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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불이문
건봉사 불이문 ⓒ 김선호
오랜만에 눈이 내린다.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눈은 그러나 새벽부터 내렸던 탓인지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거실 유리창에 달린 커튼을 한껏 젖히고 아침을 먹으며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게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올 겨울 눈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이었더니 오늘(1월 16일)은 그간에 못 내린 눈이 한꺼번에 쏟아지려나 보았다.

차를 한잔 끓이고 창가에 앉아 눈 오는 밖을 바라본다. 바람에 섞여 든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맴돌다 땅으로 떨어진다. 12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난무하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예가 고립무원이구나, 싶기도 하다.

건봉사 부도밭
건봉사 부도밭 ⓒ 김선호
차가 다니는 도로 말고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간간히 차가 지나가며 여긴 결코 고립무원이 될 수 없다는 걸 일깨워 주지만 하늘 쪽으로 눈길을 향하면 쏟아져 내리는 눈송이 밖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 구경이 새삼스럽게 신기롭다. 눈이 없는 겨울을 보내면서 아이들은 불평을 해댔다. '겨울이 다 끝나 가는데 왜 눈이 안 오는 거냐?'고 하늘을 보며 원망을 했다. 눈 쌓인 겨울을 비추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아, 저기 가서 실컷 눈을 만져 보았으면…….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눈을 찾아 여행을 떠났던 게 지난번 강원 산간지방에 '폭설주의보'를 발령하던 날이었다. 사실은 나 역시도 눈이 보고 싶었다. 이토록이나 눈 없는 겨울이 참으로 낭만이 없어서 답답할 지경에 이른 때였다.

먼저 강원도 북쪽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남쪽에서 가장 북쪽에 인접한 절이 건봉사라는 절이다. 이 절은 북한 땅에 있는 금강산 자락에 기댄 오롯한 절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절이 주는 느낌은 애절함이 있었다. 눈이 오려는지 건봉사 불이문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나그네 몇 명이 들릴까 말까한 절에 우리가족을 반가이 맞은 건 절 집개 , 백구……. 하나 이 개는 저 만치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뿐 가까이 가려 해도 다시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서 우리를 따라왔다.

한국전쟁 이후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절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다. 전쟁후 오로지 남은 불이문에 새긴 금강저의 문양이 저 홀로 또렷하다. '절대,'진리'를 뜻한다니 이 문을 통과하면 절대 진리에 가까워 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은 얼마나 얄팍한가,

2005년1월 16일 강원산간 지방에 폭설주의보가 내렸다
2005년1월 16일 강원산간 지방에 폭설주의보가 내렸다 ⓒ 김선호
눈이 내리기 전, 흐릿한 하늘을 가진 겨울 산사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만 일없이 지나갔다. 새로 지은 대웅보전 건물과 산신각 중간에 서 있는 팔상전에 서서 내가 서있는 위치를 가늠한다. 금강산 자락이라…….

한때는 200여기의 부도와 탑비로 웅장한 규모였을 건봉사 부도 밭에 지금은 50여기만 모셔져 있으나 그것도 장관이었다. 이 웅대한 부도 밭을 사진 속에 담는 일이 버거워 이리 저리 자리를 바꾸는데 하늘에서 드디어 눈이 내렸다. 한 송이 두 송이, 천천히 눈이 내렸다. 7번 국도를 타고 동해로 가는 길에 눈송이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산을 넘자마자 멀리서 파도가 아우성치는 모습이 보인다.

하늘에선 하얀 눈이 내리고 바다는 하얗게 거품을 물면서 몰려오고 있었다. 눈 내리는 찬 기운 속으로 비릿한 바다 냄새가 바다보다 먼저 코끝에 와 닿는다. 파도를 일으키며 몸을 뒤집는 바다를 따라 나란하게 해송이 서있다. 바다를 향해 서있는 검푸른 해송과 하얀 파도를 가진 바다의 모습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달려 거진포항에 닿았다. 그새 길에 눈이 쌓였다. 거진포항에 저녁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노을 진 바다 위로 희미한 해그림자가 물들고 바다갈매기가 몇 마리 낮게 물위를 떠돌고 있었다. 물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따라 방파제에 섰다. 파도는 더욱 거칠게 몸을 뒷집으로 하얀 물거품을 만들어 냈다.

거대한 자연의 힘이 느껴지고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멀리 남아시아 해일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해변에 쌓인 눈을 모아 아이들이 눈송이를 던지며 놀고 있었다. 더 놀고 싶다는 아이들을 데리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바닷가 식당에 들렀다. 눈송이는 여전히 한가롭게 날리고 저녁을 먹는 동안 바다는 짙푸른 어둠에 잠겨 들었다. 밤으로 갈수록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고 뉴스는 앞을 다퉈 진부령이며 미시령과 한계령에 내린 대설주의보를 예고하고 있었다.

2005년1월16일 거진포항에 내리는 눈
2005년1월16일 거진포항에 내리는 눈 ⓒ 김선호
진부령을 넘어서 동해바다에 왔는데 진부령을 넘어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량이 통제된다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양양으로 향한다. 눈이 내리지 않은 낙산해변가에 숙소를 정하고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리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내렸는지 세상이 하얬다. 그러면 눈 덮인 낙산사를 볼 수 있으리라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니 비를 동반한 바람이 앞을 막아선다.

썼던 우산이 뒤집어지고 그만 돌아가라 그랬는지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다. 낙산해변으로 발길을 돌린다. 눈 쌓인 해변에서 하얗게 파도를 내품는 동해바다를 바라보는 걸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거칠게 몸을 뒤채며 끝없이 파도를 만들어 내는 겨울의 동해바다는 쓸쓸했다. 그 쓸쓸함을 간직한 겨울바다는 쓸쓸함으로 아름다웠다. 진정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은 겨울바다를 찾는다고 했던가.

2005년1월16일 눈덮인 대관령에서
2005년1월16일 눈덮인 대관령에서 ⓒ 김선호
돌아오는 대관령 길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차량이 통제된 진부령과 한계령을 피해 대관령에 들어선 차량들이 길게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진부령이나 한계령이 80센티 가까이 되는 눈에 비하면 대관령의 37센티의 눈은 그래도 차량의 소통이 가능했던가 보았다. 밤새 제설차량이 동원되어 눈을 치운 흔적이 도로 갓길에 그득히 쌓여 있었다.

천지사방이 눈의 세상이었다. 대관령에 발이 묶여서야 비로소 눈의 세상에 푹 파묻히는 뜻밖의 행운(?)을 맛보았다. 돌아보면 그랬다. 차안에 갇혀 꼼짝달싹 못해 답답한 시간들이 돌아보면 천지사방이 눈에 덮인 설원의 세상에 파묻혔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차들이 길게 줄을 잇듯 서있자 아이들이 하나둘 차안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차가 잠깐 가고 오랫동안 서있기를 반복하는 동안 어떤 아이는 제법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고 어디서 구했는지 숯 검댕이 같은 나뭇가지로 눈까지 만들어 놓았다. 뒤따라온 차안의 사람들은 아마도 누군가 만들어 놓은 커다란 눈사람을 보며 잠시나마 행복한 웃음을 짓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겁도 없이 도로에 뛰어 들어 눈을 실컷 만져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이었을 뿐, 겁 많은 어른들은 차안에서 눈을 '감상'하고만 있었다. 나 역시도 차안에서 카메라의 셔터만 연신 눌러댔다. 어디를 찍어도 그대로 한 폭의 겨울풍경화였고, 한 장의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었다.

몇 시간이었는지 도대체 가늠할 수가 없을 만큼 대관령에서 지체된 시간동안 그렇게 눈에 덮인 세상과 행복하게 파묻혀 있었다. 강원도를 벗어나니 거짓말 같은 눈의 흔적이 지워진 길들……. 아, 잠시 꿈을 꾸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었다.

2005년1월16일 눈덮인 대관령
2005년1월16일 눈덮인 대관령 ⓒ 김선호
오늘은 우리 마을에도 눈이 내린다. 짙푸른 전나무 잎사귀에 조용히 내려앉는 눈이 하얀 눈꽃을 만들었다. 멀리 학교 운동장에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이 보인다. 눈이 내려 평화로운 세상에서 아이들이 노니는 모습은 아름답다.

오랜만에 내리는 오늘 눈이 더 많이 내렸으면 싶다. 그래서 때 아닌 겨울가뭄소식도 거둬 가고 모처럼의 눈 구경에 신이 난 아이들에게도 올겨울 멋진 추억의 하루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기약도 없이 눈을 찾아 북쪽으로 그리고 동해를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건봉사에서 눈송이를 만나고 동해바다에서 함박눈을 맞고 대관령에선 설원속에 파묻혔던 행복한 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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