이 주는 칙칙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관리가 썩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앞마당을 유료주차장으로 쓰고 있어서 분위기마저 어수선했다. 문화재(중명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3호이다)로서의 대접이 소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을사늑약 5년 전인 1900년, 러시아 건축기사에 의해 설계되어 ‘수옥헌(漱玉軒)’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건축된 중명전. 중명전은 영욕(榮辱)이 점철된 건물이다. 경운궁(덕수궁)의 별채로 지어져 한때는 고종황제가 기거하기도 했고 외교사절 접견 및 연회장으로 사용된 화려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1906년 황태자(뒤의 순종) 결혼식 땐 외국 사신을 초청해 호사스런 피로연이 베풀어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뒤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하고 길을 내면서 궁궐 밖으로 내몰리게 되고 이때부터 수난의 길에 들어섰다. ‘궁궐 안에 지은 서양식 건축물 1호’라는 기록마저 잃어버린 채 1925년엔 불의의 화재에 휩싸였다. 벽체만 남기고 소실됐다가 복원되었지만 지금의 건물형체는 본래의 모습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해 아쉽다.

중명전은 광복 이후 60년대까지는 ‘서울구락부’란 이름의 외국인 사교장이었다가 한동안 개인 회사에 팔려 사무실로 사용되는 등 기구한 운명이 계속됐다. 현재 소유는 문화관광부가, 관리는 서울시 문화재위원회가 맡고 있는 좀 어정쩡한 상태. 양옆의 미대사관저(하비브 하우스)와 예원학교 사이에 끼어 가뜩이나 그늘에 가린 처지에 마당마저 주차장으로 내준 지금의 형편은 보기에 딱하다.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자 미대사관저 인근을 경비하고 있던 전경들이 다가왔다. 그들에게 중명전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여기가 그런 역사를 지니고 있는 장소인줄 몰랐다”는 표정이다.

앞마당을 주차장으로 쓰고있는 중명전. 정문 왼쪽에 '서울시문화재 제53호 중명전'이란 문패와 함께 오른쪽에는 '여기는 정동극장 주차장입니다'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앞마당을 주차장으로 쓰고있는 중명전. 정문 왼쪽에 '서울시문화재 제53호 중명전'이란 문패와 함께 오른쪽에는 '여기는 정동극장 주차장입니다'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 이덕림
‘서울시유형문화재 제53호 중명전’이라는 문패보다 ‘여기는 정동극장 주차장입니다’란 입간판이 더 크게 보이는 대문 안쪽으로는 ‘주차요금 30분 2000원’이라고 써붙인 안내판이 보이고 관리인은 친절히 월정 주차요금은 14만5천원이라고 알려준다.

젊은 전경의 뜨악해 하는 반응과 어딘가 생뚱맞은 주차요금 안내판이 오늘의 중명전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 한다“

어디선가 준엄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정넷포터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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