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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비평사
새로운 분야의 서책을 읽는다 함은 유쾌하고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낯선 지식여행이 부여하는 지적 산책의 즐거움과 더불어 매우 생경한 영역과 대면함으로써 야기되는 어려움이 빛과 그림자처럼 동행하기 때문이다. 한국과학기술원에 재직하는 신동원 연구교수의 저작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는 바로 그런 유형의 서책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책에는‘몸과 의학의 한국사’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로 다루는 의학의 역사는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 그리고 현재의 시간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역사서는 중국은 물론이려니와 일본과 비교해서도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출현 시기도 매우 늦기 때문에 자료와 정보의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일본서기>가 720년에, <삼국사기>가 1145년에 편찬되었음을 기억하시라).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는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고통 받는 몸의 역사’에서 저자는 호열자와 두창이나 티푸스 계통의 역병을 다채롭게 소개하면서 ‘단발령’과 위생의 상관성을 살핀다. 아울러 ‘전녀위남법’에 얽혀있는 아들에 대한 뿌리 깊은 욕망의 역사를 들춰내고, <변강쇠가>와 <심청전>에서 읽히는 질병과 장애의 사회사를 제시한다.

제2부 ‘역사 속의 의료생활’에서는 조선시대의 의료기관들인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를 소개하고, 텔레비전 드라마 <대장금>으로 널리 알려진 의녀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여기에 대한제국 말기에 도입된 서양의술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덧붙여진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와 2000년 의사파업을 연관하여 현대의학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제기한다.

제3부 ‘한의학이냐 서양의학이냐’에서는 한국의학과 중국의학, 나아가 동아시아 의학의 관련성에 대해 자세히 논의한다. 이런 토대 위에서 조선후기의 정약용과 최한기 등과 같은 실학자들의 한의학과 서양의학에 대한 견해를 검토한다. 그 이후에는 식민지 조선과 현대의 한의학과 서양의학 사이의 관계설정과 그것의 진척양상에 주목한다.

이렇게 살핀다면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는 어떤 일관된 목표와 전략을 가지고 저술되지는 않았음이 분명해진다. 상호연관성이 불분명한 항목들이 공동의 소제목 아래 소란스럽게 동거하고 있으며, 다루는 시간대 또한 들쭉날쭉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이 점을 서책의 서론격인 ‘책을 내면서’에서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여러 형태의 글쓰기를 시도합니다. 중요한 테마를 짧은 분량에 거시적으로 훑는 방식의 글쓰기가 절반 정도 됩니다. 나머지 가운데 어떤 것은 개념과 사건의 기원을 추적하며, 어떤 것은 소설에 담긴 사회상의 단면을 읽어냅니다. 원래 이 책은 특별히 구상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난 수년간 썼던 여러 형태의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11쪽)

그럼에도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를 관통하는 몇 가지 흐름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의학을 통해서 본 근대에 대한 논의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양의(洋醫) 알렌과 ‘제중원’으로 표상되는 서양의술의 전파와 보급, 선교 목적으로 설립된 기독교 계열 병원들, 그리고 일제가 주도한 ‘대한의원’과 ‘자혜의원’ 등에 내재된 식민지 경영의 이면을 낱낱이 드러냄으로써 진행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의방유취>와 <동의보감>, 강명길의 <제중신편>과 황도연의 <의종손익> 및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등의 의서를 중심으로 한 조선 한의학과 동아시아의 한의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 우두법의 도입과 관련된 ‘지석영 신화’와 식민지 조선에서 9개월 동안 지속된 ‘한의-양의논쟁’이 덧붙여짐으로써 마무리된다.

이와 같은 논의들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총괄한다.

“과학, 계몽, 근대는 위로부터 강요된 이데올로기였지만, 그것과 현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근대화를 모토로 삼으면서 식민통치 지배자가 내걸었던 조선인의 건강개선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선진적인 의료혜택의 증가도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의 ‘근대’는 물리적 실체를 지닌 여러 가치의 충돌, 대립, 절충, 상호침투를 통해 짜여진 결과물이었다.” (352-353쪽)

이런 비판적인 시각으로 저자는 2000년 남한사회를 혼란과 당혹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의사파업을 진단하고 평가한다. 인술로 간주되는 의술개념이나 의사윤리강령으로 오늘의 병원과 의사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숭고한 온정적인 의술윤리가 아니라 의술과 사회, 의사와 환자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정립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는 딱딱한 의학전문서적이 아니며, 그 때문에 서책은 출중하게 대중성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가루지기타령’, ‘횡부가’, ‘송장가’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던 ‘변강쇠타령’을 1821년 신사년의 괴질, 즉 콜레라(호열자)와 연결하여 해석하는 대목은 흥미와 더불어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콜레라의 창궐로 인한 폐해, 성과 성애, 조선후기의 의료생활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심청전으로 본 맹인과 장애의 사회사’에서 저자는 문학작품을 역사해석의 1차 자료로 활용하면서 19세기 조선사회를 독서한다. 맹인이 되는 연유와 그들의 선택 가능한 직업, 장애자로서 맹인, 국가의 장애대책 및 살신성효(殺身成孝) 문화 등에 대한 소상한 지적은 우리의 대표적인 고전인 <심청전>을 재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 동기를 선사한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이란 말이 있다. 늙어서 아내 없는 사람을 '환’, 젊어서 남편 잃은 여자를 ‘과’, 어려서 어버이 여읜 사람을 ‘고’,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을 ‘독’이라 한다. 그런데 심봉사는 <경국대전>까지 천하의 악병으로 간주한 장님에다가 ‘환’의 고통을 더하고, 마침내 청이마저 잃어버림으로써 ‘독’의 고역을 치른다. 최악의 상황인 셈이다.

독서하는 재미와 유익한 정보를 두루 싣고 있는 서책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는 풍부한 그림과 사진자료를 동원하고 있어서 영상과 화보에 익숙한 젊은 세대의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의료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요즘 자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이웃과 세상의 건강과 의료에 대한 관심을 고양하는데 쓸모 있는 서책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몸과 의학의 한국사), 신동원 지음, 역사비평사, 2004.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 몸과 의학의 한국사

신동원 지음, 역사비평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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