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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설한 속에도 매화는 그  꽃망울을  활짝 터트렸다.
엄동설한 속에도 매화는 그 꽃망울을 활짝 터트렸다. ⓒ 추연만

'설중매' 라 했던가?  금방 터질 듯한 꽃망울
'설중매' 라 했던가? 금방 터질 듯한 꽃망울 ⓒ 추연만
엄동설한에 핀 매화는 백옥 같은 꽃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감싸고, 놀란 입술은 다물 줄 모르고 눈동자는 설중매에 완전히 고정되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감수성 짙은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 민족시인 이육사를 떠올리고 그의 대표 시 '광야'를 읊조린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梅花) 향기(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겨울 칼바람에 맞서 생명의 움을 틔워 꽃망울을 터트리는 매화의 습생을 이육사는 남다르게 관찰한 것인가? 꽃의 아름다움과 청아한 향에 대한 표현 대신, 일제 강점에 맞서는 초인 의지를 가다듬고 광복의 희망을 노래하는데 매화를 등장시킨다. 매화를 자신에 비유한 것일까?

백설의 가지마다  봉긋봉긋 꽃망울을 틔우며 봄을 재촉하나?
백설의 가지마다 봉긋봉긋 꽃망울을 틔우며 봄을 재촉하나? ⓒ 추연만

담장 안에 심어둔 매화나무는 옛집 맛을 더 느끼게 한다
담장 안에 심어둔 매화나무는 옛집 맛을 더 느끼게 한다 ⓒ 추연만
이육사는 41세 짧은 생애에 감옥을 17번이나 갈 정도로 암울한 시대에 맞서 조국 독립을 몸소 실천하는 시인이었다. 끝내, 이육사는 베이징 감옥에서 사망하고 이듬해, 조국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초가집 처마끝 고르름
초가집 처마끝 고르름 ⓒ 추연만
예로부터, 매화꽃은 '군자의 꽃'이라 했던가? 엄동설한에 핀 꽃을 한매(寒梅), 동매(冬梅)라 하여, 시련 속에서 굴하지 않는 지조 있는 사람을 거론할 때도 매화꽃은 자주 거론된다. 그리고, '매난국죽'이란 말도 있듯, 서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눈 녹은 후에도 매화는 꽃을 피우고
눈 녹은 후에도 매화는 꽃을 피우고 ⓒ 추연만

눈 녹은 후 꽃망울은 더욱 생기도 돌고
눈 녹은 후 꽃망울은 더욱 생기도 돌고 ⓒ 추연만
그렇다고 매화나무가 양반들(?)의 관상용으로만 키워진 것은 아니다. 원래는 약용으로 들어왔으며 민중들 삶과 아주 밀접하다. 식중독이나 배탈이 날 때, 매실은 특효약이란 호평이 나 있다. 살구나무, 앵두나무와 더불어 매실나무는 민중과 호흡을 같이 해 온 과실수이다.

조선시대 정조 때 건립한 양동마을 옛집(근암고택, 경주시 강동면 소재)에 있는 매화나무도 관상용만은 아니라고 이곳에 사시는 할머니가 설명한다. 술을 만들기도 하고 짱아지도 만든단다. 배탈용 가정상비약으로도 일품이라고.

눈 녹은 뒤 매화꽃의 모습은 어떨까? 혹시, 폭설에 이은 한파로 꽃잎이 얼고 꽃 봉우리가 상했으면 어쩌지…. 괜한 걱정이었다. 오히려, 꽃잎도 그대로고 꽃망울은 더 한층 생기를 찾은 모양이 보는 이 마음을 가볍게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각각 한 마디씩 던진다.

"어머, 매화꽃이네."
"많은 눈에도 살아있네."
"신기해. 신기해."
"설중매라 하더니, 진짜네."

활짝 핀 매화 꽃
활짝 핀 매화 꽃 ⓒ 추연만


호미곶에는 이육사가 있다!

▲ 호미곶 광장의 이육사 청포도 시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

- <청포도> 이육사

애향과 저항의식이 잘 보이는 이육사의 대표작인<청포도>는 1938년 초여름, 포항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오는 길에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 포도밭이 많은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지 일대를 둘러보고 영일만을 내려다보면서 시상을 얻었다고 한다.

중국을 무대로 독립항쟁을 하다 일제에 의해 여러 번 투옥을 당한 이육사는 옥살이로 병을 얻어 경주 남산의 한 암자에 은거하는 중이었다.

'청포도' 시는 고향에 대한 감각적 표현이 돋보이며 암울한 시대를 벗어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갈망한 수작으로 평가되어 진다.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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