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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숭동 길거리 호랑이 상,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웃음 짓는 것 같기도 하다. 이 호랑이가 있어 짜증나는 대학로를 용서해 준다.
서울 동숭동 길거리 호랑이 상,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웃음 짓는 것 같기도 하다. 이 호랑이가 있어 짜증나는 대학로를 용서해 준다. ⓒ 신병철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표현한 전통 호랑이가 현재에 되살아난 것 같다. 호랑이 깃털과 얼룩무늬 모두를 찍찍 그은 선으로 간략화했다. 큰 머리와 짧은 체구로 무서움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대학로 한가운데 길가에서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다양한 마음을 요리조리 다 잡아주고 있는 듯하다. 복잡하여 걷기에 짜증나는 대학로는 이 호랑이상 하나 때문에 용서해준다.

예쁜 호랑이로 치자면 17세기 백자에 그려 넣은 '나 이뻐?' 호랑이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 백자 도록을 보다가 우연히 만난 이 호랑이는 하루 종일 기분을 좋게 했다.

앞발을 곧추 세우고 얼굴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을 본 듯이 반색하고 있다. 눈에는 속눈썹을 끼워 넣은 것 같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눈을 깜짝 깜짝 하며 '나 이뻐?'하고 물어보고 있다. 소박한 모양의 큼직한 항아리에 철화 안료로 단박에 그려 넣었다.

17세기 호랑이 무늬가 있는 철화백자 항아리. 호랑이가 앞발을 곧추 세우고 방긋 웃으며 "나 이뻐?" 하며 귀염을 떨고 있다.
17세기 호랑이 무늬가 있는 철화백자 항아리. 호랑이가 앞발을 곧추 세우고 방긋 웃으며 "나 이뻐?" 하며 귀염을 떨고 있다. ⓒ 문화재 도록
호랑이가 이렇게 깜찍해서야 원! 무섭기는커녕 귀여워 죽겠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에 청화백자의 청색 안료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청색 코발트 안료 대신 산화철 안료로 백자에 무늬를 그려 넣었다.

이 산화철 안료는 번지기가 쉬워 단번에 붓을 휘날려 그려야 했다. 그래서 짙고 옅음의 표현이 어렵고 섬세한 표현도 어렵다. 붓을 들어 단박에 그려 넣어야 하는 조건이 이렇게 깜찍한 호랑이를 만들고 말았다.

지난 가을 강화도 전등사에 들렀다가 우연히 만난 물고기들도 하루 종일 나를 싱글벙글거리게 했다. 형형색색 색동옷을 입은 물고기들이 입을 벌리고 '화장실은 이쪽이에요' '왕조실록 보관한 사고는 저쪽이에요'하며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눈을 댕그랗게 뜨고 주둥이를 한껏 벌렸다. 전등사에 온 사람들을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꼭 보내주고야 말겠다고 작정을 한 것 같다.

강화도 전등사 물고기 이정표. 입을 쩍 벌리고 열심히 길 안내하고 있다. 찾아가는 대상보다 이정표가 더 이쁘다.
강화도 전등사 물고기 이정표. 입을 쩍 벌리고 열심히 길 안내하고 있다. 찾아가는 대상보다 이정표가 더 이쁘다. ⓒ 신병철
절간에 있는 목어 모습에 착안하여 나무 물고기로 이정표를 삼았다. 나무 물고기들이 나이가 제법 많은지, 아니면 오래된 나무로 만들었는지, 전부 고색창연하다.

날아와 살을 파고들 것 같은 화살이 아니라 쩍 벌린 입으로 표시한 이정표는 그지없이 정겹다. 이런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기에 우리의 세상살이가 풍요로워지는 게다.

조선시대 국가 차원의 최고 의식을 치러내는 경복궁 근정전에도 기분을 흐뭇하게 해주는 석조물이 있다. 경복궁 근정전 기단은 상당히 넓다. 12지 신상과 현무, 주작 등 4신상으로 그 넓은 기단을 장식했다. 이 중에서 남쪽 계단 난간 위에 오(午)에 해당하는 말상과 서쪽의 신(申)에 해당하는 원숭이상이 가장 멋있다.

경복궁 근정전 기단의 난간에 세워놓은 말상. 앞발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는 숙이고 눈은 치켜뜨고는 깜빡거리면서 "나 이뻐" 말하는 것 같다.
경복궁 근정전 기단의 난간에 세워놓은 말상. 앞발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는 숙이고 눈은 치켜뜨고는 깜빡거리면서 "나 이뻐" 말하는 것 같다. ⓒ 신병철
말은 앉은 자세부터 재밌다. 말의 실제 앉는 모습이 저런가? 말은 잘 앉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나귀인가? 앞발을 가슴 앞에 모아 구부리고 말굽을 뒤로 돌렸다. 그 양 앞발 사이에 길쭉한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 기단 난간에 세워놓은 원숭이 상. 팔다리를 구부려 몸을 최대한 부피를 적게 하였다. 입은 꽉 다물고 눈을 댕그랗게 뜨고는 "뭘 봐" 하는 것 같다.
경복궁 근정전 기단 난간에 세워놓은 원숭이 상. 팔다리를 구부려 몸을 최대한 부피를 적게 하였다. 입은 꽉 다물고 눈을 댕그랗게 뜨고는 "뭘 봐" 하는 것 같다. ⓒ 신병철
코는 벌름거리고 눈은 치켜 떴는지, 윙크하고 있는지 깜찍하기 짝이 없다. 예뻐해 주지 않으면 삐칠 것만 같다. 머리는 아래 부분은 깎아 버리고 꼭대기 머리칼만 남겨두었다. 세상에! 말이 상고머리를 하고 있다.

원숭이상도 보통이 아니다. 엉덩이를 깔고 다리를 최대한 구부려 앉은 모습이 웃긴다.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어깨를 웅크리고 있다. 눈은 댕그랗게 뜨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입은 꽉 다물고 있는데, 속으로 '뭘 봐'하고 묻고 있다.

1860년대 경복궁 역사에 징역당한 어느 석수장이의 해학이 뭉쳐져 있다. 이 경건한 근정전 기단, 온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이렇게 천진난만한 조각을 올려놓을 수 있는 여유는 어디서 나왔을까? 천성이 그랬을까? 아니면 치기 어린 장난이었을까?

서울에만 이런 우연히 만나는 멋쟁이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민중들 속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경기도 광주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목장승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남한산성 바로 밑동네인 엄미리와 무갑산 아래동네 무갑리 장승이 가장 멋있다.

경기도 광주 엄미리·무갑리 장승. 길 가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 엄미리·무갑리 장승. 길 가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 신병철
엄미리 아랫동네에도 윗동네에도 장승을 길 좌우에 세웠다. 2년에 한 번씩 새해 대보름에 만들어 세운단다. 얼마 전에 세운 장승은 샐쭉 웃고 있는 모습이다.

눈이 길쭉하게 세로로 세워져 있다. 코는 추상적으로만 존재한다. 입이 하나인 듯 둘인 듯 무어라고 조잘거리고 있다. 동네 입구에 장승을 세워놓고 엄미리 사람들은 혼자 그 곳을 지날 때 한마디씩 꼭 말을 붙일 것 같다. '나 이쁘죠?'

무갑리 장승은 조금 다르다. 퉁망울 눈에 광대뼈가 불거졌다. 조그맣게 붙어 있는 납작코 아래 이빨이 가지런한 입을 야물차게 벌리고 있다. '야 너 이리와 봐, 너 나한테 반했지'라며 자신을 과신하고 있는 듯하다.

청주 용정동 미륵불상. 불상인지 장승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17세기 조선시기 마을 사람들이 안녕을 기원하며 만들었을 것이다. 살짝 미소 지으며 쳐다보는 모습이 푸근하다.
청주 용정동 미륵불상. 불상인지 장승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17세기 조선시기 마을 사람들이 안녕을 기원하며 만들었을 것이다. 살짝 미소 지으며 쳐다보는 모습이 푸근하다. ⓒ 신병철
무갑리의 여러 장승들 중에서 이 장승만 붉게 칠했다. 오래되면 붉은 색이 퇴색되어 저렇게 보인다. 감히 이 동네에 나쁜 잡신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벽사의 장승이다.

청주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용정동에 불상이 있다길래 찾아가 보았다. 우리를 반기는 부처님은 페르시안 고양이 같은 부처님이었다. 길쭉한 네모진 돌 윗 부분에 겨우 얼굴만 표시했다. 그래도 부처님이라고 우긴다. 미륵불이라고도 한다. 장승인지 불상인지 구분도 잘 안 된다.

얼굴 이마 중앙에 백호가 간단히 새겨져 있다. 백호가 있으니 부처님이라고 봐줘야 할 것 같다. 눈과 눈썹은 구분조차 안 된다. 둘이 합쳐 하나가 되었지만, 둘로 보인다. 코는 앙증맞다. 그 아래 조그만 입을 다물고 있지만 곧 무어라고 말할 것 같다. 목은 매우 짧다. 아래쪽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로 말미암아 이 불상이 1652년 효종 때 건립되었음과 돈 댄 사람들의 이름을 알 수가 있다.

부처님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거야 당연하다 싶다. 부처님 아닌 물고기도 우리들을 즐겁게 하는 경우가 있다. 서울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조금 올라가면 정동교회 부근 신아일보 건물 앞에 붕어인지 잉어인지 모를 물고기 한 마리가 헤엄치고 놀고 있다.

서울 정동에 있는 붕어상. 석조를 붕어인지 잉어인지 물고기로 꾸몄다. 입을 벌리고 꼬리를 치는 모습이 멋있다.
서울 정동에 있는 붕어상. 석조를 붕어인지 잉어인지 물고기로 꾸몄다. 입을 벌리고 꼬리를 치는 모습이 멋있다. ⓒ 신병철
입은 동그랗게 벌리고 물을 할딱이며 내뿜고 있고, 눈은 명태 눈깔처럼 맹하니 쳐다보고 있다. 덩치에 비해 작은 지느러미가 새겨져 있고,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지 꼬리를 제법 힘차게 치고 있다.

몸통 위는 네모지게 안을 파내었다. 사실 이 물고기는 석조다. 안에 흙을 조금 채워 연을 심고, 붕어나 묵납자루 몇 마리 키우면 딱이다 싶다. 석조를 이 곳에 갖다 놓을 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이 물고기만큼이나 멋있는 사람임을 내가 장담한다.

경북 칠곡의 송림사 대웅전 앞 돌거북 모자. 기다리던 아들을 낳아 업고 흐뭇해 하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표정이 정겹다.
경북 칠곡의 송림사 대웅전 앞 돌거북 모자. 기다리던 아들을 낳아 업고 흐뭇해 하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표정이 정겹다. ⓒ 신병철
우리를 즐겁게 하는 예쁘기 짝이 없는 것들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전통과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절간에 특히 많다. 경북 칠곡 송림사는 높은 벽돌탑과 시원시원한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대웅전 편액이 엄청나게 크다.

대웅전 앞 큰스님들이 드나드는 문 바로 옆에 돌거북 모자가 있다. 아들 거북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었나 보다. 아직도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것 같다. 어미 거북은 기다리던 아들을 낳아 업고 있으니 흐뭇하기 짝이 없다. 만면에 미소가 함뿍 잦아들었다.

'엄마 엄마 내가 젤 이쁘지?' 아들 거북은 엄마 거북에게 마구잡이로 강요하고 있다. 그 소릴 듣고 있는 저 엄마 거북의 평안스런 모습이 아련히 배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저 물상들이 아무리 예쁘다 한들 예쁜 사람만 할까? 젊어서 세계 최고의 배우였지만, 나이 들어 아프리카에서 어려운 사람을 위해 땀흘려 자원 봉사하는 여성은 누구보다도 아름답다. 작년 아무도 모르게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갖다 주다 들킨 빵집 젊은 종업원은 또 어떻고.

국가보안법의 족쇄를 풀기 위해 엄동설한 길바닥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으로 싸운 '우리의 영웅'들은 어떤 존재보다도 아름답고 예쁘다. 이들과 함께 하늘을 지붕으로 이고 살고 있어 영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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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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