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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순이 넘은 동네 어르신들
ⓒ 장승현
칠순이 넘으신 동네 어르신들

요즘은 연말이라 동네에서 매일 곗날이다. 어제는 장씨들 종중계라고 동네 스피커에서 알리더니 오늘은 동네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쓰는 그릇계라고 했다.

어머니는 "야, 일두 읎는디 발발거리구 쏴댕기지 말구 오늘은 동네계 좀 나가라, 그러다 동네에서 인심 잃어!"라고 하신다.

그릇계란 옛날에 동네에서 잔치할 때마다 그릇을 쓰고 함께 큰일을 봐주는 계였다. 1년에 한 번씩 연말에 만나서 술도 먹고, 회의도 하고 1년을 정리하는 모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고향에서 도시에 나갔다가 20여 년 만에 돌아온 게 3년 전이었다. 그동안 고향은 옛날 그대로였고 간혹 새로 들어온 가구가 몇 있고 저수지 근처엔 식당을 중심으로 부락인 같지 않은 부락인이 몇 생겼다. 그 중에 마흔 둘인 나는 동네에서는 막내급이었다.

풍년하우스라고 동네 사람이 하는 식당에서 사람들 삼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옆집에 사시는 이씨 아저씨도 보이고, 옛날 여자 친구 아버지이신 김씨 아저씨도 보였다.

"아니 형님, 뚝방에 불장난을 했으믄서 왜 불 안 끄구 왔슈. 그러다 불나믄 클나유."
"그려, 꺼진 줄 알았는디, 불씨가 남었나?"

▲ 007 가방
ⓒ 장승현
007 가방

유사라고 봉식씨가 공공칠가방을 하나 들고 오더니 펼쳤다. 거기엔 두루마리 장부가 두어 개 있었고, 요즘에 만들어 놓은 가계부 노트가 두 개 있었다. 그릇계 장부라고 써 있는 장부를 펼쳐보니 옛날 한자로 잘 정리되어 있는 그릇계 회칙이 보였다.

▲ 서고부락 회칙
ⓒ 장승현
그걸 한글로 정리해 보면,

서고 부락 회칙

1. 서고 부락에 거주하는 자는 이 회의 회원 자격을 득
2. 신입 거주자는 이 회에 가입하되 회비로 대두 정 1되를 이 회의에 납입하기로 함
3. 이 부락에 거주하다가 타 부락으로 전거할 시는 이 회의 회원자격을 자연상실하기로 함
4. 회의 기본금을 부락 사정에 의하여 증가하기로 함
5. 부락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시는 회원 과반수 이상 승인을 득하기로 함
6. 회 중 물품을 회원 이외 대출할 시는 대표자가 책임을 지고 별정 요금을 요구함


대체로 두루마리에 한자로 적혀 있는 회칙은 이런 내용이었다.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반갑게도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이 나왔다. 그러니까 40년 정도 되던 시절에 내 나이 쯤 되었을 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 두루마리에 적힌 아버님 성함
ⓒ 장승현
두루마리에 적힌 아버님 성함

"통장에 남은 것 보니께 돈이 많이 남아 있는디. 환갑 안 넘은 사람이 여기 보니께 4명밖에 없어요. 여기 모이신 분들이 다들 환갑 넘으신 분이니 이 돈 뒀다가 뭐할규? 내년부텀 노인네들 관광이나 보내주자고요. 나중에 모자라면 젊은 사람들이 걷으면 되고요."

항상 입 바른 말 잘 하는 봉현이형이 화두를 꺼냈다. 다들 찬성이었고, 30명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사자라 아무 발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내년에는 이런 식당에서 모이지 말고 돌아가면서 옛날처럼 집에서 음식 좀 푸짐하게 준비합시다. 동네 안안팍이 다 모여야지. 한 집에서 한 사람씩만 이렇게 참석하라고 하면 이게 무슨 동네 계에요."
"일년에 한 번씩 동네 사람들 다 모여 술 한 잔 하는 건데. 식당에서 모이니까 이렇게 인심이 없어져요."

모인 시간이 아침나절이었는데도 벌써부터 소주잔이 돌아갔다. 술안주가 모자라니, 점심 밥때가 너무 이르다니, 몇 마디를 하자 주문하지도 않은 밥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골의 긴 겨울날 농사를 다 지어놓고 겨우내 하는 일들이 이런 일들이었다.

얼마전에는 동네 형들이 고기를 잡는다고 경운기, 트랙터 등을 동원해 냇가를 막아 물을 품어 고기를 잡기도 했다. 조금 날이 더 추워지면 삽자루를 들고 독막골이나 절골로 미꾸라지 잡으러 다니겠지? 요즘은 나무할 일도 없고, 텔레비전이 낮에도 나와 옛날처럼 사랑방에 모여 앉아 있을 시간도 없다. 옛날에는 겨울에 어른이든 아이든 사랑방에 모여 만나기만 하면 노름이든 뭐 사먹기 뽕이든 화투를 많이도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풍경들도 없어져 가고 있었다.

앞으로 5년만 지나도 우리 동네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아니 10년이면 우리 동네는 모두 빈집이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동네가 될 텐데. 이런 계도 없어지고, 동네 사람들이 정겹게 만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하긴 지금도 결혼식장이다, 장례식장이다, 집에서 하는 큰일은 거의 없다. 그러면 그릇도 필요 없고 그걸 쓰는 사람도 없어지니 우리들의 전통적인 이런 계야말로 사라져가는 풍경 중에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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