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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로울러 위에서 균형잡기 묘기를 하고 있는 모습
움직이는 로울러 위에서 균형잡기 묘기를 하고 있는 모습 ⓒ 동춘서커스단
서커스는 요즈음처럼 농한기에 주로 찾아오곤 했다. 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에 쉬어가는 프로그램으로 장기자랑이 있었다. 당시 마을 대항 노래자랑이 있었던 터라 아쉬운 3등짜리 무명가수들은 “이번에 1등은 내 차지다”라고 벌렸고, 1등짜리 가수는 “이번에도 장기자랑은 내 차지”라며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매사가 그렇듯이 경쟁에는 다크호스가 있는 법. 때로는 그 마을에서 느닷없이 서커스 1등 가수가 출현했다. 왜 입상하고 낙선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국 유랑 극단 트럼펫 연주자와 사회자 마음이었으므로…. 서커스 노래자랑에서 등수 안에 들면 주로 노란 양푼이나 참기름, 빨랫비누, 조미료, 치약과 칫솔을 주었다. 운수 좋은 날에는 상품으로 밀가루 한푸대, 프라이팬 등 살림살이로 요긴한 것들이 나오기도 했다.

가설무대 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에서 조무래기들까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풍경은 그 시대 우리네 서민들의 자화상이었다. 우선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이 희망이었고 그렇게 버티며 사는 일이 다행이라고 믿었던 시절이다. 그래도 서로 다독이며 맺은 끈끈한 삶과 훈훈한 가족애를 바탕으로 농촌 생활을 해가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변함없는 우리 농촌 문화의 전통이며 매력적인 문화다. 전깃불이 없던 시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개떡을 부쳐 먹고 고구마에 싱건지 국물을 마시고 호롱불 아래 화롯가에 홍시 몇 개 두고서 그보다 더 어렵던 시절의 이야기를 “옛날~ 옛날~ 이야기”로 시작하며 밤을 지새웠던 시절이다.

어렵지만 저마다의 가슴에는 “그래도 여유는 갖고 살자”는 다짐이 있었다. 특히나 눈의 띄던 가훈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었다.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지나는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곡괭이, 쇠스랑을 찍어 쌓는 이웃 농부들을 보면 으레 이런 덕담을 나누었다. “여보게, 쉬엄쉬엄 하게나. 다~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건강이 최고인 것이여~~.” 그만큼 낙천주의 경향이 강했다.

그런 저력의 농촌문화가 강물처럼 흘러갔다. 풋풋한 인정과 애환이 어우러져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곳이 농촌이었고 그런 서민들의 삶의 속내를 꺼내 속으로 다지던 고통을 웃음과 눈물로 연출하던 무대가 바로 서커스였다.

곡예와 신파극에 울고 웃던 시절

마을 공터에 가설무대 뼈대를 설치 중인 모습
마을 공터에 가설무대 뼈대를 설치 중인 모습 ⓒ 동춘서커스단
당시 <이수일과 심순애> <검사와 여선생>은 천막에 쪼그려 앉은 시골 사람들의 가슴을 무던히도 쥐어짜게 했다. <어머니> <불효자는 웁니다> <홍도야 울지 마라> 등은 서민들의 애환을 너무나 진솔하고 강력하게 표출해 가설무대 안 사람들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대표적 신파극이었다. 아마 유랑극단이지만 나름대로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그 한을 이겨내려는 혼(魂)으로 연출하던 작품의 상징성을 그려낸 것이 아니었을까.

아슬아슬한 묘기는 참으로 기똥찬 대목이 있었지만 어린 아이의 몸매를 보고 요즈음처럼 “잘 빠졌다” “얼짱이다” “몸짱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못 먹었으면…” “못 먹고도 저렇게 기막히게 묘기를 해내다니…”라며 모든 행동 하나 하나를 자신들의 삶처럼 여겼다. 그러면서 가난하지만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연약한 자의 편에서 안쓰럽고 자랑스럽게 박수를 쳤던 것이다.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던 것이다.

어디 사람뿐이었으랴. 원숭이가 나타나 철없는 애처럼 무대 위에 설치물을 이리저리 헤집고 나면 곡예사가 야단을 쳤고 원숭이는 이내 애교를 떨었다. 실수와 용서의 차이를 읽어 내던 시골 사람들은 넉넉한 박수로 원숭이를 격려했다. 아이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에서 특히나 원숭이에게 애정을 보였다. 그러게 배꼽 잡고 웃는 사이에 불현듯 부대가 무너질 것만 같은 거대한 코끼리가 나타난다. 순간 가설무대 안은 침묵이 흐른다. 대반전이다. 그런데 이 코끼리가 물구나무를 선 채로 긴 코에 하모니카를 감아 물고 연주를 한다.

거대한 동물이 애잔한 하모니카를 부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즐겨 부르던 우리들의 노래이다. 즐거운 동요 한곡조 뽑는가 싶더니 다시 슬픈 아리랑을 불러제낀다.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 갈채를 보낸다. 모두가 스스로 감동의 물결에 휩쓸려 있었다.

일본 멸시에 최초로 생긴 서커스단과 곡예단의 애환

70년 유랑극단 '동춘'을 이끌고 있는 박세환 단장이 자택에서 잠시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은 작년 가을경 찍은 것이다.
70년 유랑극단 '동춘'을 이끌고 있는 박세환 단장이 자택에서 잠시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은 작년 가을경 찍은 것이다. ⓒ 박상건
그렇게 우리 나라에 선보였던 최초의 서커스단이 ‘동춘 서커스’이다. 얼마 전 이 서커스의 대를 잇고 있는 박세환(62) 단장을 만날 수 있었다. 묘한 인연이었다. 바로 이웃마을에 살고 있었다. 이 기사는 이웃사촌 박세환 단장과 틈틈이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동춘 서커스는 1925년 박동춘씨가 일본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인 멸시가 심해지자 한국인 30명을 모아 ‘동춘 서커스단’을 창단한 것이 시초이다. 창단 2년 후 목포시 호남동에서 첫 공연을 시작으로 70년대 초까지 대호황을 누렸고 단원들만 250여명이 넘었으며 영화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서영춘,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장항선, 가수 정훈희씨 등 스타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TV 등장으로 서커스는 사양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굳이 천막을 찾지 않아도 세계의 서커스를 브라운관을 통해 볼 수 있었고 젊은이들은 극장을 찾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박세환 단장은 63년 MBC 탤런트 공채시험에 합격했으나 만신창이가 된 이 서커스 현장을 두고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종갓집 종손으로 태어나 유별나게 할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서커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3년 열아홉살 때의 일이다. 가설무대에서 구성진 트럼펫 소리와 귀신 같은 곡예사의 몸놀림에 그만 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극단에 들어가 잔심부름과 청소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당원들이 잠든 시간이면 천막 귀퉁이에서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접시 돌리기, 공중곡예 등을 익혀 나갔다.

입단 2년 정도 지났을 때 사회자가 그를 무대로 불러 노래나 한곡 뽑으라고 했다. 그것이 첫 무대였다. 40명 안팎의 적은 관객들이었기에 사회자가 풋내기를 무대에 서게 한 것. 그러나 그는 쏟아지는 관객들의 시선에 압도돼 그만 몸이 꽁꽁 얼어 버렸다. 그렇게 쫓기다시피 첫 무대를 내려왔다. ‘첫 무대의 실패’에 대한 기억은 두고두고 쓴 약이 되었다. 밤을 지새며 연습 벌레가 되어 갔다. 무대에 올라가는 횟수가 늘어 갈수록 타고난 외모와 말 솜씨, 노래 실력 덕분에 단원과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동춘의 명사회자가 되었다.

줄타기하다 죽고 영상매체 출현으로 존립자체마저 흔들

외발자전거를 탄 채로 다섯개의 불꽃을 주고 받는 묘기
외발자전거를 탄 채로 다섯개의 불꽃을 주고 받는 묘기 ⓒ 동춘서커스단
그는 서커스 무대에서 연극과 쇼가 함께 펼쳐지던 시절이어서 가수, 줄 타는 곡예사, 연극 주연 배우, 사회자 등으로 번갈아 가며 등장해 만능 스타로 인기를 날렸다. 그러나 동춘 서커스단 설립자 박동춘씨가 작고하고 경영난에 봉착하면서 서커스단은 해체 기로에 섰다. 그때 그는 유량 생활로 모은 모든 재산을 ‘동춘 살리기’에 바쳤고 동춘의 새 단장을 맡은 이래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화려한 영상과 다목적 문화공간 출현에 서커스가 살아남는 길은 쉽지 않아 보였다. 분명한 것은 서커스의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점. 이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목적은 분명했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는 점이다. 고민하는 시간은 늘고 경영은 내내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단원들은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81년 설상가상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오던 동춘의 마스코트 코끼리, 하모니카를 불어대던 그 ‘제니’라는 이름의 코끼리가 천막 안에서 죽었다. 영하 21도의 혹한을 견디지 못해 숨을 거둔 것. 그리고 여름이 오자 태풍이 몰아쳐 소중한 장비들이 모두 떠내려 가버렸다. 불행의 연속이었다. 마지막 보루라고 믿었던 남은 단원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갔다. 박세환 단장은 이럴수록 전국을 순회하며 그 시절의 서커스 붐을 일으키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솟구쳤다.

단원들 나이트클럽 호텔로 떠나지만 전통 곡예문화 살리기에 안간힘

소녀 곡예사들이 외발자전거를 탄 채로 공중에  접시를 던지며 돌리고 있다
소녀 곡예사들이 외발자전거를 탄 채로 공중에 접시를 던지며 돌리고 있다 ⓒ 동춘서커스단
일단 남은 단원들을 정비해 지방 순회공연에 나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줄타기 연습 중에 단원이 떨어져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단원들은 더 이상 위험하고 박봉의 곡예단에서 곡예하는 삶을 하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때마침 여기저기 나이트클럽과 호텔 등에서 그들에게 손짓을 했다. 편하게 먹고 자고 화려하게 대접받는 무대는 어쩜 그들이 꿈꾸던 현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고단했던 유랑극단과는 대조적인 삶의 일대 전환기를 맞았던 셈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박세환 단장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버팀목이던 아내와 자식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러 날을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은 하나였다. 동춘 서커스의 영화를 상징하는 천막만은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전국을 떠돌며 수많은 찬바람을 맞았고 그 겨울나기를 천막에서 전통 곡예를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고 관객들의 박수 갈채에 희망을 꿈꾸던 세월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서커스 순회. 역시 삭풍이 몰아쳤다. 천막 옆 컨테이너에서 모든 가족들이 숙식했다. 그러나 준비한 공연장에는 고작 40명에 불과한 관람객이 모였다. 그래도 70년 동안 연중무휴의 전통을 깨지 않기 위해 공연을 계속 했다. 거듭 다짐했다.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동춘 역사는 한국의 역사라는 점. 그 역사를 자기 세대에서 멈추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이었다. 기필코 다시 일어서 전통 서커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을 몇 번씩 되풀이했다.

2001년 일산 백석역과 인천 송도 유원지에서 대규모 서커스 공연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게릴라 호우가 쏟아져 극장이 물바다가 되었다. 이번에는 남아 있는 단원들이 그를 굳게 믿고 마지막까지 똘똘 뭉쳐 뜬눈으로 물을 퍼냈다.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자 4000여명이라는 관객이 박수를 쳤다. 대성황이었다. 이날을 아직도 꿈처럼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이날 이례적으로 연장 공연까지 했었다.

한국 서커스의 세계화와 예술로 체계화 대변신 시도

서커스 이야기

세계 최초 서커스 공연은 영국의 기병장교인 필립 애스틀리(Philippe Astley) 가 1782년 템플가에 원형극장을 세워 곡예 줄타기 무언극 등의 프로그램을 섞어 막 올린 것이다. '서커스'라는 말은 1807년 템플가의 '서커스 올림픽'으로 부르면서 첫 등장했다.

19세기부터 서커스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은 연극이나 오페라처럼 평가 받았다. 파리에선 장 콕토나 피카소가 선두로 서커스를 좋아했고 약 20년 후 실감나는 여러 다양한 구경거리의 발전의 따라 서커스도, 창작 서커스와 각각의 종목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파리 정부는 서커스에 대한 예산을 점차 늘려가고 있으며 체험학습과 전문학교 등 서커스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관들을 지원하고 있다. 파리 사람들에게 서커스는 중요한 문화의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하늘은 그에게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멀고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공연의 대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국내 공연 준비 외에도 오래 전부터 한국 서커스 체질 개선과 함께 세계 진출을 준비해 왔다. 최근 국제부를 신설해 중국 산동성기예단, 베이징 기예단, 러시아 월드스타서커스단 등과 교류해 왔고 외국 배우들을 단원으로 영입해 공연의 국제화를 시도해 왔다. 외국 서커스에 있지 않은 남사당 줄타기 등 우리 고유의 레퍼토리를 개발해 새로운 칼라로 대중 속으로 치고 들어갔다.

이런 변신에 주목해 LA와 뉴욕, 보스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일본 요꼬하마 등지에서는 해외 초청 공연 의뢰가 줄을 이었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가 서커스라는 문화 상품으로 외화를 벌여 들이고 있는 점을 착안해 서구 서커스에 싫증을 느낀 해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자 부천시와 함께 서커스전용 상설공연장을 건립해 운영 중이다. 인근 테마파크와 연계한 다목적 문화 공간의 한 축으로 서커스 무대를 상설화했다. 대단한 발전이다.

무대 안에서 허리를 꺾은 채로 접시 돌리기를 하는 모습
무대 안에서 허리를 꺾은 채로 접시 돌리기를 하는 모습 ⓒ 동춘서커스단
또한 세계 서커스대회를 개최하고 서커스 아카데미를 건립해 단원들에게 의해 근근이 대물림되고 있는 서커스를 곡예 예술로 체계화한다는 구상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는 2003년부터 서울예대에서 서커스를 현대무용에 접목하는 강의를 시작했다.

한국 서커스의 긴 전통을 이어가는 산증인 박세환. 그는 이렇게 말했다. “40년 세월을 유랑하며 떠돌았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든 한 세상 광대로 살아가는 것 아닌가요? 제 고향은 처음도 맨 마지막도 영원히 겨울바람에 휘날리는 '동춘 깃발' 아래 천막입니다”라고.

그의 눈빛에서 이 땅의 유랑하는 삶들을 읽는다. 낮은 곳에서 작은 것에 행복을 찾는 사람들. 묵묵히 자연을 일구며 살아가는, 동춘을 지켜온 시골 민초들. 사계절 내내 작은 땅뙈기에 만족하며 이를 일구고 이곳에서 결실의 보람을 찾는 사람들. 그래서 작은 것이 아름답고 믿는 사람들. 우리 것이 아름답다고 믿는 이 땅의 모든 민초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덧붙이는 글 | 박상건 기자는 91년 <민족과 지역>으로 등단한 시인이고,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추진위원장, <뿌리깊은나무> < 샘이깊은나무> 편집부장을 지냈고, 현재 <계간 섬> 발행인 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여대 겸임교수이다. 

이 기사는 국정브리핑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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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언론학박사,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특별추진위원장,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한국잡지학회장,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을 지냈다. (사)섬문화연구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저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예비언론인을 위한 미디어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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