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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 장 생사(生死)

죽음과 삶은 경계(境界)가 없다. 살고 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차이는 천양지차지만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의 감정이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곁에 있고, 삶은 시작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키우고 있는지 모른다.

천하의 갑부(甲富)라도 죽으면 그만이다. 어제만 해도 중원에서 손꼽을 부호요, 중원 상계를 양분하고 있었던 산서상인의 오대수장(五大首長) 중 한명으로 중원의 상계를 휘어잡고 있었던 양만화는 죽었다.

그 죽음이 천수(天壽)를 누리다 죽거나 고질병으로 인한 단순한 죽음이었다면 많은 문상객들로 붐비었을 터였다. 하지만 양만화가 죽는 그 순간부터 그는 죽을 죄를 지은 자로서 당연히 죽어야 할 죽음으로 변해 버렸다. 그를 애도하는 것 자체도 죽을 죄를 진 자와 똑같이 취급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보다 그에게 빌붙어 먹고 살았던 자들이 오히려 그를 욕하고 매도했다.

그것이 인심(人心)이다. 죽음만으로 가득 찬 그곳은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다. 오전 한나절 만에 값이 나갈 것 같은 물건은 모두 노략질 당하고 난 뒤였다. 무림인들이 모습을 보인 오후에서야 눈치를 보며 물건을 훔쳐 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양만화의 시신은 중앙 대청의 의자에 앉혀져 있었다.

기름이 흐르던 얼굴은 퉁퉁 부은 채 시퍼렇게 멍이 들고 피가 말라 붙어 있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살아 생전 그 자리에 앉아 아랫사람들을 부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흉한 몰골로 고개를 꺽은 채 핏덩이가 되어 있었다.

“지독하군..... 단 하루도 못되어 이렇게 폐허가 될 수 있다니....”

팽악이 혀를 차며 탄식처럼 첫 말을 내뱉었다. 구양휘 일행은 유시(臾時) 말이 되어서나 양만화의 저택에 도착했다. 이미 새벽녘에 초혼령이 휩쓸고 지나 간지 거의 여섯 시진이 지난 뒤였다.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시신들의 냄새와 노략질을 하고 난 뒤에 펼쳐진 광경은 전쟁이 휩쓸고 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초혼령의 행사는 은밀하고 잔인했다. 신비스러움과 함께 그러한 잔인함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더욱 큰 공포감을 심어 주는지 몰랐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슬퍼해 지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드는 것을 만장(輓章)이라 하는데 이것은 장례시 상여 뒤를 따랐다가 장례식이 끝나면 빈청에 보관되기도 한다. 헌데 양만화의 시신 곁에는 그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마치 만장처럼 양만화에게 내려진 천고문(天鼓文)이 걸려 있었다.

다만 그의 죄상을 열거한 것은 처음의 것과 같았으나 마지막 글귀는 치죄(治罪)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죄인 양만화는 스스로 죄를 뉘우치지 아니하고 갱생의 길을 거부하였으므로 그의 식솔과 함께 참형에 처해 만인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열두시진 동안 그의 시신을 공개하니 건드는 자가 없도록 하라. 영락 육년 초혼령주]

열두시진... 만 하루 동안 양만화의 시신을 건들지 말라는 경고다. 친인(親人)이라 할지라도 열두시진이 지난 다음에야 시신을 수습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초혼령주의 글귀 옆에는 핏빛으로 초혼령패의 낙인(烙印)이 찍혀 있었다.

여의주를 잡아가는 듯 비상하는 용(龍)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환혼(還魂)이란 글귀가 뚜렷하게 보이는 초혼령의 문양.

“..........!”

너무나 낯이 익다. 저 모양은 자신에게 너무 친숙하다. 담천의는 천고문을 보자마자 얼어붙은 듯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왜..... 왜 저 문양이 저곳에 낙인되어 있는 것일까?

그의 시선은 초혼령패가 낙인된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세상의 악(惡)을 징벌한다는 명분 아래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인 악(惡)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

너무나 잔인하고 황폐화된 모습을 본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화려한 궁장(宮裝)에 궁장형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이다. 아쉽게 얼굴은 면사로 가려져 있어 미모를 알 수 없지만 그 자태만으로 아름답다.

남궁산산(南宮珊珊). 무림세가 중 가장 전통있는 가문인 강남 남궁가(南宮家)의 여식으로 서가화와 더불어 강남삼미(江南三美)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재녀. 그녀의 미모뿐 아니라 뛰어난 두뇌로 인하여 남궁가의 꾀주머니로 불린다.

그녀는 구양휘 일행이 장안(長安)에 도착하자마자 삼십대 중반의 구렛나루 수염이 덥수룩한 광도(狂刀)라는 사내와 함께 일행에 합류했다.

“인간으로서는 풀 수 없는 숙제겠지.”

공감한다는 듯한 구양휘의 대답이었다. 그도 많은 무림인들을 상대했고, 그 중에는 그의 검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았다. 반드시 죽어야할 악인이라고는 하나 죽인 뒤 언제나 기분은 언짢았다. 인간을 인간이 심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초혼령이라 해도 이건 좀 지나치군요. 소문대로 쥐새끼 한 마리 남김없이 쓸어 버렸으니....”

양만화의 장원에 도착하면서부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던 팽악이 혀를 찼다. 시신은 도대체 이 넓은 장원에 몇십구나 되는 것일까? 일행은 모두 죽음이 가라앉은 장원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올랐다.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가솔 모두를 이리도 처참하게 죽인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떠나기 전에 내원(內院)으로도 들어가 보지.”

그들이 온 목적은 초혼령의 행사와 초혼령주를 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오래 전에 끝나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는 억울했다. 구양휘는 죽은 시신들을 만지지는 않았지만 세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시신은 많은 것을 보여 준다. 상대의 병기와 초식, 그리고 무공수위까지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말과 함께 몸을 돌리려던 구양휘는 바닥에 발이 붙어 있는 듯 꼼짝을 하지 않고 있는 담천의를 보았다. 천고문에 박혀 있는 시선과 그의 얼굴에 떠오르고 있는 의혹과 복잡한 감정의 교차를 보며 구양휘는 의아했다.

“자네는 왜 그래?”

대답이 없었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모습이다. 구양휘는 버릇처럼 담천의의 어깨를 툭쳤다.

“무슨 일이야?”

그제서야 담천의는 천고문에서 눈을 떼고 구양휘를 돌아 보았다.

“구양형. 저 인장(印章)이 초혼령이오?”

구양휘는 그제서야 그가 천고문에 낙관되어 있는 인장을 보고 있었음을 알았다.

“나도 직접 본적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초혼령은 손바닥만한 철패에 용(龍)이 음각되어 있고, 한쪽에는 환혼(還魂)이란 글자가, 또 한쪽엔 멸사(滅邪)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들었지. 아마 저것이 맞는 것 같군.”

담천의의 몸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에도 한순간 수차례에 걸쳐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초혼령은 여러 개요?”

구양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담천의의 계속되는 질문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담천의와 그가 바라보고 있는 초혼령의 인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떠한 연유인지는 모르나 그의 표정으로 보아 그에게는 심각한 일인 것 같았다.

“아니 오직 하나라 하지. 그래서 항상 초혼령의 행사 후에는 회수한다고 했다고 들었네. 헌데 무슨 일인가? 자네와 관계가 있나?”

담천의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철패.

구양휘가 말했듯이 손바닥만한 크기에 용이 음각되어 있고, 한면에는 환혼이란 글자가 또 한면에는 멸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 것!

“........!”
“........!”

일행은 담천의의 손에 놓여진 철패를 보며 경악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역시 말로만 들었지 초혼령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담천의의 손에 들린 그것은 자신들이 들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환혼이란 글자 때문에 처음에는 환혼령이라 했다지. 정말 초혼령인 것 같군.”

담천의의 손에서 건네받은 구양휘가 초혼령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초혼령은 죽음을 알리는 물건이다. 수십년간 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물건이다. 헌데 그것이 담천의의 품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자네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구양휘는 왠만한 일에는 놀라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놀라고 있었다. 분명 이 양만화의 장원은 초혼령이 휩쓸고 지나가 이 지경이 되어 있다. 헌데 자신과 동행한 담천의가 초혼령을 가지고 있다. 이 어찌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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