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 길은정 공식 홈페이지(http://kileunjung.starnstar.net/)
고 길은정 공식 홈페이지(http://kileunjung.starnstar.net/)
오래 전에 읽은 그녀의 책을 통해 그녀가 암투병 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녀의 병이 재발되어 다시 그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병원 24시'라는 내가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말기 암환자들이 겪는 암성통증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크기의 고통이라고 한다. 어느 암성통증인들 견디기 쉬울까만 그 중에서도 특히 마약성 진통제로도 조절이 불가능할 정도로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 췌장암과 골암이라고 알려져 있다.

뼈로 전이된 암 때문에 그러한 극심한 통증을 겪으면서 길은정 그녀는 세상을 떠나는 전날까지도 음반을 내고, 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방송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참으로 놀랄 만큼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다.

많은 사람들이 그쯤 되면 병원에 입원해 조금이라도 통증을 줄여보려고 애쓰느라 하루 24시간을 보내는데,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버틴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다.

TV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죽음의 5단계인 수용을 넘어선 해탈의 경지까지 이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병에 대해서 얘기하고, 병으로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 앞에 공개한다는 것은 보통 용기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일을 했고 카메라 앞에서 아주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영정사진을 고르고, 자기가 죽으면 입으라며 언니에게 검은색 상복을 선물했다는 그녀. 인터넷에 그녀가 쓴 일기가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살아 있을 때는 그 것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전 남편과의 일로 신문 연예 면이 시끄러울 때도 난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무덤덤하게 보아 넘겼다. 누구의 삶인들 굴곡 없는 삶이 있으랴, 그녀가 단지 유명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많은 일들을 좀 더 혹독하게 치르는구나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녀의 일기를 하나하나 읽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해탈한 듯 한, 세상을 달관한 듯 한 이런 일기를 공개된 곳에 쓰기까지 혼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힘들어하고, 가슴 시려하고, 아파했을까 싶은 마음에 한 줄 한 줄이 그냥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암으로 세상을 뜨는 사람들을 가끔 접하다 보니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도 내가 많이 접하게 되는 분들은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대부분 체념 같은 수용을 하고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드물게 만나게 되는 젊은 사람들 중에는 마지막까지 삶의 끈을 놓지 못해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는 분들이 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젊디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특히 아직 어린아이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이들의 안타까움과 절망을 누군들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난 오래 전에 진료소 문을 나설 때면 항상 내가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누군가에게 흠 잡히지 않을 정도로 정리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았다.

주말에 집에 갈 때는 밀린 일 하나 없이 어느 누가 들어와도 당황하지 않고 업무에 임할 수 있도록 사무실 책상 위를 말끔하게 정리하고 진료소 문을 나서곤 했다. 그 것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는 내가 숨쉬며 살아있는 동안 남들과 어떻게 살았는가, 남에게 얼마나 따뜻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와 내 주변사람 혹은 보이지 않는 이웃에게 어떤 사람이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이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으니 어쩌면 내가 암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지금 가까운 친구 하나가 암으로 투병 중에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암환자들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간호사가 내 직업이고, 언젠가는 노인복지 현장에서 노인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나로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더구나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먼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내 주변에 머무르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런 내게 길은정 그녀의 얘기는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며칠째 내 발목을 잡고 있는 화두가 되었다. 그녀가 마지막 혼신의 노력으로 불렀다는 노래 '난 널'을 들으면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스카프로 묶은 말총머리와 맑은 음성과 화사했던 웃음을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노래보다는 이런저런 소문으로 더 많이 기억되지만, 그녀 자신은 마지막 떠나는 길까지도 가수이길 소망해 무대복을 입혀 달라고 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삶에 그렇게 진한 애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던 그녀를 난 이제 가수 길은정으로 기억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작년 여름 세상을 떠난 스위스 출신의 심리학자인 퀴블러 로스 여사가 발표한 죽음의 5단계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는 이론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골살이하는 직장인

이 기자의 최신기사100번째 기사를 보내면서...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