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마니로 짠 덕석을 띄워 보온을 했던 당시의 호강하는 소 한마리.
가마니로 짠 덕석을 띄워 보온을 했던 당시의 호강하는 소 한마리. ⓒ 김규환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했다. 그깟 바늘 하나 훔쳤다고 소도둑이 된다고 하면 '세살 버릇 여든까지'나 하등 다를 바 없다. 이 두 속담이 갖고 있는 문제는 어떤 사람을 싹수가 노랗다고 미리 단정하여 개과천선은 아예 물 건너간 것으로 취급하는 데 있다. 어린 아이라면 더 심각해진다.

그런데 실제 소도둑이 있었다. 때는 1978년 4학년 겨울밤이었다. 어제 남은 쇠죽을 한 양동이 퍼주고 새로 앉혀 불을 지피려는 큰아버지가 외양간에 가보니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까무러칠 듯 놀랐지만 큰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고 해서 기침소리 나는 동생네 우리 집을 향해 큰소리로 말씀을 하셨다. 아랫방에 자고 있던 나는 아버지가 일찍 깨어 부스럭거리며 나무를 꺾어 불 때는 소리를 이미 들었던 터라 큰아버지 다급한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어이 일어났는가? 큰일 났단말이시."
"왜 그요 성님?"
"딴 것이 아니라 우리집 부사리가 없당께."
"뭐라고라우?"
"소를 훔쳐가부렀어."
"욘녀러 색끼들! 카만 있으쇼 내가 오늘 장날인께 옥괴장에 가보면 고새 찾을 것이요."
"서둘러야 된당께. 어여 가보자고."

한술 뜨고 가셔야 한다는 어머니의 시숙에 대한 배려는 빠지지 않았다. 부지깽이를 든 채 큰아버지마저 집으로 오셔서 계수씨가 끓인 밥에 김치 하나 놓고 부랴부랴 한술씩 뜨시고 30리 길이 넘는 곡성군 옥과장으로 가신다. 마침 장날이었다.

큰집은 허술했다. 나를 낳기 전 우리 집이 있던 헛간이 곧바로 대밭과 연결돼 있어 쌀가지 살쾡이가 제집 드나들 듯했다. 닭도 낮엔 대밭에서 벌레와 풀을 뜯어먹다가 해름판 해질녘에 돌아오는 길목이었고 사람들은 넉살좋게 주인허락도 받지 않고 산에나 들에서 일을 하고서는 곧장 큰집 마당을 가로질러 다니기도 했다.

나는 그사이 눈곱도 떼지 않고 달려가 보았다. 정말로 외양간이 나간 집구석 마냥 휑하니 텅 비어있었다. 어제까지 올망똘망 커다란 눈을 부라리고 콧방귀 뿡뿡 뀌며 쇠죽을 맛나게 먹던 얌전했던 황소는 온 데 간 데 없다.

빗장은 풀려 마당에 뒹굴고 거적은 뜯겨 있었다. 외양간 앞으로 채 삭지 않은 외양짚이 널브러져 있다. 풍경은 얌전히 빼서 구유에 놓아뒀다. 응달이라 채 녹지 않은 마당엔 쇠똥이 약간 묻은 발태죽(발자국)이 또렷이 나 있다.

분명 도둑은 동네 한가운데를 통과하지 않고 뒷골 쪽으로 왔을 테지만 혼자는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혼자서는 무서워서 다른 마을 외진 길을 맘대로 오지 못한다고 했다. 어른들이 내린 또 하나의 결론이 있었다. 큰집 속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들 소행이라는 점이다.

어른들이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나 움직이므로 첫닭이 울기 전에 와서 나대는 수소를 끌고서 장에까지 갔다면 달음질로 뒤쫓으면 장마당 근처나 막 쇠전이 열리고 있는 곳에 당도했음직하다고 했다.

큰아버지는 우리와 달리 소를 참 예쁘고 깔끔하게 기르셨다. 농사와 소 키우는 일이 유일한 낙이라 날마다 새로 지푸라기 한 다발을 넣어 보온을 철저히 했고 소똥이 묻지 않게 해줌은 물론 쇠로 된 빗으로 털을 쓱쓱 빗겨주어 긴 털은 하나도 없고 살에 찰싹 달라붙은 몽실몽실한 잔털만 있어 반지르르 윤기가 났다.

게다가 우리 집처럼 식구가 많지도 않거니와 국물과 밥알 하나도 남기지 않은 돼지를 예닐곱 마리나 기르던 우리와는 달리 뼈만 빼고 쇠죽솥으로 직행했고 방아 찧어 눅까(가늘고 몽근 쌀겨의 일본말)가 생기면 한 마리에게 모두 몰아주었으니 배가 홀쭉 꺼지는 법 없이 항상 불러 있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길렀던 가보 1호를 훔쳐갔으니 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두 분이서 다급해진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논이나 밭을 갈 때나 멀리 이동을 할 때 농작물을 뜯어 먹지 못하게 주둥망을 씌운 소. 재갈을 물리기도 했다.
논이나 밭을 갈 때나 멀리 이동을 할 때 농작물을 뜯어 먹지 못하게 주둥망을 씌운 소. 재갈을 물리기도 했다. ⓒ 김규환
마을을 빠져나가 논둑길로 뛰었다. 학교 모퉁이를 지나 도둑거리 앞을 지나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도 세 윗마을로는 가지 않았겠지.' '내 요놈들 잽히기만 해봐라. 혼쭐을 내고 말텨.'

온갖 상상을 했단다. 가봐야 산뿐이니 무조건 큰 걸 훔친 사람들은 아랫마을 송단-원리에서 선세재를 넘어 오산을 거쳐 호남고속도로 사거리를 통과하여 옥과읍내로 갈 것이다.

끝자리 3일과 8일에 장이 서는데 마침 가던 날이 장날이라 팔고서 손을 털기도 쉽지만 필시 그리 올 것이라는 확신에 서두르기만 하면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무작정 달렸다.

당시 소를 팔려면 누구든 주둥망을 입에 씌우고 코뚜레를 한 손으로 잡고 소꼬뺑이(코뚜레에 연결하여 나대지 못하도록 연결한 단단한 나일론 줄)를 짧게 매서 직접 끌고 가야 했다. 소도둑들이 조직적일 수 없었던 건, 순발력의 기본인 차량이 없을 때라는 점과 도로 사정이 차가 다닐 만큼 원활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여전히 응달엔 소 발자국이 있었다. 쇠똥도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오산면사무소 근처에 다다르니 날이 환히 샜다. 물 한 모금 얻어먹고 죽기 살기로 마저 뛰었다. 그나마 큰 길이라 광주로 향하는 광신여객 버스가 지나더란다. 앞을 막아 차를 세워서 타고 십여 리를 더 가니 옥과, 쇠전이 있던 옥과장이다.

면소재지지만 광주와 순천 중간 길목에 있던 옥과장은 대목장이 멀지 않은 시기라 차츰 열리는 시간도 빨라지고 장이 커지니 사람들 발길도 잦아 훨씬 붐볐다.

한눈팔지 않고 형제는 곧바로 시장 맨 뒤에 자리잡은 우시장으로 향했다. 버스 덕분에 시간을 1시간 가량 절약한 두 분이 도착해보니 쇠양치(송아지)가 털레털레 모이고 있고 큰 소 성우(成牛)는 따로 말목에 묶여 팔려나갈 운명이었다.

조금씩 훑어나가는데 조금 이른 시간이라 살 임자가 나타나지 않고 다들 국밥집 주변으로 몰려 있었다.

"어이 용십(용섭)이 쩌거 아닌가?"
"예, 찾으셨수?"
"저거 말이시 저것이 맞아."
"맞구만이라우. 가만히 지켜보다가 매가지(모가지)를 따버립시다."
"별일 없게 처리하소."
"알았어라우. 염려 말고 지켜만 보싯쇼."

소피를 누고 다시 나타난 묶인 소를 마치 제 것인 양 찾으러 온 사람은 옆 동네 강례 사람 둘이었다.

"네 이노옴~"
"아니 그게 아니고라우~"
"이 호랭이 물어갈 놈들이 소도둑이 아니고 뭐여? 이것이 니기들 소 맞어?"
"아따 놓고 말허싯쇼."
"그려 이놈들아 우리 성님 소다. 니기들 지서로 갈텨 순순히 내놓을 거여?"

사람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잡아버린 쾌거였다. 두 사람 이름과 얼굴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에 그 자리에서 소 꼬뺑이를 건네받은 조건으로 아무 일 없던 것으로 하기로 했다. 아직 내다 팔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우리의 용감한 두 형제들은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비우고 30리 길을 다시 돌아왔다.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무슨 소식이 올까 손꼽아 기다렸지만 전화가 없던 시골마을이요, 십리를 걸어 첫차에 몸을 실어 장에 간 사람들은 아무 영문도 몰랐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두 분이 돌아오시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껏 두 분은 이 일을 불문에 붙였다. 두 분 중 동생인 아버지는 몇 해 전 돌아가시고 큰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사촌형 집에서 건강하게 살고 계신다. 마침 그 시절 소도둑이 극성이었던 건 다들 서울로 광주로 농토를 버리고 떠나던 때와 무관하지 않다. 돈 벌러 간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거니와 한몫 잡아보겠다는 욕심이 생길 때였다.

그 뒤론 빗장에 꺽쇠가 채워졌고 아무나 마을을 얼씬거리면 의심받기 일쑤였다.

허리가 매끈하게 쭉 빠진 소는 크게 자랄 소다. 풍경 소리만 듣고도 소가 잘 자는 지 알았던 고요한 시골마을이 그립다.
허리가 매끈하게 쭉 빠진 소는 크게 자랄 소다. 풍경 소리만 듣고도 소가 잘 자는 지 알았던 고요한 시골마을이 그립다. ⓒ 김규환


글쓴이가: 위 내용은 두 분이 그날 술잔을 기울이며 들려준 이야기와 내 기억을 되살려 쓴 글이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