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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김병진씨
재일교포 김병진씨 ⓒ 평화뉴스
- 어떻게 해서 보안사에 끌려갔나?
"당시 재일교포 유학생으로 한국에 건너와 연세대를 졸업해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83년 7월에 보안사 사람들이 찾아와 '당신 후배가 데모하다 잡혔는데, 신원확인을 위해 함께 가야한다'면서 보안사로 끌고 갔다. 일본의 친북세력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몰려 석 달 동안 감금돼 고문을 받았다. 끝까지 자백하지 않아 공소보류 처분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보안사 일을 시켰다."

- 보안사에서 어떤 일을 했나?
"유학생이기 때문에 나를 통역으로 써먹었다. 일본어로 된 우편물을 번역하거나 감청·도청한 테이프를 번역하는 일은 물론, 유학생을 간첩으로 만들 때도 내가 통역을 했다. 억울하게 끌려와 고문당하는 모습도 무수히 봐야했다. 보안사는 처자식을 인질로 잡은 채, 아내는 윤락녀로, 어린 아들은 고아로 만들겠다며 나를 협박했고, 자살을 하지 않는 이상 내가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 탈출해 고발해야겠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보안사 일을 1년 반 정도 했을 때, 보안사의 실체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86년 여름에 마지막으로 대구를 찾아 조부모님의 묘 앞에서 일본으로 탈출해 이 내용을 고발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억울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됐기 때문에 반드시 밝혀야만 했다. 그래서, '보안사 촉탁요원'으로 목숨을 부지하다 86년 대학원 졸업준비를 해야 한다며 일본으로 탈출해 책을 쓰게 됐다."

- 책 <보안사>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나?
"보안사에서는 없는 간첩도 만들어낸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잡아와 일본에 있는 친척, 친구 등 모든 사람과 연관시켜 친북세력으로 만든다. 상상할 수 없는 폭행과 고문이 가해지기 때문에 자살해버리는 사람도 많다. 또 정신교육을 시켜 프락치 활동을 하게 만든다. 이런 실체를 낱낱이 밝히고 그 가해자들의 이름도 모두 실명으로 했다. 피해자들은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실명으로, 아닌 사람은 가명을 사용했다."

- 일본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불안 속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우리가 있는 곳을 몰라 처형에게 계속 협박전화를 했고, 그 뒤로는 집으로도 매일같이 국제전화로 협박이 계속 됐다. <보안사>는 일본에 오자마자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불안해 칼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가족의 생계문제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학원강사, 목욕탕 청소부 등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

한국에서의 기억은 아내에게도 나에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내는 지금도 나와 관련된 기사는 보지 않는다. 그때 생각이 계속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은 덜하지만 아직도 가끔씩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피해자 응어리는 얼룩진 역사로... 과거사 청산 서둘러야"

ⓒ 평화뉴스
- 현 정부의 개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 마디로 너무 답답하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과거사진상규명법 등 처음에 개혁하겠다는 목소리가 다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모르겠다. 예전에 만난 어떤 사람은 학생운동을 하다 고문을 받았는데, 술만 먹으면 그때 기억이 떠오르고 억울함을 주체하지 못해 처자식에게 주먹이 간단다. 피해자들에게 응어리로 남아있는 기억은 곧 얼룩진 역사로 남게 된다. 하루빨리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또, 독재정권 청산은 피해자 진상규명과 함께 당시 수뇌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책임문제도 반드시 거론돼야 한다. 피해자를 고문한 뒤 숨어서 우는 고문관도 직접 봤다. 이들도 어떻게 보면 독재정권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제시대 때 돈을 벌기 위해 조부모님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갓난아기였던 아버지도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자랐고, 나도 일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말을 항상 들어왔다.

대구에 있던 본가는 6·25 때 인민군이 불을 질러 사라졌고, 친척 중에 한 명도 총에 맞아 숨졌다. 일본에 와서는 조선인이라는 차별에 시달리며 인정받지 못했고, 한국에 가서는 간첩혐의를 받아 끔찍한 일을 겪었다. 이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인이고, 내가 돌아갈 곳은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하루빨리 과거사 청산이 이뤄지기만 바랄 뿐이다."

김병진씨는 현재 일본 오사카에 살면서 생활협동조합(생협)에서 한국어 강좌를 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한·일 생협 교류가 시작되면서 통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김지하 시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생명과 평화의 길'에서 일본 사무를 맡고 있다.

김씨는 어제(10일) 대구에 도착해 영천과 대구의 지인을 만난 데 이어 오늘 오전에 칠곡에 있는 조부님 묘소를 성묘했으며, 내일 대구의 한 성당에서 강연한 뒤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15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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