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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방심

지난날 광고 카피 중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라는 게 있었다. 인상 깊었던 글귀로 여태 기억에 남아 있다. 상품은 순간의 선택이 10년 정도일지 모르지만 사람, 특히 배우자일 경우는 자기 평생뿐 아니라 자식 대까지도 영향을 끼친다.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두 길 혹은 서너 길 가운데서 하나를 택해야 할 때, 그 순간의 선택에 따라 다음 인생이 좌우된다.

일제 강점기에 학병으로 끌려간 김준엽, 장준하 훈련병들은 일본군이냐 광복군이냐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광복군을 택하였기에 역사는 그분들을 의로운 분으로 기록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어떤 순간은 매우 중요하다.

또 순간의 방심은 사람의 운명을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놓기도 한다. 시속 100킬로미터 이상 고속으로 달리던 운전기사가 깜빡하는 새, 자신뿐 아니라 애꿎은 사람까지 저승으로 동반하는 걸 자주 뉴스에서 볼 수 있다.

▲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안흥 산골집
ⓒ 박도
나는 이곳 강원 산골마을로 내려와서 첫 겨울을 아주 혹독하게 보내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겨울가뭄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며칠 전에 내린 눈으로 겨울 가뭄은 모면했지만, 수원지와 연결된 수도관이 그동안 강추위로 꽁꽁 얼어서 계속 물을 샘물에서 길어다 먹었다.

어제 혼자서 지내다가 마침 오늘 <오마이뉴스> 창립기념 모임도 참석할 겸, 다른 볼 일도 마련하여 서울 나들이를 계획했다.

그래서 어제 점심 후 이삼 일 동안 아내가 불편치 않도록 물을 길어다 놓는다고 물통을 들고 샘으로 갔다. 샘물을 길어 물통에 가득 담아 내려오던 중 언덕길에서 그만 다리가 겹질리면서 쓰러졌다.

잠시 후 일어나자 통증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물통을 들어다 놓고 방안으로 들어와서 양말을 벗고 발목을 보니 그 새 발목 위가 볼록 부었고 통증도 다시 심했다.

목다리를 짚다

침을 맞을까 병원을 갈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게 뒤탈이 없을 것 같아서 병원에 가보려고 마음먹었다. 서울로 볼 일 보러 간 아내에게 전화를 해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오지 않을 걸로 봐서 막차로 오든가 다음날 올 모양이었다.

아내는 눈길에 위험하다고 차는 두고 갔지만 면허증이 없는 나에게는 고철이나 다름이 없다. 곰곰 생각 끝에 얼마 전에 사귄 이웃집 해동이 아버지가 떠올라 전화를 했더니 트럭을 몰고 왔다. 그분의 부축을 받으며 트럭에 실려 안흥 장터 연세병원에 갔다. 거기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여 판독한 결과, 의사는 발목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곧 조수와 간호사는 상처 부위에 깁스를 해주고 돌아올 때는 목다리를 주고는 그 사용법까지 친절히 가르쳐 주면서 시범도 보여 주었다.

해동아버지의 부축으로 돌아온 뒤, 차에서 내려서 집까지는 평생 처음 목다리를 짚었다. ‘밤 새 안녕’이라고 하더니, 졸지에 목다리를 짚는 환자가 되었다. 집에 돌아온 뒤 서울에서 만날 친지들과의 약속을 전화로 일일이 취소하고는 깁스한 다리를 베개에다 올려놓고 누웠다.

내가 부주의한 게 원망스럽다가 그러면서도 병원 조수의 말이 생각나서 자위했다.
“선생님, 참 다행한 것은 뼈에 금만 간 거예요. 뼈가 부서졌거나 부러졌다면 수술을 받아야 해요.”

또 한 편으로는 더 큰 불행을 미리 액땜하는 거라고도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생각해 보면 지난 60년 동안 나는 다리를 무척 혹사시켰다. 신문 배달한다고 아침저녁으로 수십 리를 뜀박질을 했고, 보병 장교로 임관하여 ‘삼보 이상 구보’라 하여 얼마나 많이 뛰었던가.

전방소대장 시절에는 하루 종일 걸어도 다리 아픈 줄 모른 채 지냈다. 생각할수록 내 다리에게 고맙다. 이제껏 그 흔한 발마시지도 한 번 한 일이 없었다. 지난 여름 중국 연변에서다. 현지 사정에 밝은 한 분이 발마사지를 권유했을 때, 뭘 그런 것도 하느냐고 한 마디로 잘랐다.

▲ 내 집 처마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다.
ⓒ 박도
깁스를 하고 누웠으니 용변 보는 일이 가장 큰 고역이다. 물 사정으로 실내 화장실은 쓰지 않고, 오래 전부터 재래식 뒷간을 사용하는데 마당을 지나 꽤 멀다. 오가는 길에는 목다리를 사용치 않을 수 없다.

내가 이렇게 혼자서 고전하는 줄도 모르고 한 독자부부가 나를 만나고자 이 부근까지 왔다면서 방문해도 좋으냐고 전화가 왔다. 나는 사정을 말하고 날이 풀린 봄이나 여름에 오라고 돌려보냈다. 추운 날 먼 곳에서 찾아왔는데 박정하게 보낸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막차로 아내가 왔다. 아내는 아무래도 깁스 풀 때까지는 식수와 화장실 문제로 서울에 가서 지내자고 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 눈이 소록소록 내렸다. 아내가 이 날씨에는 도저히 차를 몰고 갈 수 없다고 하여, 눈이 녹을 때까지는 별 수 없이 불편하지만 여기서 살아야 한다. 목다리를 짚고 뒷간을 오가는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뜨거웠던 그해 여름

10여 년 전 어느 여름이었다. 혼자서 텅 빈 교무실에서 잔무처리를 하고 있는데,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 자리로 다가와 목다리를 짚은 채 “박도 선생님이십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답한 뒤 그를 옆 자리에 앉혔다. 그는 자그마한 손가방에서 셀로판지로 싼 인쇄물을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그 인쇄물 앞은 20여 년 전의 모교 신문 기사였고, 뒤는 그 무렵의 일간지 기사를 복사한 것이었다. 바로 그였다.

1965학번인 나는 대학 재학 중 조용하게 보낸 학기는 4학년 마지막 학기뿐이었다. 특히 대학 입학 첫 해는 한일협정비준의 해로 1년 내내 거리에서 보냈다. 그해 초여름,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처리를 앞둔 어느 날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제 2의 을사조약인 한일협정을 즉각 철회하라’
‘상륙하는 게다 소리 몽둥이로 박살내자’
‘매판 세력 박멸하여 민족자본 형성하자’
‘대일 굴욕 외교 결사반대’


이런 구호와 피켓,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1킬로미터 남짓 신설동 로터리까지는 기세 좋게 행진했으나, 거기서부터 페퍼포그차를 앞세운 경찰이 방독면을 쓰고는 최루탄 발사기와 몽둥이로 무장한 채, 수백 명이 몇 겹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 팽팽한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 끝에 경찰관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마구 쏘며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돌진해 왔다. 시위 학생들은 난무하는 경찰봉에 수없이 두드려 맞고 군화에 짓밟혔다.

순식간에 대광고교와 신설동 로터리 일대는 수라장이 돼 버렸다. 그때 한 학생이 머리가 터지고 기절해 버렸다. 그가 죽었다고 삽시간에 소문이 번져서 더욱 분위기가 살벌했다.

다행히 그는 9개월간의 사투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는 김아무개로 나와는 같은 학번으로 이공대 출신이었다. 그는 나보다 몇 년 늦게 졸업장은 받았으나 그때의 후유증으로 평생 정상적으로 사회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날 그의 뒷모습

그는 별 말없이 월부 책 구매신청카드를 내밀었다. 사실 나는 직장생활하면서 이런 일은 자주 겪은 터였다. 한 동료가 귀띔해준 것은 월부 외판원이 왔을 때 피치 못할 경우는 솔직히 말하고 수당에 해당하는 돈을 줘서 보내는 게 피차 현명한 방법이라고 했다.

나는 그 방법이 떠올라 서무실로 내려가서 경리에게 돈을 꾼 뒤 봉투에 넣어서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는 주머니의 봉투를 꺼내 내 책상에 집어던지고 목다리를 짚고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순간 내가 너무 미웠다. 아무튼 나는 시위 현장에서도 요리조리 잘 피하면서 살얼음판 세상을 요령껏 살아오지 않았던가.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서 앞을 막았다. 다시 그를 내 옆자리에 앉히고 그가 보여준 도서목록에서 <초한지> 10권짜리 전집을 한 질 산 뒤, 그가 던진 봉투도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이 봉투는 내 양심상 받을 수 없네.”

그날 그의 당당한 자존심에 나는 기가 질렸다. 마치 그에게 쇠뭉치로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기어이 봉투를 내 책상에 두고는 목다리를 짚으며 성큼성큼 교무실을 벗어났다. 나는 교무실 복도에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는 잠시 멈추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인지 눈물인지 훔쳤다.

때로는 그가 기다려졌지만 그 날 이후 찾아오지 않았다. 오늘 목다리를 짚은 내 눈앞에 그 날 그가 목다리를 짚고서 떠나던 그의 뒷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어른거린다.

진짜들은 죽거나 부상당하고 가짜들만 살아남아 저 잘났다고 떠들며 사는 세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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