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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에 지진해일로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큰 피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부터 저는 인도네시아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저를 부채질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와서 일하다가 간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연말부터 제가 인도네시아로 오면 자카르타 공항에 마중 나올 테니, 같이 아체로 가자고 줄곧 전화를 해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국해외봉사단모임(KOVA)로부터 인도네시아 지진해일 피해 복구를 위한 긴급 구호 팀으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았고 저는 그 제안에 선뜻 응했습니다.

구호 팀은 총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워낙 긴급하게 꾸려지다 보니, 일정 안내나 사전 준비가 미흡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들 현지 생활 경험이 있고, 일정 기간 동안의 희생을 감수하고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누구 하나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간호사로 갔던 한 친구는 모 종합병원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면접 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발을 강행했습니다.

출발이 5일에서 12일로 늦춰지고, 도착공항이 자카르타에서 메단으로 바뀌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저를 기다리던 친구들은 할 수 없이 전화상으로 잘 다녀오라는 인사들을 해 왔습니다.

출발 하루 전 메단 출신인 웬기앙(Wengiang)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메단에 도착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동생을 연결시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 자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팀으로 가기 때문에 직접 도움을 부탁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연락처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없어 인도네시아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웬기앙의 동생 아위(Awi)였습니다. 아위는 메단 현지는 지금 각국 구호팀들이 매일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비행기 연착이 잦고, 숙박시설이나 교통시설을 이용하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비행기 편명만 알려주면 두 대의 차량을 준비해서 마중을 나오고, 숙소를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인천을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저는 후배 봉사단원들이 메단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아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아위에게 전화를 해서 번거롭게 마중 나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전해줬습니다.

아위는 당시 자신의 가구공장에서 100여명의 이재민들을 돌보고 있어서 그 일만도 버거웠지만, 형이 일하고 있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적극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했던 것인데, 호의를 마다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위는 한국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를 자주 왔다 갔다 했다고 했습니다. 한국도 오가고 싶었지만 출입국 입국심사에서 입국 거부됐던 친구의 경험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서 시장 조사를 한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포기했던 경험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에 많은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이 미등록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처럼 사업을 하는 사람들마저 잠재적으로 불법체류를 할 사람으로 여기고 입국거부를 했던 한국 출입국심사에 대해 불만이 대단했습니다. 그런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긴급 구호팀으로 오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내놓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메단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아체로 떠나면서, 귀국하기 전에 연락하겠다는 연락을 아위에게 했고, 아위는 꼭 다시 연락 주라고 했습니다.

12일간의 아체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을 위해 메단에 오던 날, 핸드폰을 갖고 있던 한국국제협력단 직원에게 아위로부터 전화가 수차례 왔지만, 전화 사정이 좋지 않아 연결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메단에 도착하고 난 지, 네 시간 정도가 지나서 다시 전화 연결이 되었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위는 자신의 차를 끌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위는 아체에서의 제 생활을 물었고, 저는 아위의 메단 생활을 물었습니다. 처음 대면하는 것이었지만, 서로가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헤어지면서 아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도 난리를 겪고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있어요. 그 사람들 도와주는 것이 제가 할 일이죠. 사람은 다 같은 이주민이니까요”

아위가 자신이 난리를 겪은 바 있다는 것은, 97년 수하르토 대통령 하야시기에 자신의 공장과 집을 과격 무슬림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잃고, 말레이시아로 피난 갔던 경험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위는 어쩌면 아체지역의 지진해일 피해를 보면서, 인간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던 경험이, 그와 비슷한 혹은 더한 경험을 당한 이들을 남의 일인 냥 지나칠 수 없었던 듯합니다.

저는 아체에서 2주 동안 ‘다른 사람의 고통을 멀리서 지켜봐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인류애를 실천하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는 자신에게 큰 고통을 안겨줬던 사람들마저 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가 아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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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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