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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 토론회에서 벌어진 자유토론 녹취록 일부입니다. '나르시스의 꿈 토론회 "문제의식 성공, 치밀한 개념 과제' 기사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토론자들의 강도 높은 비판과 겸손함으로 수준 높은 토론 문화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 - 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참여사회연구소 공동기획
1월 29일(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

사회자 : 홍윤기
발제자 : 김상봉
토론자 : 장은주, 박구용, 김선욱, 김세서리아, 정세근

사회자(홍윤기) : 크게 보면 세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한 서양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파악해야 되는가? 서양정신을 아주 난폭하게 요약하자면, 일종의 자기동일성에 입각한 주체의 끊임없는 반복적 재생산이고, 그것도 확대재생산이다. 이와 같은 ‘나르시스의 꿈’에 대한 비유에 대한 문제가 있고...

두번째 쟁점은, 그렇다면 ‘우리의 철학’이란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우리 자신이 그와 같은 입장에서 현재 우리 시민사회에... 진정하게 이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시민적 정신이라는 것은 어떤 콘텐츠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첫번째, 두번째 질문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당사자는 바로 제 왼쪽에, 김상봉 선생님의 해석에 대해 심대한 이의를 제기했던 영산대 장은주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질문을 제기한 것은 이병천 선생님과 제가 공동편집인으로 있는 <시민과 세계>의 고유한 관심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여기 토론자 분들, 실질적으로는 한분 한분들이 다 이 주제에 대해서 김상봉 선생님 못지 않은 내공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토론자로 몰아넣은 것은 (청중, 웃음) 전적으로 진행의 편의에 입각한 것이지 김상봉 철학의 헤게모니 구축을 위해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청중, 폭소) 청중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중략)

서양 정신이 과연 김상봉 선생님이 분석하신 것처럼 ‘나르시스의 꿈’, 즉 어떠한 경우에도 ‘주체의 자기확대’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것에 대해서 장은주 선생님이 어떻게 비판하셨냐 하면은... 그것(김상봉 선생님이 통렬하게 비판한 서양정신)은 이미 청산된 것이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한마디로 잘못 집은 서양정신이다. 따라서 이것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자, 이것에 대해 ‘1분 동안’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이 때 사회자는 시간 초과를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손에 든 시계를 쳐다본다).

김상봉 : (목소리 안 들림)

사회자 : 답변 안 하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청중, 웃음) 장은주 선생님의 비판에 답해주시면 됩니다.

김상봉 : 서양철학이 이제 ‘만남’에 대해서 ‘타자’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지만, 이전의 자기중심적 철학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내놓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 비판은 유효하다고 봅니다.

사회자 : 그러니까 서양철학 전체를 보았을 때 여전히 나르시스의 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답변인데, 이에 대해서 장은주 선생님 ‘30초 동안’ 반론해 주시기 바랍니다(이번에도 시간 초과를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시계에 시선을 집중한다).

장은주 : 서양정신 자체를 그런 방식으로 비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정신이라든지 (김상봉 선생님이 구사하는) 여러 개념들도 상당히 헤겔적이고 훔볼트적입니다.

사회자 : 서양정신을 접근하는 개념 자체가 대단히 부적절하고 외연이 애매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장은주 : 예, 상당히 서양적이라는 말이죠.

사회자 : 여기서 서양적이라는 말은 상당히 모욕적인 얘기죠. (청중, 웃음) 사회자 얘기는 전부 루즈 타임으로 계산하겠습니다. (청중, 폭소)

장은주 : ‘서양정신의 객관적인 현실태’, ‘객관적 실현’, 이런 식으로 보는 게 상당히 헤겔적인 개념들인데, 이렇게 접근하는 것도 상당히 서양적입니다.

사회자 : 그러니까 서양을 비판하는 방식이 너무나 서양적이다.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다음 김선욱 선생님의 지적은 조금 더 치명적일 것 같습니다.

김선욱 선생님은 김상봉 선생님의 서양정신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새로운가, 별로 새로운 것 같지는 않다는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런 지적 뒤에는 기독교도답게 “해 아래 새것은 없다”는 위로의 말을 해주셨습니다. (청중, 폭소)

김상봉 : 김선욱 선생님이야말로 매우 꼼꼼하게 비판을 해주셔서, 제가 비판적으로 상대를 한다기 보다는요... 선생님이 지적해 준 부분에 대해서 오히려 제가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당한 비판이라고 봅니다.

다만 오해에 대해 정정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결코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기술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서로주체성’의 발견이 한국적 현상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한국의 역사로부터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이끌어낸다고 할 때, 이것은 결코 국수주의적으로 뛰쳐나가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모든 지구상에서 억압받는 이들의 새로운 어떤 보편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판단의 지점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돌아보고 있는 지점은 ‘우리’ 속에 갇혀서, 이건 ‘우리만의 철학’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회자 : (시간 초과로 발언을 제지한다) 그럼, 이제 두번째 쟁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김선욱 : 저한테 발언 기회 안 주셨습니다.

사회자 : 아... 제가... 뭐, 그것 가지고 사회자를 비판하시면 제가 레드 카드를 내미는 수가 있습니다. (청중, 웃음)

김선욱 : 김상봉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과연 새로운 거냐 하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저는 사실은 (김상봉 선생님의 작업이) 대단히 새롭다고 봅니다. ‘서로주체성’에 대한 개념이 굉장히 공감이 가요. 예를 들어서 ‘커뮤니케이션’이 하버마스가 얘기하는 거랑, 아렌트가 얘기하는 거랑, 테일러가 얘기하는 게 다 다르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것과 또 다른 ‘만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정말 자기상실을 경험하지 않고, 정말 처절한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만날 수 없는 그런 세계를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드러내는 데, 그 방식이 장은주 선생님이 지적하셨던 것처럼 서양적이지만, 지금 이 이상의 도구가 어떤 것이 있겠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 더 말하자면... 노무현 대통령이 박정희를 바라보는 한 박정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얘기처럼, 자꾸 우리가 ‘우리 철학’, ‘우리’하면 ‘우리’를 못 만납니다. 그것을 초월하고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깊이 들어가면, 그 때 ‘우리’가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김상봉 선생님이 하고 있는 작업은 정말 좋은 ‘우리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자 : 상당히 공감이 가는 말을 하셨기 때문에 시간을 조금 더 드렸습니다. 자, 그럼 두번째 쟁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김상봉 선생님은 ‘자기상실’을 경험한 우리의 정신이 나르시스적인 서양정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진단을 하셨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박구용 선생님은 ‘자기상실한 우리’를 갖고 과연 ‘모두의 철학’이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즉 ‘상처입은 우리’를 너무 붙잡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었습니다.

김상봉 : 이 문제는 시간을 1분을 더 주셨으면 합니다.

사회자 : 답변의 질에 따라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청중, 웃음)

김상봉 : 박구용 선생님이 비판하신 것은 전에도 책(<우리 안의 타자>박구용 지음)으로 읽었습니다. 이 책은 여러분들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호객 행위를 좀... 삐끼라고 하죠. (청중, 웃음)

책에서 저를 비판하는 부분이 대단히 가슴이 아팠습니다. 박구용 선생님이 바라보고 있는 문제의 지점이 저한테 공명을 불러일으켰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밖의 타자’에 대해서 신경쓰다 보니 ‘우리 안의 타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돌릴 줄 모른다는 질책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저한테 많은 자기반성을 하게 했습니다.

최근에 이런 비평의 글을 읽었습니다. ‘김상봉의 철학은 피해자의 철학이다’. 이걸 나쁘게 해석하면... ‘자기 아픈 것만 알지 자기 속에 남이 아프고 울고 있는 건 모른다’라고 하는 비판으로 읽었습니다. 박구용 선생님이 지적하신 부분도 비슷한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저를 돌이켜 보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만 두가지만 얘기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청중, 웃음) <나르시스의 꿈>에서는 분명히 그 측면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제가 칸트의 주체성이론을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쓴 <자기의식과 존재사유>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서로주체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우리’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우리’라는 말은 절대로 ‘확장된 주체성’, ‘집합적 주체성’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하려고 했던 ‘우리의 철학’은... ‘우리’는 언제나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리 주어져 있는 게 아니죠. 이 부분에서 제가 자꾸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누구를 만나서 어떤 체험을 함께 나누느냐에 따라 ‘우리’가 달라집니다. 그 안의 나도 변해가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우리’는 언제나 자기 속에서 타자를 품은 ‘우리’입니다. 그런데 타자를 품는 방식이 서양처럼 자기의 거울 속에서 비친 타자를 품는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타자를 품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사회자 : 답변이 무난했기 때문에 시간을 더 드렸습니다. 한가지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나르시스의 꿈>에서 집중적으로 강조했던 ‘상처입은 우리’라는 개념만으로는 박구용 선생님이나 장은주 선생님이 얘기하는 지평으로 도달하는 데 부족했다는 것을 자인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성이 이렇게 긴 발제(원고지 600장)로 나온 것입니까?

김상봉 : 예. (청중, 웃음) 박구용 선생의 비판을 받으면서... 제가 자백을 하고 싶은... 저는 피해자 입장에서 존재를 사유하려 하고 했습니다. 피해자는 어디서도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피해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철학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가 지나쳐서 잘못된 피해자 의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로는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의 타자’를 제대로 볼 수 없겠냐는 질책을 잊지 않겠습니다.

사회자 : <나르시스의 꿈>과 달리 이번에 쓴 발제글에서 자기 속에서 타자를 품는 우리라는 쪽으로 긴장도가 좀 이완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박구용 선생신과 장은주 선생님에게 각각 발언 부탁드립니다. 먼저 박구용 선생님.

박구용 : 고백을 하자면요... 제가 대한민국에서 김상봉 선생님의 글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으로 자부합니다. 김상봉 선생님 책을 읽을 때마다 흥분이 됩니다. 문제의식의 근원이 굉장히 저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생각들이 김상봉 선생님과 제가 공유하는 부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국내 철학자의 책이 저를 흡입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래서 시비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다.

사회자 : 그래서 칭찬하는 사람이 더 무섭죠. (청중, 웃음)

박구용 : 제가 은유를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제가 1층의 캄캄한 연구실에서 혼자 있는데... 공부하다가 연구실 밖을 쳐다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보면 알겠지만, (토론회가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어 창을 통해서 밖이 보이지 않고, 다만 토론회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밖이 보고 싶어서 창을 쳐다보지만 창에 비친 저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여학생이 저한테 와서 그러더라구요. 저를 사모해서 저를 창 밖에서 봤다는 거예요. 매일 밤마다. (청중들 “우와~”) 제가 밖을 쳐다보는 그 때에도... 그래서 이게 사랑일까?

사회자 : 대한민국은 자유 사회기 때문에, 물론 착각도 자유입니다. (청중, 웃음)

박구용 : 그 여학생이 저를 사랑한 걸까?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만남’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런 은유의 핵심적인 것은 서양철학의 나르시즘은 항상 에코와 같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안의 나르시스가 있다는 거죠.

그런 것을 동시에 보면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폭력성을 극복해 내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하는 문제의식이 김상봉 선생님과 같다고 봅니다. 그런 데 대해서 가장 진지하면서도 철학적으로 가장 수준 높은 논의를 하신 분이 김상봉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중략)

사회자 : 이제 세번째 쟁점입니다. 김상봉 철학이 인구에 회자되게 만든 것이 일종의 ‘단어정책’인데... ‘유아론’, ‘상호주관성’이라고 철학자들이 이런 재미없는 말로 쓰던 것을 ‘홀로주체성’, ‘서로주체성’이라는 생생한 우리말로 바꿈으로서 ‘말장사’에 성공했습니다. (청중, 웃음)

이 ‘서로주체성’에서 핵심은 타자와의 연관문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김선욱 선생님이 ‘서로주체성’이 타자에 대해서 구별적인 인식이 없다, 따라서 타자에 대해서 좀 더 분별적인 인식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타자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서로주체성’이라는 말 자체도 대단히 개념적으로 분별돼 있지 않고, 어느 면에서는 그럴 듯한 우리말의 이미지에 호소한다는 혐의까지 씌어서... (청중들 웃음) 김상봉 선생님께서 타자인식의 무분별성에 대해 발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상봉 : 가장 어려운 지점인데요. 인식은 자동적으로 사물화시킵니다. 사물화시키지 않는 인식이 가능한가? 그러니까 인식 그 자체가 관찰이 아니라 ‘만남’으로 발전할 수가 있는 건가? 하는 게 저 물음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고민하고 있는 게 그겁니다. 논리적인 사유, 사물에 대한 인식, 이것이 전부 사무적인 인식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 져 있습니다. 서구의 인식이. 인격적인 ‘만남’을 모델로 해서 발생하는 지식이 과연 가능한가, 인식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김선욱 선생님이 지적해주시기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문제인데, 부끄럽게도 아직은 아무 것도 내놓을 게 없습니다.

김선욱 : 김상봉 선생님의 문제만이 아니라 저도 고민하는 부분인데, 새로운 인식론이 필요하죠.

김상봉 : 예, 그겁니다.

(중략) (아래는 박구용 선생님의 비판 “이방인으로 살아라”에 대한 김상봉 선생님의 답변)

김상봉 : ‘이방인’으로 살아갈 경우에는, 그건 ‘거류민’의 삶입니다.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류민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방인으로 살 때 문제가 될 때 더불어서 형성을 못 합니다. 그 지점은 한 번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회자 : (‘나르시스의 꿈’이) 우리를 이렇게 장시간 앉아 있게 할 만큼 문제 자체를 만드는데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개념을 가다듬고 그 안의 인식을 더 치밀히 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상당히 상쾌합니다. (청중, 웃음) 기존의 학계 관행에 비교해서는 조금은 더 재미있게 필로소피칼 토크 게임 비슷하게 진행을 해 보았습니다. 청중 여러분들은 재미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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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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