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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0월, 나는 제대를 했다.

제대하기 몇 달 전부터 수 만가지 계획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지만 막상 제대하고 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침마다 몸은 가위에 눌린 듯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뒤늦게 부스스 눈을 뜰 때면 혼자였다.

아침 겸 점심을 대충 차려먹고 잠깐 고양이세수만 하고 컴퓨터를 켜고 부팅이 될 때까지 모니터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몇 분 후 히죽거리며 모니터와 눈빛을 교환하다가 오후를 다 까먹는다. 식구들이 모이는 저녁에는 사뭇 변한 모습을 보여드린답시고 설거지를 자처하기도 하고 살림살이를 직접 챙기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며칠 뿐.

부모님도 처음에는 군대에서 못 다 한 잠 실컷 자는 거겠지, 군대에서 못 다 피운 게으름 한 번 실컷 피워보고 싶은 거겠지 하고 측은한 심정으로 지켜보셨다. 그런데 보통 제대하면 철이 든다는 데 이건 철딱서니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재벌 2세도 아니면서 아르바이트해서 복학할 학비 벌어 올 생각도 하지 않고. 괜히 생돈 쓴다며 학원도 다니지 않고. 그럼 집에서라도 공부를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내공을 쌓든지 해야하는데, 그런 모습은 도통 보이지 않고. 부모는 자식 공부시킨다고 이 고생은 하는데 자식은 요 모양 요 꼴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머니는 나를 불러 앉혔다. "수원아, 사실은…" 어머니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매년 늘어난다는 '가계부채 이야기'가 남의 집 담벼락에 적힌 낙서가 아니며, 아버지도 일을 언제까지 할지 모르며,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등등 우리 집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 순간 내 몸은 '레벨 업'과 같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는 느꼈다. 이것이 바로 '철이 든다'는 거라고.

"그럼 어머니 왜 진작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하고 눈물로 항변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분명히 "우리는 못 했지만 자식만큼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게 해주고 싶었다"라고 감동의 답변을 날릴 것이다. 그럼 "어머니!"하고 부둥켜안고….

앗! 이런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다.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곧 새해다.

나는 다이어리를 하나 샀다.

생활을 알차게 꾸려준다는 값비싼 플래너도 있었지만 이제는 단 돈 100원에도 손이 부르르 떨릴 형편이다.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일을 하기로 하고 저녁부터 밤까지 시간을 자기계발로 가꾸기로 했다.

▲ 매일 완성해야 하는 다섯 가지 임무
ⓒ 김수원
매일 다섯 가지 영역 속 임무를 정했다. 건강한 몸을 위해 '운동'을, 생동 있는 삶을 위해 웹 속에서 '생산'을, 생각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외국어'를, 사기 당하지 않고 똑부러지게 살기 위해 '사회'를, 취미이자 특기인 사진을 키우기 위해 '기술'을.

하나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까지는 그 정도에 따라 3단계로 나타낸다. 1단계는 속이 빈 동그라미. 2단계는 반이 채워진 동그라미. 3단계는 꽉 찬 동그라미.

그래도 점수를 너무 짜게 주다보면 능률이 오르지 않을 수 있으므로 유난히 지치고 힘든 날 동그라미를 칠 때는 손이 잘못해서 '삑사리'가 난 것처럼 빈 동그라미를 더럽혀도 무방할 듯. 자주 그러면 곤란함.

▲ 그날그날 해야할 일을 꼼꼼히 적어둔다.
ⓒ 김수원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특히 인터넷만 하면 접속 목적을 잊어버린 채 어느 연예인 사진을 주시하고 있다. 다이어리 빈 공간에 줄을 그어 칸을 만들었다. 먹고 자는 것 뺀 나머지 해야할 일을 낱낱이 적고 해치운 일을 표시한다. 심부름에서 손톱 깎는 것까지 적어 놓는다.

▲ 오른쪽 큰 여유 공간에도 줄을 그어 사용한다.
ⓒ 김수원
일주일 안에 차근차근해야 하거나 바쁘게 기록할 것들은 다른 여유 공간을 활용한다. 그 면은 일주일 내내 보면서 작은 '부담'을 심어둔다. 급하진 않지만 알아봐야 할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 월별계획표를 이용한 용돈기입장이 아닌 가계부
ⓒ 김수원
소득이 많지 않더라도 가계부를 쓴다. 월별계획표에서 하루를 2등분해서 반은 가계부로 쓰고 나머지 반은 중요한 일정을 적어둔다. 수입의 반은 꼭 저축한다고 다짐하고 돈을 쓰지 않은 날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부산지하철 요금이 올해부터 올라 교통카드를 이용하면 810원이 든다. 버스요금은 800원. 10원 차이다. 4일부터 버스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1, 2일 휴일보다 평일 검은 동그라미 수가 줄어들었다. 휴일에는 마구잡이로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평일에도 저녁부터 피곤이 몰려오지만 동그라미 하나라도 더 채우려고 애썼다. 남들은 '작심삼일'을 들먹이며 그렇게 해서 며칠이나 하겠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어머? 이를 어쩌나? 4일이 지나고 오늘이 5일째네?

나는 '작심삼일'을 극복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글씨가 별로 예쁘지 않아 지저분하고 많이 산만해 보이지만 독자 여러분들은 더욱 잘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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