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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칼바람 속에 펼쳐진 보름굿

▲ 공연자와 관객이 따로 없는 굿판은 이래서 좋다. 회관 앞 마당에서 어우러진 굿판 모습.
ⓒ 진홍
상쇠를 필두로 하여 20대부터 70대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풍물패가 마을 회관 앞에 나타나더니 뺑글뺑글 마당을 돌기 시작합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에게도 신명이 옮겨 붙었는지 몸이 들썩거립니다. 소고를 들고 뺑뺑이굿을 치며 대여섯 바퀴 돌던 할아버지 한 분이 숨이 찬 모습을 보이자 구경꾼들이 힘내시라고 박수를 보냅니다.

지난 19일 느닷없이 동장군이 몰고 온 한파를 뚫고 굽이굽이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찾아간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마을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산봉우리가 붓끝처럼 생겨 '필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어머니의 품 속처럼 풍만해집니다. 필봉마을은 봉우리처럼 빼어난 기량과 등성이처럼 후한 인심이 산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세시풍속은 정월달에 가장 많습니다. 전통시대에 농사를 중심으로 한 생활양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초엔 집안을 중심으로 한 세시풍속에서 중순부터는 마을 단위의 공동체적인 놀이나 대동제가 중심을 이룹니다. 정월 대보름굿은 한 해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제의와 놀이가 어우러진 대동굿입니다.

무형문화재 제 11-마호인 '호남좌도 임실필봉농악보존회(회장, 양진성)'가 펼친 대보름굿은 <기굿>을 시작으로 <당산굿> <샘굿> <마당밟이> <판굿> <달집태우기> 순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여느 마을굿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른 농촌마을처럼 어린이가 거의 없고 점점 노인들만 남아 있는 것도 공통점이지만 특이한 것은 45명의 풍물굿패 중 최고령자인 채규병(80) 할아버지를 비롯한 4~5명의 70대 후반 노인들이 필봉마을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소고재비 채 할아버지를 보면 나도 몰래 들썩거려지는 천상 신명꾼입니다.

▲ 아들 딸 쏙쏙 잘 낳고 싶거든 쿨컥쿨컥 들이켜요! 마을 샘굿의 한 장면.
ⓒ 진홍
옛날엔 마을마다 상징 깃발이 있었는데 기굿은 마을굿을 시작하기 전 깃대 밑에서 술을 세 번 붓고 모두가 세 번 절을 한 뒤 시작합니다. 기굿이 끝나면 곧바로 마을 입구 당산나무로 가서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마을을 지켜주는 가장 큰 신께 마을굿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하는 건 어쩜 당연한 절차인지도 모릅니다.

'유 세차 모년모월… 상향'으로 끝나는 굿하고는 거리가 있는 제문 형식이 당산굿에 들어간 건 조선시대 유교적인 요소가 결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나라 마을굿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풍어제 등 별신굿에도 나타납니다.

이어서 마을 공동 우물로 가서 샘굿을 시작합니다. 샘물은 만물을 소생케 하고 살찌우는 역할을 하므로 일년 내내 퀄퀄 샘물이 솟기를 기원하는 굿입니다. "샘물 맹키로 힘이 불끈불끈 솟아 아들 딸 쏙쏙 잘 낳고 잡거든 쿨컥쿨컥 마시쇼 잉~!" 상쇠가 건네 준 바가지를 받아 구경꾼들이 앞을 다투어 벌컥벌컥 필봉의 정기가 서린 샘물을 마시고 이제 마당밟이 하러 마을로 풍물을 울리며 갑니다.

쥔장 쥔장 복 들어가요!

▲ 주인장! 복 들어가요. 문 좀 열어주세요! 지신밟기 중 문굿이며 정면으로 필봉이 보인다.
ⓒ 진홍
본격적인 지신밟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지신밟기란 잡귀잡신을 밟아주어 집지킴이 신인 터주신을 즐겁게 해주어야 건강과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은 전통시대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문화의 특징 중 또 하나는 결코 잡귀잡신이라 하더라도 죽여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오지 못하게 밟아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조상들의 생활철학과 지혜가 엿보입니다.

먼저 사립문 앞에서 "쥔장 쥔장 복 들어가요. 문 안 열면 가뿔라요"하는 소리에 쥔장이 나와 풍물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더니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문굿은 지신밟기를 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통과의례이며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옛날 대보름 굿을 보면 겉보리밖에 없는 가난한 집이라 하더라도 정성껏 지신을 밟아주던 풍습이 떠오릅니다.

마당을 밟아주고 나면 주인은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내놓아 먹고 마시게 합니다. 두 번째로 간 집은 필봉굿 예능보유자이신 박형래(79) 할아버지였는데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놓아 풍물꾼과 구경꾼들이 푸지게 먹고 마시고 마당에선 한바탕 푸진 굿판이 벌어집니다.

▲ 주인이 내 준 음식과 술을 마시고 또 한바탕 난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 진홍
한참을 놀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정지굿(조왕굿)을 합니다. 거꾸로 엎은 솥뚜껑 위에 쌀을 가득 담은 큰 대접을 올리고 촛불을 켜 놓습니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일년 내내 물 묻은 바가지에 깨 달라붙듯 복만 다글다글 붙으라는 덕담을 하고 부엌 뒷문을 통해 장독대로 가 철룡굿을 하면 지신밟기가 마무리 됩니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한 굿이 서너 군데 집을 돌고 나니 벌써 해가 저뭅니다. 입춘 우수 지난 필봉의 겨울바람은 매섭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0여 명의 사람들에게 먹일 밥과 국을 끓이느라 가마솥에선 뜨거운 김이 피어오릅니다.

올해는 날씨가 추워 사람들이 덜 모였다는데 그래도 쌀 다섯 가마니(80kg)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인심 좋은 필봉 아주머니들과 자원봉사들 덕분에 끼니 때마다 푸지게 먹고 마시고 놀 수 있는 굿판입니다.

저녁이 되어 마을 뒷산 아래 만들어놓은 굿마당으로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제 풍물꾼들이 뽐내는 기량을 실컷 구경하고 함께 놀 수 있는 판굿 순서입니다. 집집마다 도는 집돌이를 할 때는 특별한 기예를 볼 기회가 없지만 판굿에서는 굿패의 기량이 마음껏 발휘되는 놀이판입니다.

▲ 할미역할을 맡은 재일교포 3세인 고년세씨가 구경꾼과 더불어 춤을 추고 있다.
ⓒ 진홍
"굿은 본디 푸진 것이여, 어디 한 번 푸지게 놀아 볼까요?"

상쇠가 이끈 풍물패가 마당을 돌면서 풍물을 치기 시작합니다. 밤이 되면서 칼바람이 불고 진눈깨비까지 몰아칩니다. 동장군이라도 이겨낼 듯 판굿은 후끈 달아오릅니다. 곧이어 풍물꾼이나 구경꾼 구별 없이 덩실덩실 하나가 되면서 굿마당은 토요일밤의 열기로 가득 차버립니다. '신명의 난장판'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싶습니다. 공연자와 관객이 따로 없는 우리네 굿판은 이래서 좋습니다.

서울에서 아등바등 살다가 10여년만에 필봉마을을 다시 찾았다는 어느 주부는 대학 시절 필봉으로 전수를 왔던 향수를 달랩니다. 평소 과묵하기 짝이 없던 남편이 먼저 들떠서 춤을 추고 애들이 신나게 노니 행복한 굿판입니다. 서울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만 해도 17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 대학생들이 제일 많았는데 숭의여대 풍물패인 서정은(3학년) 씨는 "필봉의 달빛은 서울의 달빛과 다르다"고 소감을 말합니다. 도시의 풍물이 인스턴트 식품이라면 농촌 마을의 풍물은 토장국에 비유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개인기 뛰어난 임실 필봉굿

▲ 개인놀이는 굿패의 기량을 평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채상놀이 중 자반뒤집기.
ⓒ 진홍
몇 차례 굿마당을 신나게 뺑뺑이 돌다보니 영하의 날씨도 조금은 뒤로 물러난 듯합니다. 이제 개인기를 구경할 수 있는 구정놀이 차례입니다. 소고놀이가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워낙 가볍게 사뿐거리며 기량을 뽐내기에 팔팔한 젊은이인 줄 알았더니 꽤 연세가 있어 보이는 분입니다. 박수가 그칠 줄 모릅니다.

뒤이어 나온 설장구는 보는 이의 애간장을 다 녹일 듯 장구를 갖고 노는 모양이 여간이 아닙니다. 탄성이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난리'가 일어납니다. 채상놀이는 땅을 뒤집으며 자반뒤집기를 하는데 올림픽에서 보던 체조와는 사뭇 다른 흥분을 줍니다.

이런 굿의 묘미에 푹 빠져 일본에서 일부러 왔다는 재일봉포 3세인 이미희(25세)씨는 일본 교포사회에서 5년째 풍물을 치고 있는데 고국에 와야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전북대 유학 3년째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역시 재일동포 3세 고년세(34세)씨는 오늘 할미 역할로 인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 무동을 타면서 신명을 이어받은 어린이들이 우리문화의 맥을 이어갈 것이다.
ⓒ 진홍
개인놀이에서 필봉굿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잡색도 개인기를 보여준 점이었습니다. 춤과 익살로 시종 분위기를 잡고 다니는 각시와 대장군의 개인기가 일품이었습니다. 잡색이 다른 굿패에 비해 뛰어난 것은 아마 '푸지고 맛있게' 잘 놀던 필봉굿패를 이웃마을에서 초청하거나 인근마을로 걸궁을 다니던 필봉굿패의 내력과 관련이 깊은 듯싶습니다.

필봉마을이 본디 당산굿이나 마당밟기 정도나 치는 단순한 농악에서 오늘날과 같이 판굿과 걸립굿과 같은 수준 높은 풍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유명한 상쇠 박학삼(작고)을 이 마을로 초청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밤이 깊을수록 너무 추워져 도둑잽이굿은 아쉽게도 못보고 노래굿에 이어 전체가 함께하는 수박치기를 하고 행사를 마무리하는 달집태우기로 대보름굿은 끝을 맺었습니다. '올해는 돈 좀 벌게 해주세요!' '제발 장가 좀 가게 해주세요!' '나라가 평안하게 해주세요' 소원도 가지각색입니다. 모두의 소원이 성취되길 달집을 태우며 빌어봅니다.

달집태우기는 원래 정월 대보름달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이 달집에 불을 붙이는 세시풍속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운과 달이 점점 커지는 생산력에 바탕을 둔 민속놀이였지만 오늘에 와서는 행사의 절정을 장식하기 위한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필봉마을은 이제 20~30호 정도에 50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외지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조그마한 굿 하나 치기 힘든 상황이지만 필봉굿을 완성시켜 놓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이었던 양순용(95년 작고)씨의 노력으로 해년마다 천여 명의 전수자를 배출하여 행사가 풍성해졌습니다.

▲ 소원성취 만복 깃들게 해주시고 올 한 해 푸지게 살게 하옵서서!
ⓒ 진홍
웃지 못할 씁쓸한 에피소드 하나

한때 대학가에서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를 되살리자는 문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시작한 게 다름 아닌 탈춤과 풍물입니다. 임실필봉굿은 풍물을 대중화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마 풍물 치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필봉풍물일 정도로 호남좌도풍물의 대표격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좌도라는 명칭 때문에 운동권에서 많이 받아들였다는 둥 각종 확인되지 않은 설들이 난무했는데 아무래도 압권은 한겨레신문 강습광고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80년대 초반에는 풍물 치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장구라도 들고 다니면 운동권이라는 딱지가 붙든가 혹은 무당 되려고 하느냐는 주위의 시선을 감수해야 했으니까요.

80년대 운동권과 풍물은 뗄 수 없는 거의 필연에 가까운 막역한 죽마고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사회단체이든 간에 꼭 풍물강습을 하였는데 풍물은 단체를 대중화하는 데 절실하였으며 특히 집회나 시위에 없어서는 안 되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풍물강습 회원모집을 위해서는 전단지를 전봇대나 담벽에 붙이기도 하고 또 다른 전통적인 방법은 한겨레신문 생활광고란이었습니다. 문제는 '호남좌도 풍물강습'이라는 제목으로 광고를 내게 된 게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광고가 나간 날 아침부터 이런 저런 전화를 받던 중 어딘지 모르게 사무적인 말투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보통 문의 전화는 '아무나 배울 수 있느냐' 또는 '처음인데 나도 배울 수 있겠느냐' 등 물어보고는 그럼 나도 배워보겠다는 어찌 보면 너무 뻔한 '자기 다짐형' 문의가 대부분인데 약간은 수준이 있는 듯한 문의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해가 지고 으슥해진 시간에 강습생들이 하나둘 찾아오던 중 강습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아저씨가 찾아 왔습니다. 단체 책임자를 좀 보자고 하더니 강습 내용에 대해 꼬치꼬치 묻습니다.

'좌도풍물이 무슨 내용이냐? 혹시 북한이나 빨치산들이 치던 거 아니냐?'

우회전은 맘대로지만 좌회전은 금지되거나 비보호좌회전 교통신호등처럼 '좌'라는 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던 야만시대, 지금은 즐겁게 회상하지만 씁쓸한 추억담과 함께 풍물은 전 국민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호남좌도풍물과 우도풍물은 옛날 방식의 지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소리가 섬진강을 중심으로 서편재 동편재로 나뉜 차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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