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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의 중심지에 있는 구명당 가게
낙안읍성의 중심지에 있는 구명당 가게 ⓒ 서정일
구할 '구'자에 목숨 '명'자를 쓴다는 구명당, 풀이해 보면 목숨을 구한다는 뜻인데 잡화를 취급하는 가게 이름치곤 너무 거창하다. 사실 이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논할 문제는 아니지만 필경 연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구명당 가게의 주인 송효종(66), 김견애(64)부부는 이곳에서 30여년을 살았다. 하지만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은 김씨의 선조 때부터다. 약방을 경영하시는 선친은 내로라하는 유지였다고 한다. 그때 약방 이름이 구명당이다.

약방이었던 흔적인 오래된 약 포스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약방이었던 흔적인 오래된 약 포스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 서정일
가게 안을 둘러보니 벽에 오래된 약 포스터가 붙어있다. 이곳이 약방이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몇십 년이 지났기에 버릴 만도 한데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한 포스터.

"아버님의 흔적인데 버릴 수가 없더군요."

김씨는 선친께서 남겨놓은 것을 함부로 처리하고 싶지 않아 소중히 모아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버리지 못한 이름이 구명당이다.

"그럼 유품을 많이 간직하고 있겠네요?"하고 질문하니 난리 통에 대부분 불에 탔다고 한다. "인민군들이 여기 동헌에서 6-7개월 주둔했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가 보다. 말을 잇지 못한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낙안읍성은 6·25 때 그들이 점령하여 동헌을 비롯한 각종 시설물을 상당 기간 사용한 곳이다. 넓은 평야가 있기에 식량확보를 위해 중요한 거점지였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낙안 면민들은 많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었다.

주춧돌임이 분명한 돌을 보면서 원님 집이었다고 얘기하는 김씨
주춧돌임이 분명한 돌을 보면서 원님 집이었다고 얘기하는 김씨 ⓒ 서정일
싸리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길옆에서 보던 것과는 딴판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몇 갑절 큰 넓이로 마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 필지의 집이라고 하는데 900여평이 된다고 하는 마당 한쪽엔 헛간이 자리하고 있고 건너편에 살림집이 또 하나 더 있다. 그리고 오른편으론 지금은 텃밭으로 사용하지만 집이 있었던 흔적이 또렷하다.

"여기 주춧돌들 보이지요? 여기가 원님 집이었다고 합디다."

가만히 살펴보니 예삿돌이 아니다. 널찍하고 평평하게 다듬은 돌을 보니 있었다는 원님 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길 건너편이 동헌이니 가장 가깝기도 하거니와 낙안읍성에서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그 얘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이곳 저곳에 주춧돌로 보이는 돌이 널려있는 김씨의 텃밭
이곳 저곳에 주춧돌로 보이는 돌이 널려있는 김씨의 텃밭 ⓒ 서정일
"반지도 나오고 별거 다 나와."

텃밭에서 일하면서 이상한 물건들을 많이 주웠다고 얘기하는 김씨. 소중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관해 뒀는데 그것 또한 사라졌다고 한다. 복원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원님이 살았던 곳만은 확실히 선친께 들었다면서 "언젠가는 좋은 곳이 되겠지요"하고 마무리한다. 그러면서 여기가 원님이 살았던 곳이니 지금은 내가 원님이지하면서 크게 한바탕 웃는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 하나 소중히 생각했던 김씨. 선친의 유품도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집 주위도 꼼꼼히 살펴보기에 찾아오는 이에게 이런저런 재미난 역사 얘기를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깊이 있는 역사가 되기 위해선 원님 터를 증언해 주는 김씨와 같은 토착민들이 떠나지 않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덧붙이는 글 | 함께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다큐남도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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