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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찾으러 갔을 때 메주 앞에서 신이 나있는 2002년 2월 22일생 김솔강
아이를 찾으러 갔을 때 메주 앞에서 신이 나있는 2002년 2월 22일생 김솔강 ⓒ 김규환
아내 외출이 잦아진 건 해강이와 솔강이가 시골 큰집에 가면서부터다. 13개월 터울로 연년생인 두 아이를 얻은 뒤로 아내와 나는 5년 동안 영화 한 편 같이 보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한국영화 부흥기에 역적질을 하게 되었는데 나마저 극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단둘이서 오붓한 시간 갖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한동안 포기하고 사는 게 편하다고 생각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더군다나 아내는 맘 놓고 직장 회식 한번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저당 잡힌 신세라니!

이런 아내에게도 일상탈출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시골 사는 두 조카와 셋째 형님 내외가 큰 형님 제사 때 서울에 올라와 며칠 머물며 두 아이를 데리고 간다고 했다.

쾌재를 부를 법도 했지만 눈에 밟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더군다나 처음 아닌가. 가까운 곳이면 잠시 보고 와도 되고 언제고 다시 데려올 수 있지만 자그마치 쉬지 않고 달려도 4시간이요, 거리로는 천리 길 전남 화순이다.

애초 한 달을 목표로 설까지 헤어져 있을 수 있을까 고민이었다. 아이들이 참아낼 수 있을까, 조카들이 며칠 있다가 힘들어 하지는 않을까, 아내와 내가 과연 보고 싶어 안달하지 않을까, 엄마 아빠 보겠다고 울며 자지러지면 형님 내외가 안쓰러워 내려가다가 중간에 다시 데리고 올라오지나 않을까.

갖가지 암초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한번 보내보기로 하고 흔쾌히 응했다. 어릴 때 시골 생활은 남다른 데가 있다. 의미 있는 일에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서로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서울에서 이틀간 아이들에게 적응을 하게 하려고 일부러 아이들을 고모네에서 재웠다. 네 아이들을 함께 놀게 했더니 마냥 즐거워한다. 쉬할 때나 큰 것을 볼 때도 쉽게 큰 엄마를 찾아 다소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2주 전 금요일 드디어 아이들과 형님 가족이 6살 해강이와 4살 솔강이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아무 일 없이 잘 도착했다고 한다. 놀기 바쁘다고 한다.

마치 아이들이 없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내는 내려간 날부터 약속을 잡는다. 그동안 밖으로 나가고 싶어 어찌 견뎠을까? 이런 기회에 맘껏 자유를 누려보도록 내버려뒀다. 오랜만의 화려한 외출이지 않은가.

3일 연속으로 밤 11시, 12시, 새벽 한두 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돌아온 아내는 다음날 속이 쓰리다고 야단이다. 하루를 쉬고는 퇴근 후 또 사람을 만난다.

며칠 지나 "그렇게 술을 먹다가는 금방 속을 버리니 조심하라. 아무나 술 먹는 줄 아느냐?"고 부탁한 뒤 "요즘 같은 세상에 남자들도 밤늦게 다니면 위험한데 여자인 당신은 더 주의해야 한다"며 12시 이전에는 귀가하는 게 어떠냐는 주문을 했다.

아이들에겐 구태여 전화 자주 하지 말자는 약속을 했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뜻이었다. 동정만 살피려고 사나흘은 어른들끼리만 통화가 이뤄졌다. 잘 지낸다고 한다. 밤에 자면서 울거나 보채지도 않는단다.

백아산 산행에 의젓하게 걸었던 누나 김해강이는 2001년 1월 14일 생이다.
백아산 산행에 의젓하게 걸었던 누나 김해강이는 2001년 1월 14일 생이다. ⓒ 김규환
솔강이는 깨어 있을 때는 쉬지 않고 귤, 사과, 배, 과자, 빵, 밥, 고구마 등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니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도 아이 간식 대기가 겁이 난다고 한다. 해강이는 두 오빠들과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한다.

대견한 놈들. 우린 이렇게 잘 지내는 아이들을 품 안에만 가둬 키우려 했다며 반성을 하기도 했다. 떠나면 어련히 새로운 환경에 맞춰 지낼까. 나아가 멀지 않은 때에 둥지를 박차고 훨훨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들었다.

아내와 나는 두 아이가 없는 허전한 집에서 각자 따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처럼 지냈다. 아이 생각도 하지 않고 며칠을 잘 보내고 있었다. 나를 챙기지 않은 아내가 미웠지만 며칠도 참지 못하는 사람, 속 좁은 사람이라는 비난이 일까봐 꾹 참고만 있었다.

설 때 내려가서 온 가족 대상봉을 하면 되겠지. 벌써 아이들이 그렇게 컸구나. 엄마 아빠를 찾지 않는다니 섭섭하기까지 했다. 낳은 정 못지않게 키운 정도 크구나! 이래저래 힘들진대 아이들을 데려간 두 분이 고마웠다.

나흘이 지나고 나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형님과 형수님 교육 방식 차이에서 빚어진 결과인데 마음이 여린 형님은 고집쟁이이자 가장 어린 솔강이를 늘 감싸고 돌았다. 큰 아이들이 별 잘못이 없는데도 아이들을 단체 기합을 주는 바람에 반발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형수님은 평소 아이들을 엄하게 다스린다. 서서히 한계 상황에 이르렀다는 낌새가 보이자, "우리는 가끔 엉덩이에 티가 나도록 아프게 때린다"며 "그냥 넘어가서는 아이 성격 버리니까 잘못했을 때는 따끔하게 혼내 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신다.

그때마다 형은 자신이 낳은 아이들은 함부로 대해도 한번 건너 뛴 조카는 촌(寸) 수가 한 개 늘어감에 따라 더 조심스러웠는지 어쩌지를 못하고 형수 말리기에 바빴다고 한다. 더구나 그런 형이 어느 날 밖에서 술을 한잔 하고 와서는 큰 실수를 하고 만다.

"당신 조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내가 뭘 어쨌다고요?"
"자네가 솔강이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니냐고?"
"어떻게 했는데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그럼 이 아이들이 내 조카가 아니라고요? 내 참."
"그게 아니고 내 아이들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내가 배가 아파 낳은 자식이라면 더 세게 때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조카여서 어르고 달래도 봅니다. 정말 안 되겠다 싶어도 솔강이를 잡을 수도 없어 고민이라고요."

무척 섭섭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그런 대화가 있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형님이 야속했다고 한다.

그런 대화가 있은 뒤 한글이와 세종이에게 물어봐도 얼른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고 한다. 해강이와 솔강이 때문에 밖에 나가 맘대로 놀지도 못하고 방 안에서만 놀아야 하니 좀이 쑤셨으리라.

더 큰 화근은 공평하게 대하지 않아서다. 솔강이와 해강이가 잘못을 해도 9살 한글이, 7살 세종이에게 닦달을 하고, 모든 일에서 어리다는 핑계로 해강이 솔강이를 먼저 배려하니 지들 몫은 늘 뒤로 밀린다고 생각하니 오죽하겠는가.

이번 겨울들어 눈다운 눈이 오지 않았지만 고향에 찾아가니 내 마음을 포근히 적시는 눈이 옴팡지게 내렸다.
이번 겨울들어 눈다운 눈이 오지 않았지만 고향에 찾아가니 내 마음을 포근히 적시는 눈이 옴팡지게 내렸다. ⓒ 김규환
조카 녀석들 원성이 높아가던 지난 목요일 날 아내와 나는 상의를 했다. 반드시 데려온다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쯤 내려가서 자초지종을 알아봐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며칠만 더 무사히 지냈더라면 부부가 오랜만에 영화도 한편 보고 시내도 한번 쏘다니다 오고 싶었지만 한가한 놀음이나 할 때가 아니다. 주말에 시골로 향했다.

잘 놀고는 있었지만 한계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가보니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지어미 애비가 나타나니 이불에 쉬도 하고 어리광도 갑자기 늘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조심스러워 그렇게 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서울로 갈 거냐, 말 거냐 여러 차례 묻자 해강이는 엄마 아빠 따라 간다고 하고 솔강이는 세상 물정 모르고 그냥 있겠다고 한다. 두 분께 여쭈니 여전히 형님은 설까지 두고 가라고 하지만 형수는 이런 상황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하신다. 정말이지 섭섭함이나 아쉬움은 털끝만큼도 없다.

이해가 갔다. 형이야 정만 많지 관계를 어긋나게 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형수는 기존 질서가 흐트러지고 더군다나 형에게 그런 비난까지 들었으니 심사가 뒤틀린 건 둘째로 하더라도 당장 아이 넷이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통에 혼란스러웠을 게다.

그냥 내버려두면 될 아이들이 아닌 바에 손이 하나하나 가야 하는 두 아이가 추가되었으니 그런 판단을 한 건 백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내심 놔두고 올 생각도 있던 나였지만 주위사람 백 마디보다 형수 한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여 내 아이들을 차에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나였더라면 어땠을까? 혼자서는 내 두 아이를 하루 이상 감당하기 힘든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 내가 덜컥 아이들을 맡겼으니 그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형수는 일주일을 엄마 아빠에게서 떨어져 있는 아이들을 행여 욕이나 얻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먹이고 재우고 달래서 키우느라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 애초 약속을 초과하여 지킨 셈이다.

아이 가진 사람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아내의 특별한 휴가가 보장되고 휴식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뜬 일 하나만으로도 이번 아이들의 시골 행은 값진 것이었다.

오늘 다시 우리 집은 평상을 되찾아 아침 먹고 아이들 어린이집에 가고 아내는 출근을 했다. 뭔가 빠진 듯 허전한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이 일상으로 돌아와 하루를 살고 있다. 다소 힘들어도 이게 행복의 거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해질녘 아이를 찾으러 가는 일을 다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7시가 되자 솔강이는 일어나 밥 잘 먹고 어린이 집에 갔다. 있다가 없으면 얼마나 허전한지 모른다. 힘들어도 같이 지내는 재미가 더 낫다.
7시가 되자 솔강이는 일어나 밥 잘 먹고 어린이 집에 갔다. 있다가 없으면 얼마나 허전한지 모른다. 힘들어도 같이 지내는 재미가 더 낫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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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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