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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외무성 성명 이후 미국은 '핵 보유' 선언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강구하고 있다. 미국은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1990년대 초반의 제1차 북핵위기 때에도 구소련이나 러시아 등을 통해 북한을 압박하려 했지만, 그러한 노력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과거에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확률 0%'의 구태의연한 방식에 또 집착한다면, 미국은 북미관계 악화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북한의 확고한 입장은 '김정일의 비공식 대변인'으로 알려진 김명철 북미평화센터(http://www.cfkap.com) 소장의 코멘트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김명철 소장은 지난 11일, 12일 기자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북한은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원하고 있다"면서 "만약 미국과의 협상이 안 되면, 북한은 자국의 핵 능력을 입증할 만한 '후속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미국은 북한의 확고한 입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자국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사안을 앞에 두고도 사태를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 모른다면, 미국 국민들은 대체 누구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미국의 대북 태도는 지난 4년간 보여준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외무성 대변인 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북한은 지난 4년간의 지루한 공방을 더는 되풀이할 의사가 없음이 명백하다. 북한은 미국에게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역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북한에 대해 분명한 결단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한민족과의 평화공존에 합의하는 것이다.

미국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지난 10일자 북한 외무성 성명에 다소 격한 표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은 외무성 성명의 문맥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북한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1)"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북미가 평화적으로 공존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2)"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 이상 6자회담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은 것이다. 외무성 성명의 핵심은 (1)이었지, (2)가 아니었음을 미국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은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국이 핵보유국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이는 핵을 사용하겠다는 메시지가 아니다. '북한은 미국이 무시할 수 없는 핵보유국'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도 미국 못지않은 핵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려 한 것이다.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서로 대화하는 것만이 북미관계의 진정한 해법'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국의 '핵 보유' 여부까지 공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 10일 이후 미국 외교라인의 태도는, 미국이 북한 외무성 성명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아예 관심조차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다가 아직까지도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저 '시간이나 때워 보자'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을 "별 것 아니라"며 평가절하 하는가 하면, 중국 등을 통한 외교적 방법으로 북한을 압박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북적대정책을 더 노골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북핵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북한을 압박해온 미국이 왜 갑자기 북핵의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그저 시간이나 끌려고 하는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북핵의 위험성을 외쳐온 미국은 그저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이었다는 것인가.

미국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국에게 유리할 것이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핵우산으로 동맹국들을 보호하며 도전을 불허하는 패권국가"라는 미국의 이미지는 이미 결정적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면 자국의 국제적 위상이 계속해서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미국의 핵우산을 신뢰해왔던 한국·일본·대만 등의 동북아국가들 역시 서서히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특히 일본인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지난 수년간 대북 강경여론이 절대적으로 지배해왔다. 북한에 대해 과도한 공포심을 갖고 있는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북미간의 공방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미국의 국력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도 조만간 미국의 핵우산에서 빠져나와 독자적인 핵무장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 시간이 지연되면 될 수록 미국의 대외정책은 그 근저에서부터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2기 부시 행정부의 동북아전략은 '중동문제와 유럽과의 관계개선이 해결될 때까지 동북아에서는 가급적 현상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미간 긴장이 고조되면 될수록 동북아에서의 현상유지가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까지 미국의 대외정책은 일대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북한의 핵능력을 무시하면서 시간을 계속 지연한다면, 북한은 '또 다른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미국이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을 깎아내리고 "북한에 핵이 없거나, 있다 해도 별 것 아닐 것"이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그동안 미국이 해왔던 언행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북한의 '후속조치'를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지금 미국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한 마디로 '북한의 핵능력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핵능력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북한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북한을 더욱 더 자극할 뿐만 아니라 상황을 극단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계속해서 미국이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북한은 핵능력을 입증하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북한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미국과의 평화공존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모색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핵능력이 입증된 다음에 북한과 평화공존 하는 것보다는, 아직 핵능력이 입증되지 않았을 때에 북한과 평화공존 하는 것이 '패권국가 미국'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에도 훨씬 좋을 것이다.

북한산 핵미사일을 미국 상공에서 목격한 후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는다. 그러므로 미국은 북한산 핵미사일이 자신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기 전에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북한이 이미 미국의 약점을 간파했다는 사실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지난해 11월 13일 LA 발언에서부터 11월 20일 산티아고 한미정상회담에 이르는 과정에서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의 '도전'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북한은 똑똑히 목격했다. 세계 패권국가라는 미국이 그동안 동북아 외교의 변방으로만 알았던 한국에게 '큰 소리 한 마디' 못 치는 장면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국력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핵무기 보유 사실을 정식으로 알려줌으로써 미국이 스스로 현실을 깨닫도록 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제2기 부시행정부 외교라인은 '대북적대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북한과의 외교공방을 계속하되 돌발변수만은 막자'는 대북정책을 수립하였다. 바로 그러한 정책이 지난 10일의 외무성 성명을 초래한 것이다. 북한은 하루라도 빨리 미국과 평화공존 하고 싶어 하는데, 미국이 '북한과의 공방을 계속하되 돌발변수나 막아보자'는 식의 정책을 취했으니, 북한이 '서운해'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무엇보다도 자국의 위신을 유지하고 싶다면, 제2기 부시행정부는 대북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대북적대정책을 명시적으로 포기한 다음에, 북한에게 당당하게 대화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만약 미국이 그럴 마음이 없다면, 북한은 조만간 자국의 핵능력을 입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책임 있는 '세계 경찰' 미국은 동북아가 또 다른 혼란에 휘말려들지 않도록 진지하고 성의 있게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종성은 월간 <말>의 동북아 전문기자이며, 김종성의 기사는 월간 <말> 혹은 <디지털말>과 <김종성의 중국외교자료실>(http://www.jkim0815.com)에 동시에 실리고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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