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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며칠 앞둔 지난 20일, 베들레헴을 다녀왔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군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들어가고 나가는 모든 차량을 일일히 통제하고 있었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외길로 만든 통로로 나가는 차와 들어가는 차를 한 대씩 번갈아 교차시키던 것을 한 방향으로 20~30여대를 내리 보내고, 교대로 반대 방향 차량을 통과시킨 것이다. 아마도 시간대에 따라 몰리는 차량을 적절히 조절하여, 어느 한쪽이 길게 늘어선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 듯했다.

덕분에 검문소에 도착하자마자 들어가는 차량 밑 뒤에 붙은 관계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검문소를 들어서자 반대편 차선엔 나가려는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아라파트의 베들레헴 정치학

▲ 베들레헴 광장에 들어오는 교황
ⓒ 이강근
매년 12월이면 두세 번씩 베들레헴을 찾아왔건만, 베들레헴 거리가 이렇게 한산하긴 처음이다. 4년 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 전만 해도 베들레헴은 12월 한 달에 10여만명의 순례객들이 찾았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길은 네온이 거리와 가로등과 잘 조화되어 장식되어 있었다. 베들레헴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아라파트 사진들이 붙어 있다. 지난 11월 11일 있었던 아라파트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축제 분위기를 자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베들레헴과 아라파트. 사실 야세르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의 수반으로서 그의 자치시 베들레헴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 베들레헴이 팔레스타인 자치시로 이양되면서, 아라파트는 성탄의 도시 베들레헴을 서방 기독교 국가들의 관심을 끄는 데 적절히 이용했다. 매년 12월 24일 베들헤렘에서 열리는 자정 미사는 기독교 서방 국가의 외교관과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다. 뿐만 아니라 이 미사는 세계 주요 언론을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베들레헴이 자치시로 이양된 직후 3일만에 맞이한 1995년 12월 24일, 야세르 아라파트는 베들레헴 성탄절 자정미사에 전격 참석했다.

1995년 12월 21일 저녁, 27년간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을 점령했던 이스라엘군이 무장 엄호를 하며 베들레헴을 떠났다. 그리고 몇 분만에 이스라엘 군이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 철조망은 베들레헴 시민들에 의해 주저앉았다. 지난 27년간 베들레헴 팔레스타인의 삶과 인권을 말살 당한 데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그리고 3일 뒤, 회교도인 아라파트는 성탄 이브 자정미사에 전격 참석했다.

성탄 자정미사는 미사가 중심이지만, 그해 참석한 고위 인사들이 간간히 화면에 잡혔다. 당연히 맨 앞좌석에 자리잡은 아라파트는 그해 언론의 초점이 됐다. 이후 그는 2001년까지 매년 베들레헴을 찾아 성탄 자정미사를 드렸다.

▲ 교황과 만난 아라파트
ⓒ 이강근
지난 2002년 아라파트가 라말라의 집무실에 감금되었을 때 그는 40여km 떨어진 베들레헴까지 걸어서라도 자정미사에 참석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결국 길이 열리지 않았다.

2000년 3월, 밀레니엄 첫해 이스라엘은 교황의 성지 방문을 여러 고비 끝에 성사시켰다. 교황으로서는 36년만에 성지를 방문하게 된 것으로 유대인과 교황청간의 화해의 행사였다. 7일 동안 이스라엘을 공식 방문한 교황은 매일 대형 집회를 열었다. 3월 24일에는 갈릴리 북부 코라진(고라신)에서 10만의 군중을 모아 놓고 초대형 집회를 열었다. 당시 행사를 주도한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 최대의 기자단이 찾는 초대형 행사를 열었고, 교황 방문으로 인해 수행 참석한 10만명 이상의 관광 수치를 기록했다.

여기에서 아라파트는 교황의 성지 방문 서두를 자신의 자치도시 베들레헴으로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첫 집회 장소를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헴으로 주선한 것이다.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헴을 방문 첫 장소로 정하는 데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베들레헴은 역사 이래 가장 많은 기자들의 관심을 받았고 아라파트는 성지 중의 성지 베들레헴이 이스라엘이 아닌 팔레스타인 땅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준비는 이스라엘이 하고, 그 첫 언론 세례는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이 받은 셈이다.

폭우가 준 뜻밖의 예루살렘 방문

아라파트가 베들레헴을 마지막으로 찾은 것은, 그가 라말라에 감금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유혈 분쟁 발발 1년만인 2001년 12월 24일, 이스라엘은 그의 베들레헴 미사 참석을 막지는 않았다. 폭우 때문에 그의 미사 참석 여부는 불투명했지만, 결국 그는 가자에서 헬기를 타고 베들레헴에 도착해 미사에 참석했다. 종교적인 행사였지만 그가 공식적인 집회에 출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 이강근
그러나 가자로 돌아가려는 그의 헬기는 거세진 폭우로 끝내 이륙하지 못하고 육로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이스라엘 경찰은 그의 육로를 허가했고, 그 방법은 예루살렘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베들레헴에서 가자로 가려면 반드시 예루살렘을 경유해야만 했다. 아라파트의 갑작스런 육로행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예루살렘은 아라파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제2의 고향이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난 아라파트는 그의 어머니 친척집인 예루살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아라파트의 정치적인 역경 때문에 이후에는 한번도 예수살렘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그는 예루살렘을 찾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여러 차례의 방문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라파트는 예루살렘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는 그의 소명은 쉽사리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예감 때문인지 그는 죽어서라도 예루살렘에 묻히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아라파트는 자신이 죽으면 예루살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여러 차례 남겼다.

베들레헴을 떠난 아라파트는 20여km의 헤브론 길을 따라 폭우를 뚫고 10여분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성벽을 훤하게 비취는 야경 조명, 예루살렘의 상징인 다윗 망대. 아라파트의 눈에 들어온 예루살렘 모습이었다.

예루살렘 성 앞을 지나던 아라파트의 차량이 시속 30km 이하로 속력을 늦추었다. 아라파트를 앞뒤에서 호위하던 이스라엘 경찰은 그의 저속을 막지 않았다. 이스라엘 신문 <하아레쯔>는 다음날 그의 예루살렘 관망 소식을 살짝 실었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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