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달천강 물맛을 한 번 보려고 내려가려다가 접고 말았습니다. 강까지 내려가는 길목이 가팔랐던 까닭이요 신발도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잘못했다가는 미끄러질 듯싶어서 그저 멀리서만 바라보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그 맑고 푸른 물빛은 내 마음을 적셔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차머리를 돌렸습니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강변도로를 달렸습니다.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가 올라가기를 되풀이했습니다. 강변도로라 그런지 차창 밖으로 시원한 바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답답하고 복잡하던 속마음이 한 순간 풀리는 듯 했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요? 남한강변을 따라 무작정 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중원고구려비'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습니다. 그 길은 '가금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 한 참을 달렸더니 드디어 그 돌비석이 나왔습니다.
그 돌비석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이런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습니다.
"국내외 현존하는 고구려비는 현 길림성 집안시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뿐인데, 이 비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그런데 이 비석이 1979년에 발견될 때만 해도 가금면 입석 마을 사람들이 빨래판으로 썼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웠겠는지,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래도 역사 속 가치가 있는 이 돌비석을 그나마 찾아냈으니 얼마나 기쁘고 또 좋았겠습니까.
그 상상도 잠시, 중원고구려비가 너무 많이 망가져 있었고 또 그 돌비에 새겨진 한자를 해독할 능력도 되지 않아 나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열심히 차를 몰고 줄기차게 달렸습니다. 비가 올 듯 바람은 세차가 불어 왔지만 뭔지 모를 뿌듯함이 마음속에 몰려 왔습니다. 옛 중원 땅 한 복판에 살고 있다는 그런 자부심(?) 같은 게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차머리를 또 돌려 한 참을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참에는 더 신기하고 멋진 것들을 만났습니다. 쭉 뻗은 도로변에 수없이 많은 장승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승과 장승 사이에 솟대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장승들을 내 눈으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옛날 말로만 듣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골 깊은 산속 동네에 있을 것 같은 그런 무서운 장승은 세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웃거나 재미있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장승은 한쪽 볼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고, 또 어떤 장승은 머리에 혹이 달려 있기도 했습니다.
그 장승마을은 충주 민속공예마을인 가금면 가흥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서 그렇게 홀딱 빠진 마음으로 쳐다 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차를 몰고 그 도로변을 달리던 많은 사람들도 차를 세우면서 구경들을 하고 갔습니다. 참 재미난 풍경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안내문을 쭉 읽어나가면서 장승이 뭔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또 솟대가 무엇이며, 어떤 도리를 해 왔는지 조금은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 참 잘 온 듯싶었습니다.
장승이 남자 성기를 떠받는 신앙에서 유래한 것인지 장생고(長生庫)라는 낱말 뜻에서 유래한 것인지 그건 중요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다만 지역 간 경계표 구실이나 이정표 구실, 그리고 마을 수호신 역할을 했다는 게 중요할 듯싶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관모를 쓰고서 나무 한 가운데나 앞에 '천하대장군', '상원대장군'이라고 새겨져 있으면 그게 남상이고, 관모가 없이 그저 '지하대장군', '지하여장군' '하원대장군' 같은 글이 새겨 있으면 그게 여상이라는 것쯤은 알아두면 좋을 듯싶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솟대'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솟대'라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고, 나무로 새를 깎아서 높이 세워 놓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이 솟대를 지역에 따라서 소줏대나 표줏대, 솔대나 거릿대, 별신대 정도로 부른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그게 어떨 때 쓰여 왔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안내판에 적혀 있는 '솟대'의 쓰임새를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농가에서 섣달 무렵에 새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에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장대에 높이 달아맨다. 이 볏가릿대를 넓은 마당에 세워두고 정월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벌이는데, 이렇게 하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또 민간 신앙의 상징물인 장승 앞에 장대를 세우고 장대 끝을 나무로 박아서 달기도 하였다."
그런 것들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정말 신났습니다. 모처럼 만에 시내 한 복판을 벗어나 바람을 쐬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좋은 것들을 보았으니 무척이나 기쁘고 흐뭇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서 '횡재했다'고 말하면 누가 뭐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충주 시내를 벗어나서 마음도 추스르고 멋진 사적지도 많이 둘러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이것저것 많이 배워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