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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표 주사
ⓒ 국회 홍보담당관실
속기사들은 의원들이 발언한 전문용어를 다 알아듣는 것일까? 의원들이 틀린 표현을 써도 그대로 기록하나? 국회에서 몸싸움이나 설전이 벌어지면 그 내용을 어떻게 기록하나?

국회 공보관실에서 발행하는 <국회보> 2월호는 속기사로 30년 근무한 홍기표 주사의 인터뷰를 실어 국회 속기록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홍 주사는 "속기원고 취합, 행정 등의 일에 파묻히기 보다 차분하게 속기 편집하는 게 적성에 맞다"며 사무관 시험을 보지 않고 주사로만 20년을 살았다. 홍 주사가 맡은 속기 편집은 속기사의 오류를 바로잡아주는 업무다.

예를 들어 "이 정부로부터 받는 혜택과 권리는 어느 지역에 살든 동일하게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정입니다"라는 문장을 홍 주사는 "그것이 정의입니다"로 바로잡아준다. 속기 편집을 위해서는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해가며 오류를 잡아내야 한다.

"과수댁 살강 밑에는 탑새기만 수북이... 탑새기??"

속기편집의 장인답게 홍 주사는 인터뷰에서 여러 가지 속기 예문을 들고나와 속기 방법을 전했다. 홍 주사에 따르면 속기록 작성의 대원칙은 '말한 그대로'이다. 실수는 실수대로, 거짓말은 거짓말대로 적는다.

그 '말한 그대로' 적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홍 주사도 초년병 시절 장관의 답변을 듣고 'OK 탄광'이라고 적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옥계탄광'이었다고 한다. 아는 만큼 들리기 때문에 속기사의 청취능력에는 풍부한 어휘력과 폭넓은 이해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홍 주사의 주장이다.

홍 주사는 "어휘력이 부족하면 '이차계산'을 '2차계산'으로, 'AT&T'를 'ATNT'로 기록할 수밖에 없고, 이해력이 부족하면 '가양대교 밑 한강둔치 지하수'를 '가양대교 및 한강둔치 지하수'라고 적게 된다"며 "속기사는 기능인이 아니라 지식인이 앉을 자리"라고 강조했다.

게다가 최근은 신조어와 약어, 전문용어가 쏟아져 나온다. 홍 주사는 최근 나타난 약어로 '외투기업'을 꼽았다. '외투기업'은 '외투를 만드는 기업'이 아니라 '외국인 투자기업'의 약어다. 플리바기닝(유죄협상제도)나 인프라스트럭처(하부구조) 등의 외래어도 심심치 않게 속기록에 오른다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못 알아듣거나 확신이 안 서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발언한 본인에게 확인해서 보완한다. 그러나 5공화국부터 녹음기를 보조로 쓰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녹음기가 도입된 것은 당시 기성 정치인들의 발이 묶여 신진 정치인이 들어오면서 원고를 써서 고속 낭독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몇몇 의원들은 원고를 속기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때로는 의원들이 잘못된 어휘를 쓰는 경우도 많다. 홍 주사는 "80년대에는 한자를 잘못 읽는 경우가 많았고 질의서에 흘려 쓴 글씨를 잘못 읽고 엉뚱하게 발언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아주 명백한 실수일 경우, 우리나라에서 고쳐주지만 미국은 그대로 속기하면서 독자들을 위해 주를 달아준다고 한다.

홍 주사는 특별히 속기하기 어려운 의원으로 '유신 때 박모 의원'을 꼽았다. "과수댁 살강 밑에는 탑새기('먼지'라는 뜻의 충청도 사투리)만 수북이 쌓여 있고" 등 속기하기 힘든 단어만 정확히 골라서 발언하는 충청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홍 주사는 고향이 충청도여서 말을 알아들었지만 같이 속기한 사람은 탑새기가 뭔지 몰랐다고 한다.

"속기전통 일제 때 단절... 노 대통령 의원시절 격려 기억에 남아"

▲ 이진섭 공보관(오른쪽)이 홍기표 주사를 인터뷰하고 있다.
ⓒ 국회 홍보담당관실
홍 주사는 속기사라는 직업에 대해 "사관들은 정확한 사초를 남기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임금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고 조선왕조실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기록문화를 자랑했는데 그런 전통이 일제시대에 완전히 단절됐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속기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속기사가 국회 출입기자 출신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국회에서도 속기사에 대한 대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홍 주사의 지적이었다. 언젠가는 한 국회의원이 속기사에게 "그까짓 서기는 배워 뭐 하냐"고 했다고 한다. 홍 주사는 "다만 13대 국회에서 당시 의원이던 지금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 이상수 전 의원이 수고했다고 식사대접과 격려를 해준 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홍 주사는 "서양에서 녹취가 속기를 대신하고 있는 추세를 볼 때 속기나 속기사는 앞으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면서도 "녹음 역시 녹취된 음성언어를 다시 일반문자로 풀어내야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기계가 나올 때까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은 남는다"고 전망했다.

홍 주사는 "속기사양성소에 있을 때 손이 빠른 사람은 1분에 숫자를 1부터 120∼130까지 쓰는데 저는 기껏해야 85까지밖에 못 쓰겠더라"며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손 빠르다고 해서 반드시 속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고 부호식별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를 맡은 이진섭 공보관은 '날치기 도중의 속기'에 대한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의장석, 위원장석을 서로 점거하려고 난투극을 벌이는 와중에 손바닥이나 책으로 사회봉을 대신하면서 "통과됐습니다" 하는 상황에서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할 테고, 나중에 각 당에서 "통과됐다" "안 됐다"를 속기 직원들에게 기술할 것을 강요할 때도 비일비재하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에 홍 주사는 "제가 일일이 다 말할 입장이 아닌 것 같다"며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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