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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대체 : 5일 밤 11시]


▲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 그가 드디어 웃었다. 지율스님이 단식 100일만에 생명의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의 입을 통해서 온 세상에 알려졌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따뜻한 봄날 꽃을 찾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 같은 존재다."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이 지율스님을 일컬은 말이다. 법륜스님은 종적을 감췄던 지율스님이 거처를 정토회관으로 옮기면서부터 생명의 끝으로 치달려가는 한 존재의 손과 발, 그리고 목소리를 대신했다.

<오마이뉴스>는 지율스님이 100일 단식을 푼 뒤 하루만인 지난 4일 오전 법륜스님을 만났다. 그는 우선 정토회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지율스님은 "천성산이 자신의 몸을 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살아서 주장하면 안 되는 구나,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구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스님의 가족들도 죽음을 대비해 며칠동안 정토회관에서 함께 보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와의 약속과 합의사항이 담긴 한 장의 종이가 지율스님을 살렸다. 법륜스님은 이 종이의 여백을 지율스님의 소망과 천성산 생명의 뜻으로 채운 것은 조계종단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계 인사들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의 숨은 노력이었다고 말했다.

그중 한사람인 법륜스님 역시 지율 스님과 천성산을 살리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눈물로 호소했다고 한다. 다른 무엇보다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극단으로 치닫던 지율스님이 다시 회생하는 데 한몫을 했고, 천성산을 지키기에 나섰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명의 평화'와 '초록의 공명'이란 거대한 화두를 세상에 던졌다.

지율스님이 단식을 풀기까지 숨가빴던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법륜스님을 만났다.

- 지율스님이 지난 1월 21일 자취를 감췄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다. 입국하자마자 지율스님을 만났다고 했는데 당시 상황을 알고 있었는가.
"1월 24일 인도에서 돌아왔고 그날 저녁 도법스님, 문규현 신부님 등이 모여 지율스님을 살리기 위해 종교인 참회 단식을 시작했으며 나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나는 내 일정 때문에 단식만 하고 함께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25일 아침 이수일 전교조 위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빨리 지율스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이다. 24일 이수일 위원장이 먼저 경기도 모처의 수도원에 있는 지율스님을 만나 '여기서 스님이 생명을 놓으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며 단식을 풀 것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 말에 지율스님이 많은 부담을 느꼈는지 사람들 몰래 생활하던 수도원에서도 홀로 길을 떠나려 한다는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실제로 지율스님은 25일 오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의 차를 불러 떠났었다. 이수일 위원장이 지율스님에게 '나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간신히 설득해 발길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25일 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지율스님을 만나러 갔다. 난 그 때까지 지율스님이 서울에서 지내는 지 알고 있었다. 철저한 보안 속에 지율스님이 계신 곳에 도착해서야 그곳이 어디인지 알게 됐다. 이수일 위원장과 함께 지율스님을 만나 다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수도원을 떠나지 말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 하루에도 몇번씩 죽음과 생명 사이를 숨가쁘게 오가며 지율스님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법륜스님이 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벌어졌던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지율스님과는 어떤 인연으로 알게되었나.
"이 문제가 있기 전까지 지율스님과 두어 차례 만났을 뿐이다. 지율스님이 2차 단식으로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던 2003년 10월이었다. 이병인 밀양대 교수가 '지율스님을 만나 설득해 달라'고 부탁해 처음 만났다. 사실 그때까지 난 천성산은 물론이고 지율스님도 몰랐다.

그때 지율스님은 '10만 도롱뇽 소송인단'이 필요하다며 10만 명이 채워지면 단식을 풀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소송인단은 3600명이었고 10만명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사람 생명을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정토회 신도들에게 먼저 지율스님을 살려보자고 설득해 신도 중심으로 4일만에 10만 도롱뇽 소송인단을 꾸렸다. 그래서 지율스님은 단식을 풀었고, 그것이 지율스님과 나의 첫 인연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 난 외국에 나가 있어 지율스님이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하는 것도 몰랐다."

- 정토회관으로 지율스님을 모시고 온 과정을 설명해 달라.
"스님을 안전하면서도 사람들의 오해를 받지 않도록 공개된 장소에 모시자고 도법스님과 문규현 신부님과 논의했다. 지율스님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었기에 그것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1월 26일 지율스님을 설득해 정토회관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27일 <오마이뉴스>가 경기도 모처의 스님 거처를 확인하면서 일시적으로 지율스님의 마음이 흔들렸었다. 28일 다시 지율스님을 설득했고 29일 서울 정토회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스님을 안정시키는데 많은 애를 썼다."

- 지금까지 지율스님을 보살피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특별히 힘든 것은 없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 스님을 뵙게 해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난감했다. 여러 정부 관계자들이 찾아와 '지율스님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 우리를 대신해 지율스님을 설득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면담을 요청하는 바람에 지율스님이 정토회관을 떠나려는 마음까지 먹었었다. '내가 동물원 원숭이냐'며 많이 언짢아했다. 사전에 연락을 하고 찾아온 사람은 조승수 민주노동당 의원과 박세일 한나라당 의원뿐이었다."

- 천성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와의 협상 창구가 있었는가.
"단일한 창구는 없었지만 몇 차례 접촉은 있었다. 이수일 위원장이 청와대 이강철 수석을 만났고 상황 설명을 했다. 또한 도법스님과 총무원 사회부장 스님은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을, 나는 도법스님과 함께 총리실 민정수석 남영주 비서관을 만났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안되는 것은 안되는 일이니 지율스님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지율스님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고 정부쪽에서 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도법스님은 총무원장님께 읍소해서 원장스님께서 종단적 차원에서 지율스님 살리기 기도를 하기로 했고, 전국 비구니회도 지율스님 살리기에 적극 나섰다. 그 외 전교조를 비롯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각각의 채널을 가지고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또한 우리는 정부가 어려워 하니까 국회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 야당의 김덕룡, 박세일 의원에게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줄 것을 요청했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 모두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이해찬 총리는 최열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통해 면담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이 총리가 직접 정토회관을 방문하기 전까지 만나지는 못했다."

- 천성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번 지율스님 살리기에 처음 물꼬를 튼 것은 도법스님, 문규현 신부 등이 주도한 종교인 참회단식이었다. 특히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의 결단과 전국 비구니회의 참여등 불교계의 역할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교조, 도롱뇽의 친구들 등 시민사회 단체의 노력도 눈물겹다. 이번 지율스님 살리기는 누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기뻐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 문제로 오해와 갈등관계에 있던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희망이다. "

- 지율스님을 보살피며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었나.
"솔직히 단식 90일을 넘기면서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나 싶었다. 어떤 결론이 나든 설날 전에는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정토회 일정을 모두 취소하거나 설날 이후로 미뤘다. 지율스님도 천성산이 자신의 몸을 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살아서 주장하면 안 되는 구나,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구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지율스님의 가족들도 죽음을 대비해 며칠동안 정토회관에서 함께 보냈다."

▲ 법륜스님, "지율스님을 안전하고 공개된 장소에 모시자고 여러 사람들과 논의한 끝에 정토회관으로 모시게됐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언론에게 섭섭했던 점이 있었을 것 같다.
"추운 날씨에 기자들을 밤새도록 밖에서 떨게만든 게 미안하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많은 언론들이 잘 해줘서 문제가 잘 풀렸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일부 언론에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해서 대한다는 보도가 나갔다는 것이다.

지난 1일 정오 12시 이후 지율스님을 본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 지율스님이 이후의 모든 면회를 거부했던 것이지 우리가 사람을 차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해찬 총리, 김수환 추기경, 기타 여러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총무원장 스님과 비구니회 회장 스님의 위로 방문 때에는 '당신이 승려니까 어쩔 수 없다'고 강권했다.”

- 3일 내내 협상과 타협의 분위기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느낀 순간은.
"정부로부터 언질을 받지 않았지만 3일 아침에 느낌이 좋았다. 왜냐하면 이전과 다르게 건교부 장관, 행자부 장관은 물론이고 모든 정부 당국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다가 돌아갔다. 그 순간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높은 장벽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이해찬 총리가 방문했을 때 도법스님은 '내용만 수용해 주시면 형식은 구애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말이 정부가 부담을 더는데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 지율스님은 어찌보면 고독한 싸움을 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지율스님은 일단 운동가가 아니다. 그 분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자, 어떤 측면에서는 자기 스스로가 천성산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래서 천성산이 파괴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처음엔 지율스님과 환경단체들이 이 문제를 함께 풀려고 노력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멀어졌다.

지율스님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처럼 헌신적으로 싸우지 않는 환경·시민단체를 너무 정치적이라며 불신했고, 반대로 환경·시민단체들은 협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대책없는 사람으로 지율스님을 인식했다. 누구의 일방적 잘못은 아니고 다만 서로의 다른 질서와 환경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앞으로 서로 화해하는 과제가 남았다."

▲ "지율스님은 따뜻한 봄날 꽃을 찾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 같은 존재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지율스님의 고독한 싸움이 세상에 던진 화두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노동이 포함된 것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자연상태 그대로 있는 것을 하찮게 여기고 어떻게든 손을 대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이 투여됐다고 해서 무조건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손에 의해서 파괴되는 것도 많다. 자연 그대로 있는 것도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지율스님이 깨우쳐 줬다.

다만 개인적으로 지율스님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도 하나 있다. 모든 일은 한꺼번에 해결되지 않는 법이다. 지율스님처럼 미래를 경고하기 위해 자기 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순교자의 자세보다는 다른 자세의 운동을 펼쳤으면 좋겠다. 지율스님은 이 세상에서 이해관계를 가지고 산 사람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 물정을 좀 모르는 것이다. 스님과 세상의 간격이 좁아졌으면 좋겠다"

- 최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율스님을 모셨다. 어떤 분이라고 느꼈는가.
"따뜻한 봄날 꽃을 찾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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