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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시를 가장 잘 표현한 선전물인 듯 싶다.
삼척시를 가장 잘 표현한 선전물인 듯 싶다. ⓒ 김정봉
죽서루의 입장료는 2003년부터 무료로 바뀌었다. 죽서루는 더 이상 폐쇄적이지 않고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공간이 되었고 그냥 쳐다보면서 만족해야 하는 박제된 문화재에서 오르고 누워 보고 만져 보고 늘어지게 한숨자기도 하는 살아 있는 문화재로 바뀌었다.

1000원의 입장료를 받아 출입통제 푯말을 세워 놓은 경포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죽서루는 경치로는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일지 몰라도 개방성에선 대한민국제일루(大韓民國第一樓)라 할만하다. 초급 답사자의 눈에는 고급답사지로 보였다.

삼척 조금 못 미쳐 추암 마을이 있다. 예전엔 삼척에 속했을 것이지만 동해시가 생기면서 동해시로 편입되었는데 거의 동해시와 삼척시에 한발씩 담근 절묘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촛대바위. 바다에 일부러 꽂아 놓은 듯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촛대바위. 바다에 일부러 꽂아 놓은 듯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 김정봉
추암은 애국가 첫 소절에 나오는 일출장면으로 유명한데 이런 명소를 가만히 놔둘 리 없다. 한적한 어촌의 본래 모습은 사라지고 관광지로 변하여 어수선하지만 꼭 한 번 들를 만한 곳이다. 바다에 일부러 꽂아 놓은 듯한 촛대바위와 그 바위와 어우러지는 멋진 바다 풍경도 일품이지만 해암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해암정은 고려 공민왕(1361년) 때 높은 벼슬을 지낸 심동로가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내려와 살며 세운 정자다. 마을과 바다를 안마당으로 하고 기이한 바위를 병풍으로 삼아 서 있다. 여기를 다녀간 선인들의 자취가 정자 안쪽 벽에 여러 개의 판각으로 남아 있어 추암바위가 들려주지 못하는 추암의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해암정. 빼어난 촛대바위 주변 풍경을 더욱 운치있게 해준다.
해암정. 빼어난 촛대바위 주변 풍경을 더욱 운치있게 해준다. ⓒ 김정봉
추암에서 빠져 나와 얼마 가지 않으면 삼척. 삼척은 강원도에서 제일 남쪽에 위치한 군으로 지금은 그 자리를 정선에 내주고 있지만 동해시가 생기기 전에는 전국 제일 큰 군이었다. 삼척하면 시멘트 공장이 먼저 연상되어 가고 싶은 맘이 덜하겠지만 실제로 가면 따스한 온기가 있는 곳이다.

삼척항 못 미쳐 길 옆으로 뾰족하게 솟은 육향산에는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 알 수 없는 비석머리와 신통력을 지녔다고 하는 동해척주비가 있고 푸른 오십천 절벽 위에는 오십천을 끌어안듯이 절묘하게 서 있는 죽서루가 있다.

육향산을 오르는 계단 길모퉁이에 비석 7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그 비석머리의 문양이 색다르다. 최순우 선생의 <한국미산책>에서 보았던 그 비석이라 더욱 반갑기도 하다. 너무나 평범하여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도 않았을 순박한 비석머리지만 자꾸만 보면 이 비를 만들 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 것 같다.

순박한 비석머리 문양. 무엇을 그리려고 했을까?
순박한 비석머리 문양. 무엇을 그리려고 했을까? ⓒ 김정봉
파도나 꽃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백제의 산수문전을 흉내내려다 실패한 것 같기도 하다. 또 달리 보면 그 무엇도 아닌 추상적 문양을 새긴 것 같기도 한데 옆의 비석머리가 일렁이는 파도 위에 솟아오르는 해를 그리려 한 것처럼 보여 이 비는 구름이 낀 날의 일출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때 그때 달라지는' 재미있는 문양이다.

척주동해비는 육향산 꼭대기에 있다. 이 비는 조선 현종 2년(1661) 삼척 부사 허목이 세운 것이다. 당시 삼척은 파도가 심하여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홍수 때에는 오십천이 범람하여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허목이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을 지어 전서체로 써서 동해비를 세웠더니 바다가 조용해졌다고 한다.

척주동해비. 좁고 답답한 보호각에 갇혀 있어 신묘한 힘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척주동해비. 좁고 답답한 보호각에 갇혀 있어 신묘한 힘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 김정봉
이 비는 조수를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하여 퇴조비라 하는데 이러한 신력 때문에 사람들이 탁본을 많이 해가 보호각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 높지 않은 육향산에 올라 삼척항을 비롯하여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산책할 만한 장소다.

오십천 절벽 위에 선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에 제일 오래 되고 가장 큰 건물이다. 유일하게 바다에 접하지 않고 내륙에 들어앉아 있는 것도 색다르다.

죽서루. 관동팔경 중 제일 크고 오래된 건물이다.
죽서루. 관동팔경 중 제일 크고 오래된 건물이다. ⓒ 김정봉
허목의 <죽서루기>에 따르면 "큰 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암벽으로 된 색다른 이 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하였다.

오십천 푸른 물
오십천 푸른 물 ⓒ 김정봉
자연암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자연암석이 없는 평평한 곳에만 주춧돌을 대어 자연미를 살렸다. 울퉁불퉁하고 들쭉날쭉한 자연암석을 고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한 덤벙주초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덤벙주초. 자연 암석을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하여 감흥을 자아낸다.
덤벙주초. 자연 암석을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하여 감흥을 자아낸다. ⓒ 김정봉
게다가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랭이법으로 그 위에 얹을 기둥뿌리를 맞추어 깎았다. 마치 종이로 된 퍼즐 조각을 만들 듯이 아주 정교한 솜씨로 나무를 도려내었다.

불국사의 그랭이법으로 쌓은 석축이 돌과 돌과의 만남이라면 이것은 돌과 나무의 만남이다. 기둥의 뿌리가 덤벙주초를 만나는 순간 자연과 인공이 하나가 된다. 외국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의 것이다.

자연석에 맞추어 기둥을 깎은 그랭이법 기술
자연석에 맞추어 기둥을 깎은 그랭이법 기술 ⓒ 김정봉
요즘 같으면 포크레인으로 공사를 방해하는 바위는 깨트리고 울퉁불퉁한 면은 평평하게 다듬어 크고 화려한 정자를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죽서루는 둔덕은 둔덕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그대로 두고 좁은 터에 비집고 세워 한국 건축의 자연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무 데나 대나무 몇 그루를 심어 놓으면 그대로 자연 정원이 되어버린다.

죽서루의 멋이 자연과 인공이 하나되는 자연미에 있다면 그것을 맘껏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개방성이 그 멋을 살려 준다. 자연미와 폐쇄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죽서루에는 출입금지 푯말 대신 신발을 닦는 신발 닦게만 마련되어 있다.

죽서루 오른쪽 용혈바위 구멍으로 죽서루의 측면을 보기도 하고 바위 사이 양지바른 곳 벤치에 앉아 혹은 죽서루 기둥에 기대서서 오십천을 내려보기도 한다. 보는 데에 따라 감흥이 다르다.

죽서루 측면. 자연석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한국 건축의 자연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죽서루 측면. 자연석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한국 건축의 자연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 ⓒ 김정봉
죽서루는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 1년(1275년) 이승휴가 벼슬을 버리고 두타산에 숨어 지냈을 때 죽서루에 올랐다 하니 창건 시기는 최소한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누각을 세울 당시에 동쪽에 죽장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만 전해온다. 또 일설에는 동쪽에 죽죽선이라는 기생이 살고 있는 집이 있었고 그 서쪽에 지은 누대라는 의미로 죽서루라 하였다 한다.

죽서루는 조선시대 때에는 일종의 관아시설로 활용된 누각이었다.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의 부속건물이었다. 조선시대의 죽서루는 공공시설로 접대 향연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고 삼척 양반과 삼척을 찾아온 시인묵객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지금에 와서야 죽서루는 평민의 품에 돌아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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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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