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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이민족들이 흩어져 거친 삶을 이어가는 곳이자 어느 순간 용맹한 전사가 되어 중원대륙을 위협하곤 하는 땅에서 패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은 절대 무시하지 못할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독문무공인 조양검법(朝陽劍法)과 조양장(朝陽掌)은 실전적이고 패도적이어서 가공할 위력을 보였다. 심지어는 기괴하고 독랄하다고까지 평하는 무림인들도 많았다.

“당신은 내가 누구던 상관할 필요가 없어요.”

“호...오... 소궁주께서 화가 단단히 났군요. 그럴만도 하겠지요. 하지만 여기는 소궁주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는 요녕땅이 아님을 알아두시는 것이 좋아요. 소궁주가 낭패를 당한 것은 소궁주 스스로 자초한 일이에요.”

조양궁을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진진은 조양궁주 내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전해지는 조양궁의 보배다. 다시 진진이 발끈해 무어라 할 때 담천의 그 말을 잘랐다.

“두 사람 역시 말할 것이 있으면 후에 하도록 하시오.”

그의 말에는 은연중 사람을 위축시키는 묘한 기운이 있어서 그와 싸우려고 작정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의 말에 반박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했다. 그는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 황의의 사내를 바라 보았다.

“귀하는 꽤 오랫동안 수고를 했는데 이 지경이 되었구려. 장안에서부터 말(馬)도 없이 내 뒤를 쫒아 오느라 어려웠을거요. 나 역시 귀하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 가끔 말의 속도를 늦추기는 했지만 그래도 힘이 들었을 거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황의대한의 얼굴이 너무나 평범해서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을지 몰랐다.

“귀하는 내가 뒤쫒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냥 두었단 말이오?”

“나 역시 귀하에 대해 궁금했기 때문이오. 또한 나 같은 사람을 그리 수고해 가며 따라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오.”

황의대한은 제압되어 붙잡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 실망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당황함이나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위축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스스로에 대해 너무 낮게 평가하고 계시는구려. 공자는 내가 한 수고 따위는 수고라 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분이오. 이런 외진 곳에서 다섯 미녀가 공자를 기다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납득하실 것이오.”

황의대한의 말투는 달라져 있었고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가 속해 있는 조직은 물론 모든 무림방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스스로는 진정 모르는 것일까? 그로 인해 쏟는 많은 인력과 노력을 그는 짐작도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의외로구려. 그럼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말이 잘 통할 것 같구려.”

담천의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황의대한은 씁쓸한 고소를 띠웠다. 그 말은 이제부터 자신에 대해 알아 보자는 것이었고, 그의 뒤를 따른 연유를 밝히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은 두칠(斗七)이오. 하지만 그 이외의 일에 대해 물으신다면 공자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할 거요.”

그는 완강히 부인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다는 사실만큼는 확고했다. 아마 저런 사람은 스스로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대답하지 않을 터였다.

“노부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스로 말하게 만드는 오음쇄맥수(五陰鎖脈手)란 안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노부 손을 빌려 줄 수 있네.”

흥미롭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노인이 말했다. 오음쇄맥수란 다섯군데의 음맥을 막아 혈행을 역혈시켜 개미가 혈관을 물어 뜯는 고통과 함께 온몸의 근육이 비틀려 종래에는 죽게 만드는 사공(邪功)이자 지독한 고문수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려운 것까지 필요하지는 않소. 가장 쉬운 방법은 손목 하나를 짜르고, 그래도 대답하지 않으면 다시 발목을, 그러면서 점차 팔과 다리를 모두 짤라나가는 것이오. 반드시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또한 이 사람이 대답해 주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대답해 줄 것이기 때문이오.”

그 말에 지금까지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던 두칠이 탄식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태도가 노인이나 담천의의 고문에 대한 두려움이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의자에 축 늘어져 있던 자신의 몸을 추슬러 자세를 가다듬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과 죽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소. 나는 죽는다 해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그의 말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혈도가 제압되어 들어 온 그가 자신 스스로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로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노인에게 제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네놈은 누구냐?”

노인은 더욱 놀랐다. 자신이 분명 점혈했음에도 이 자는 제압되지 않은 것이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이 자가 자신의 독문수법을 자연스럽게 피하고 제압된 척한 것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나이가 들었다 하나 자신의 한 수를 피할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조금 전 말했듯이 내 이름은 두칠이오.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장안에서부터 담공자를 뒤쫒아 온 것은 사실이오. 그리고 앞으로도 담공자의 뒤를 따라야 하는 게 내 일이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인물. 흔히 장터에서 마주치는 장사치 같기도 하고, 어느 골목 어디에선가 부닥친 적이 있을 것 같은 두칠이라는 인물에 대해 좌중은 의혹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담천의는 느끼고 있었다. 이 자는 자신의 일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 했고, 그 이상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자가 자신의 적이라 할지라도 이런 경우에는 억지로 일을 해결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늦추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는 두형(斗兄)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겠소. 또한 이 이후에 나를 따라 온다 해도 말리지 않겠소.”

뜻밖이었다. 적어도 시끄런 일을 한바탕 해야 될 것 같았는데 담천의가 보여준 태도는 의외였다. 두칠의 얼굴에는 복잡한 기색이 수시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담천의는 기이한 사람이었다.

“나를 쉽게 풀어 주는 이유가 뭐요?”
“꼭 이유가 있어야 풀어 주는 것은 아니오. 두형은 아직까지 나에게 피해를 입히지도 않았고 위험을 가져오지도 않았소. 다만 두형에게 부탁을 하건데 이곳에서 나와 이분 일행들이 만났다는 사실은 당신이 보고해야 할 내용 중에서 빼 주시오.”

어찌 보면 참으로 심계가 깊은 것 같기도 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 험난한 강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두칠은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담천의와 노인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나는 가봐도 되겠소?”
“물론이오.”

대답은 담천의가 했지만 노인 역시 두칠을 유심히 바라볼 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도 제지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한 수를 피할 수 있다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문 밖을 나갈 즈음 두칠은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나는 공자의 말을 반드시 지키겠소. 나는 이곳에 들어 온 적이 없소. 추혼귀견수(追魂鬼見手) 하공량(厦公亮)께서 일개 여인의 마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본 적이 없소. 다만 공자께서는 저 여인의 말대로 신검산장으로 가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담천의와 노인에게 가볍게 포권을 하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의 의미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추혼귀견수라는 명호가 주는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한번 손을 쓰면 반드시 혼을 거두어 간다는 추혼귀견수는 모습을 아는 자가 극히 적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은 ‘귀신은 만날지언정 귀견수는 만나지 말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담천의는 새삼 추혼귀견수를 바라보았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느꼈었지만 그 정도일지는 몰랐다. 하지만 담천의는 두칠의 말을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려 진진을 바라 보았다.

“이제 아가씨도 가 보는 게 좋겠소. 이런 강호에 아가씨 같은 사람이 혼자 다니는 것은 할아버지는 물론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는 일이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죠?”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화가 나 울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요녕 땅에서 조양궁이란 위세가 어떤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곳을 벗어나 홀로 있게 되자 자신은 너무나 초라했다. 더구나 할아버지 말이 나오자 그녀는 더욱 걱정이 되었다.

“당신은 어디로 갈 생각이죠?”

“아까 듣지 않았소? 나는 신검산장으로 가는 중이오.”

그녀는 그의 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방향은 같았지만 그와 동행하자고 하기엔 그녀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그녀는 몸을 발딱 일으키며 몽화와 노인을 노려 보고는 홱 몸을 돌려 다점을 나섰다.

“당신들에게 진 빚은 반드시 갚을 거예요.”

무림에서의 일이란 이렇다. 아주 사소한 것에 원한을 가지고 그것이 더욱 감정의 골을 깊게하여 종래에는 칼부림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다점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여유는 없었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문을 나서는 것을 본 담천의가 몽화를 바라 보았다.

“이 주인장은 어찌 하시겠소. 사실 문제는 이 사람인데 나보다는 오히려 그대가 더 필요할 것 같구려.”

“물론이에요.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아낙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귀중한 정보를 줄 것 같군요. 저는 하노인의 방법보다 담공자께서 하신 단순한 고문 방법이 더 마음에 들더군요.”

그 말에 노인이 다점의 주인의 마혈을 짚고 담천의에게서 인계 받는 것과 동시에 주인의 얼굴은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32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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