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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1907년 7월 9일자에는 '양무호 해원양성소 수기생 모집공고'가 수록되어 있다. 애당초 양무호가 군함이라는 이름은 붙었으나 어디 하나 군함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엉터리 고물선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을 엿볼 수 있다.
<황성신문> 1907년 7월 9일자에는 '양무호 해원양성소 수기생 모집공고'가 수록되어 있다. 애당초 양무호가 군함이라는 이름은 붙었으나 어디 하나 군함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엉터리 고물선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애당초 구입대금을 한꺼번에 지불하지도 못할 만큼 버거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이 배를 사들인 까닭이 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는 모양이다. 누구는 고종 황제의 국방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고 풀이하는가 하면, 또 누구는 즉위40주년 칭경기념에 즈음하여 공연히 허세를 부리는 통에 그만한 거금을 낭비했다는 혹평도 없지 않았는데, 과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판단이 되질 않는다.

광제호는 군함 아닌 ‘등대 순시선’

그런데 양무호가 하릴없이 인천항에 정박하던 때에 다시 일본에서 들여온 또 다른 배가 있었다. 이름하여 광제호(光濟號)라는 배가 바로 그것이었다.

많은 자료에는 이 배를 군함이라고 적어놓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아마도 광제호가 경무장을 하였고 또한 일본에서 초빙한 해군 소좌들이 잇달아 이 배의 '함장'을 맡았던 사실이 자칫 그러한 오해를 불러온 이유인 듯하나, 처음부터 군함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대한매일신보> 1904년 9월 26일자에는 광제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알리고 있다.

"[등대소용선] 정부에서 일본 신호 천기조선소에 주문한 등대의 소용될 배 광제호는 내 11월 상순쯤 인(천)항에 도박하리라더라."

그리고 다시 <대한매일신보> 1904년 11월 9일자에는 이러한 기록이 보인다.

"[광제호] 일본 신호 천기조선에서 제조한 대한해관순시선 광제호는 지난 달에 이미 준공이 된 고로 이달 15일 내로 인(천)항에 도착할 예정인데 선장은 영국사람 루사후드씨요 기타 일등운전사와 기관장과 일등기관사는 다래셔 사람이오 기관사와 운전사는 일인을 채용할 터이라더라."

이것으로 본다면 광제호는 애당초 일본 가와사키조선소(川崎造船所)에다 '등대순시선'의 용도로 주문된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1976년에 일본박용기관사협회가 정리한 <본방건조선요목표(1868~1945)>에는 광제호의 제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 선명 : 광제(光濟)
(2) 발주자 : 한국세관
(3) 총톤수 : 1056톤
(4) 적재톤 : 540톤
(5) 전장 : 220척 (66.7미터)
(6) 선폭 : 30척 (9.1미터)
(7) 선심 : 21척 (6.4미터)
(8) 주기 : 삼연성(三連成) 레시프로형 기관 2기 2438마력
(9) 항속 : 최대 14.77노트
10) 건조 : 가와사키조선 코베조선소(川崎造船 神戶造船所)
(11) 진수일 : 1904년 6월
(12) 용도 : 등대순시선(燈臺巡視船)
(*주: 이 부분은 김재승, "한국 최초의 신조발주 기선 '광제호'", <월간 해기> 1979년 11월호, 22쪽에서 재인용.)


대한제국이 일본 가와사키조선소에 주문하여 만들어온 '광제호(光濟號)'의 모습이다. 흔히 이 배는 '양무호'와 더불어 대한제국이 보유했던 또 하나의 군함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그러하지 않다. 이 배는 군함이 아니라 관세국에서 직접 관리했던 '등대순시선'이자 '세관감시선'이었다.
대한제국이 일본 가와사키조선소에 주문하여 만들어온 '광제호(光濟號)'의 모습이다. 흔히 이 배는 '양무호'와 더불어 대한제국이 보유했던 또 하나의 군함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그러하지 않다. 이 배는 군함이 아니라 관세국에서 직접 관리했던 '등대순시선'이자 '세관감시선'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조발주선이라는 광제호의 도입은 그 시절에 해관 총세무사(總稅務司)였던 영국인 브라운(John McLeavy Brown, 한국명 '백탁안(柏卓安)')의 발의에 따른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공사 알렌이 정리한 <외교사연표>(1904)에 따르면, "1902년 12월 ㅡ 한국정부, 등대감시 및 수송선 입출항시 세관순시 및 경비용으로 선박 1척을 일본으로부터 발주함. 대금은 약 35만원임"이라고 적어놓은 구절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광제호를 처음 발주할 당시의 흔적이 아닌가도 싶다.

연회 장소나 교통수단으로도 활용

여기에서도 보듯이 재정수입을 대부분 세관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항로표지, 등대관리, 연안감시 등의 업무가 매우 긴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광제호의 역할이 등대순시선과 항로표지선에만 머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총세무사 브라운이 이 배를 들여와 마치 자기의 개인요트처럼 굴렸다고 적어놓은 기록도 없지 않고, 때로 한국정부의 고관들이 짬짬이 인천으로 내려와 이 배에서 연회를 베풀곤 했다는 신문기사도 자주 눈에 띈다.

더구나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한국통감부가 설치된 뒤로는 사실상 그네들의 '관용선'으로 줄곧 차출되곤 했던 흔적은 역력하다. 실제로 일본인 관리들이 본국으로 나들이하거나 어디론가 출장을 갈 일이 생길 때마다 번번이 교통수단으로 부려먹었던 것이 바로 광제호였다.

예를 들어 1909년 봄에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이 북간도(北間島)와 울릉도 일대를 시찰하기 위해 부산항을 출발하여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간 것도, 그리고 그 해 가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에 장춘으로 급파된 일본인 검사장 나카가와 카즈스케(中川一介)를 태우고 대련(大連)으로 내달린 것도 모두가 '광제호'였던 것이다.

그 시절로서는 최신식 배였으니만큼 광제호가 자주 이용된 것은 당연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일본과 한국을 이어주는 통로가 배밖에 없던 때였고, 육지에도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만이 가느다랗게 이어지고 있던 처지여서 해상교통이 훨씬 더 빠르고 익숙하던 때였다.

국권피탈과 더불어 광제호는 어느새 '코사이마루(光濟丸)'가 되어 버렸다. <매일신보> 1910년 12월 27일자는 광제호의 개칭 사실을 알리고 있다.
국권피탈과 더불어 광제호는 어느새 '코사이마루(光濟丸)'가 되어 버렸다. <매일신보> 1910년 12월 27일자는 광제호의 개칭 사실을 알리고 있다. ⓒ 이순우
한일병합 후 테라우치 총독의 발이 되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대한제국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는 1910년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공식적으로 인천항로표지관리소 즉 예전의 등대국(燈臺局) 소속이었던 광제호는 조선총독부 통신국으로 이관되어 총독부의 관용선이 되었으며, 그 이름마저 광제호가 아니라 '광제환(光濟丸, 코사이마루)'으로 바뀌었다.

<매일신보> 1910년 12월 27일자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인천항로표지관리소(仁川航路標識管理所)의 전용함 광제호는 병합하는 동시에 조선총독부 통신국(通信局) 소속에 이(移)하여 총독부의 관선으로 결정되었은즉 함(艦)이라 칭함이 부당함으로써 본월 11일 위시하여 광제환(光濟丸)이라 개칭하고 광제함장을 광제선장이라 개칭하였는데 해선(該船)의 임무는 이전과 같이 항로표지관리소 전용선으로 연안경비(沿岸警備)의 임(任)을 겸할 터이라더라."

그런데 '광제환'이라는 이름은 이 무렵의 신문기사에 뻔질나게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테라우치 총독의 행차가 부쩍 잦아진 탓이었다. 그가 동상(東上, 동경에 올라가는 일)하거나 조선 전역을 순시할 때마다 광제호는 꼬박꼬박 그의 발이 되었다.

가령, 1912년 11월에 테라우치 총독이 토함산 석굴암의 보존상태를 몸소 확인하기 위해 처음 경주지역을 찾았을 때에도 광제호라는 이름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매일신보> 1912년 11월 13일자에는 테라우치 총독의 경주순시를 마친 뒤의 행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탐방기가 남아 있다.

<매일신보> 1912년 11월 13일자에는 테라우치 총독의 경주순시에 관한 탐방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기차편으로 대구까지 내려와 다시 자동차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포함한 경주 일대의 유적지를 두루 살펴본 뒤에 포항으로 빠져나가 영일만에 대기하고 있던 '광제호'를 타고 이른바 '내지'로 건너가는 행로를 거쳤다.
<매일신보> 1912년 11월 13일자에는 테라우치 총독의 경주순시에 관한 탐방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기차편으로 대구까지 내려와 다시 자동차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포함한 경주 일대의 유적지를 두루 살펴본 뒤에 포항으로 빠져나가 영일만에 대기하고 있던 '광제호'를 타고 이른바 '내지'로 건너가는 행로를 거쳤다.
"테라우치 총독(寺內總督)은 9일 오후 1시 경주 출발, 자동차를 구(驅)하여 영일만의 포항(浦項)에 향하였는데 차간(此間) 7리여(里餘)를 1시간 이내에 달(達)하였더라. 도로는 탄탄하여 극히 양호하니 개(蓋) 대구경주간 이상야(以上也). 포항은 영일만두(迎日灣頭)에 재(在)하여 동조선(東朝鮮) 남도(南都)의 요지(要地), 어업자(漁業者)의 근거지를 목(目)하는 지(地)라.

단 만구(灣口)가 광(廣)하고 주(洲)가 원(遠)하여 일본해(日本海)의 파랑(波浪)을 피하기 불편한 고로, 근경(近頃) 항만수축의 의(議)가 유지자간에 기(起)하여 금회 테라우치 총독의 내포(來浦)를 위기(爲機)하여 총독의 시찰을 청(請)한 자(者)라, 기전(其前)에 기선 광제환은 회항(廻港)하여 당만(當灣)에 입(入)하여 총독의 승선(乘船)을 대(待)하여 이케다(池田) 총독부 체신국장 장관이 광제환을 편승(便乘)하고 내(來)하여 차처에서 총독을 영(迎)하였는데, 오후 4시 총독은 광제환을 이승(移乘)하매 총독을 송(送)하기 위하여 내한 자 일동이 총독의 선실에서 삼편(三鞭)을 거(擧)하여 고별의 건배를 위하고 4시 30분 발묘(拔錨)하여 선(船)은 영일만을 출(出)하여 하관(下關)으로 항하였는데······ (하략)."


대한제국의 등대순시선 광제호는 어느샌가 완벽한 '총독의 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의 기사 말고도 총독의 행로에 자주 광제호가 뒤따랐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많이 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1923년 9월에 관동대지진이 났을 적에도 광제호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마련한 구호품을 전달하는 임무가 광제호에게 주어졌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되돌아오는 길에는 대학살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조선인 동포 500명을 태워가지고 부산항에 입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1925년 조선우선으로 넘겨져

그런데 그 이듬해에 가서는 광제호가 조선우선(朝鮮郵船)으로 넘겨진다는 내용을 담은 신문기사가 등장한다. 1904년 이후 관용선으로만 사용되어 왔던 광제호가 마침내 민용선으로 전환되어 처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실제로 <매일신보> 1924년 12월 18일자에는 "조우(朝郵)로 간 광제환(光濟丸), 작 17일부터"라는 제목의 기사가 남아 있다.

"구한국시대(舊韓國時代)부터 거금 이십년간에 많은 역사 가진 광제환은 이번 관선정리(官船整理)로 인하여 체신국으로부터 조선우선주식회사(朝鮮郵船株式會社)에 빌려주기로 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 어니와 그 배는 지난 15일까지 관선(官船)으로 중대한 임무를 마치고 16일에 길촌해사과장(吉村海事課長)의 입회하에 고별식을 거행하고 조선우선회사에 인계하였는데 그 배는 처음으로 민선(民船)이 되어 17일에 인천(仁川)을 출발하여 원산(元山)으로 항행하였다더라."

그리고 1925년 1월 22일자로 각의 결정에 따라 '조선총독부 소유 광제환 폐기에 관한 건'의 칙령안이 통과되어 선원의 퇴직 등을 포함한 공식적인 폐기절차가 완료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배가 만들어진 지 이미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버렸으니 이러한 구형 중고선을 더 이상 '총독의 배'로 사용할 아무런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우선에 넘겨진 광제환은 그 해 1월 19일에 출항하는 '원산ㅡ청진간 직항노선'에 곧장 투입되었다. 조선우선의 정기항로 안내광고를 확인해 보니까, 그 무렵에 '원산ㅡ청진' 항로를 광제환이 꼬박꼬박 다닌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3년이 흐른 1928년 중반부터 '광제환'이라는 이름이 정기항로 안내광고에서 사라졌고, 그 후로는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매일신보> 1925년 1월 16일자에 수록된 '조선우선 정기항로 안내광고'에는 1월 19일자 출항예정 '원산ㅡ청진직항노선'에 광제환이 처음 투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25년 1월 16일자에 수록된 '조선우선 정기항로 안내광고'에는 1월 19일자 출항예정 '원산ㅡ청진직항노선'에 광제환이 처음 투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삼천리> 1931년 3월호에 우연찮게도 광제호에 관한 기록 하나가 남아 있어 그 흔적을 대략 짐작할 따름이다. 공곡거사(空谷居士)라는 필명으로 기고된 "구한국군함타고 상해, 해삼위 항행기; 일 선원의 수기"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내가 탄 배는 1천톤의 광제환(光濟丸)과 2300톤의 천안환(天安丸)과 1천 600톤의 부산환(釜山丸) 등이었다. 광제환은 양무호와 같이 옛날 한국해군소유의 두 군함 중 하나이었다. 양무호를 처음 일본민간회사로부터 사들이기는 아마 40여년 전인 듯. 그 배에는 5인치 산포(珊砲) 4대가 있고 선창도 강철로 되었었다. 이 배가 군사상으로 처음 활약하여 본 것은 일로전쟁 당시에 석탄을 싣고 황해를 분주히 다녔었다.

그러다가 시세가 변한 뒤는 대판상선회사에 팔리어 지금은 북해도에서 대만까지 일본 각처의 연안을 돌아다니며 '토다이마와리(燈臺廻り)'라는 특수작업에 옮아있는 것으로 일대의 운명을 끝막었고 또 광제환으로 말하면 이것도 가와사키조선소(川崎造船所)에서 한국정부가 사온 것이었다.

배에는 비포(備砲) 2문이 있었는데 그 역(亦) 5인치 산포였었다. 이 배도 총독부의 소유가 되어 우선회사에 대하(貸下)되어 원산청진선의 정기선이 되었다가 지금은 조선 각지의 '토다이마와리(燈臺廻り)' 배가 되었었다."


여기에서 광제호를 일컬어 '구한국해군의 군함'이라고 적어놓은 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사실과 다르다. 조선 땅에 해군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사실관계가 전혀 맞지 않는 소리이다.

말년엔 ‘해원양성소’로 활용

그런데 양무호가 여전히 등대순시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이 묘사된 부분 역시 흔히 양무호가 "1916년에 석탄을 싣고 싱가포르로 가던 도중에 동지나해에서 침몰했다"고 알려진 내용과는 서로 어긋난 것이어서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제대로 가늠하기 어려운 듯하다.

어쨌거나 이 기록으로만 보면 광제호는 한동안 조선우선의 정기항로에 투입된 뒤에 다시 '등대순시선'의 역할로 복귀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에는, "말년에는 진해고등해원양성소의 실습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도 하지만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광제호의 흔적은 한참 세월이 흘러 해방 이후의 신문기사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민주중보> 1946년 9월 13일자에는 '변신혹사된지 40년, 한국시 순양선 광제환 귀국, 그때 휘날린 태극기는 교섭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기사가 작성될 시점에는 일본 오사카상선회사에서 이 배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어떠한 연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신문내용의 판독이 힘들어 자세히 가려내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에 관한 후속보도가 있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아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한편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엮은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 상권>(다인아트, 2001)에도 '첫 근대식 군함 양무·광제호ㅡ일제 농간·침략에 침몰하다'는 항목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광제호의 고달픈 행로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광제호는 1912년 일본이 행정정비를 단행하면서 인원감축 등 구조조정을 당한 뒤 일제가 설립한 조선우선주식회사로 넘어가 상선으로 이용된다. 이후 1918년 인천축항이 준공되면서 광제호가 항내로 접안하자 한 때 서구식 대형기선을 보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인천에 해원양성소가 설립된 후 광제호는 실습선으로 활용됐으며, 신순성씨가 선장겸 교관을 맡았다. 광제호는 이어 원산ㅡ청진간 연락선으로 쓰이다 철도가 놓이게 되면서 진해로 옮겼다. 여기서 태평양전쟁 전인 1940년까지 진해해원양성소 실습선으로 이용됐고, 1941년 태평양전쟁 때 일본 군사정책에 따라 석탄운반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45년 광복 후 일본인들이 부산항을 통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광제호의 운명은 또 한번 바뀌게 된다. 신태범 박사는 "일본인들이 패망 후 철수에 이용했던 배가 광제호였다는 얘기를 세월이 한참 지난 뒤 당시 이 배를 탔다는 일인 중학교 동창에게 들었다"며 "한 나라의 해군 함정이 침략자들의 철수용 선박으로 이용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광제호가 조선우선으로 넘어간 때를 1912년이라고 한 것이라든가 '이등운전사'로서 촉탁의 신분을 넘어서지 못했던 신순성을 일컬어 광제호 선장이라고 적은 것 등은 모두 명백한 착오로 판단되지만, 여하튼 광제호의 행로에 대해 이것만큼 소상하게 정리해 놓은 기록이 많지 않으니 이 정도의 설명이나마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듣자하니, 광제호는 "1948년경에 시즈오카현(靜岡縣) 오마에자키(御前崎)에서 좌초사고가 나서 파괴되었다"고 적어놓은 기록이 남아 있다고는 하는데, 이 역시 사실관계가 어떠한지는 제대로 확인할 방도는 없다.

애당초 대한제국의 등대순시선이었던 '광제호'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게 되었으나 끝내 '광제호'라는 이름을 되찾지는 못했다. 비록 처음에는 우리의 배였으나 일생을 대부분 조선총독을 비롯한 식민통치자들을 위한 배로만 존재했던 광제호는 그렇게 고단했던 45년간의 긴 행로를 마감했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광제호'가 아닌 '코사이마루(光濟丸)'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위의 기사에서 미처 수록하지 못한 광제호 관련 신문자료와 양무호 관련 추가자료는 다음카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http://cafe.daum.net/distorted)'에 일부 정리해놓았으므로 이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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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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