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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의식이 희미해 가긴 해도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런 그의 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좀 아프겠구려. 양형.”

목소리의 주인공은 종리추(宗理錐)였다. 자신이 믿었던 사영천의 천주. 둥글둥글한 얼굴에 약간 살이 쪄 보이는 포목점의 주인같이 보이는 호인형의 얼굴. 도저히 살수라고 볼 수 없는 얼굴이요, 체형이었다.

이미 모습을 분간할 수 없는 양만화의 얼굴 앞에 다가 온 종리추의 웃는 얼굴을 보며 양만화는 자신이 왜 이리 되었는지 모두 알았다. 자신이 믿었던 사영천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장원에 와 있던 연합회의 건천위나 무림인들을 모두 죽였다.

냉약빙도 사영천의 살수였다. 냉약빙이 이렇게 나올 때 벌써 알았어야 했다. 그는 그 주위에 있었던 모두에게 배반을 당했다. 그의 양팔이라 할 수 있었던 종리추와 냉약빙에게 배신당하고, 그의 아내에게도 배신을 당했다. 끝까지 자신을 배반하지 않았던 사람은 장준이었다.

그가 자신의 침실에 던져졌을 때 죽어가면서까지 종리추의 이름을 부른 건 그의 배반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 의미를 알기만 했어도 냉약빙에게 이리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죽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희미해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종리추가 냉약빙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연화대를 찾았구려. 하지만 이놈을 너무 쉽게 죽이는 것 아니요? 좀 더 생명을 연장하면서 혀를 뽑아내고 귀에다 대못도 박고, 뱃살도 얇게 포를 뜨면서 죽였어야 했는데….”

양만화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아마 그는 자신이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렇듯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죽음을 맞는다.

또 하나의 죽음은 감교련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외출할 때 입는 정장을 모두 갖추어 입고 침상 머리 위 서랍에 넣어 두었던 독비(毒匕)를 꺼내 들었다.

시집오기 전 그녀의 어머니가 주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새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새였지만 아직도 무가에 흐르는 피를 잊어버린 새는 아니었다. 조금 전 소윤과의 방사로 인하여 온몸은 발그레 하게 달아올랐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제발, 약속은 지켜 주길….”

그녀는 지금 밖에서 자신과 함께 가려고 기다리는 소윤을 향해 입속으로 빌었다. 그의 아들, 칠년 전에 금릉으로 떠나보낸 아들의 목숨 값으로 그에게 몸을 허락했고, 그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옷을 갈아입겠다고 말하며 소윤을 내 보내는 순간부터 그녀가 죽어야 할 때임을 알았다.

푸-----욱----!

검은 빛을 띤 은장도는 날카로워서 그녀의 여린 가슴을 막힘없이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금세 그녀의 입술이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여보….”

그녀는 죽어가는 그 순간에 양만화에게 소윤과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조금 전의 방사에 대해 사죄하고 있었다.

× × ×

“잠깐, 그러니까 강남송가가 초혼령에 대한 해금령을 가지고 있었고, 서장군가에서는 성화령의 적멸안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

상대부는 전연부와 조궁을 불러놓고 차를 마시며 보고를 듣고 있다가 전연부의 말을 끊었다. 그는 점점 복잡하게 돌아가는 보고를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렇지요.”
“초혼령이란 것이 균대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며 왜 해금령이 있었지?”
“제가 보기엔 무림에서는 초혼령으로 불리고, 황실에서는 균대위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연부의 대답에 상대부는 자꾸 고개를 가로로 젓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선황께서 어떠한 생각이신지 모르지만 해금령을 만들어 둔 것 같습니다. 초혼령은 대개 백련교도들을 처리한 세력이었고, 균대위는 반황실단체인 오중회의 인물들 제거와 고위 관료 숙청시 사전작업을 하던 곳이었으나 맥락은 같다고 보이기에 말씀드린 겁니다.”

“사라진 시기도 홍무 25년 전후로 같다고 했나?”

전연부는 얼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지요. 곧 소림에서 해금령이 공포된 건에 관해서 자세한 보고가 들어올 겁니다. 다만 적멸안은 가짜라 하더군요.”
“서장군가에서 잃어 버렸다? 그것도 믿지 못할 일이군. 서장군가가 어떤 곳인데.”

상대부는 서장군가의 저력을 안다. 천관에서 아무리 염탐하려해도 하지 못할 곳이 서장군가다. 무리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헌데 갑자기 해금령이 공표된 것은 무슨 이유지? 그리고 그 시기도 초혼령이 장안의 양부호에게 떨어지고 나서 해금령이 나타난 이유는?”

전연부는 대답이 곤란했다. 그 이유를 알고 있다면 벌써 보고했을 것이다.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황실에서 강남 송가에 해금령의 공표를 지시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황실(皇室)에서? 그런데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거야? 황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태감께서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 거….”

상대부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분명히 황실에서 강남송가에 해금령의 공표를 지시했다면 황제를 매일 알현하고 모시는 함태감은 알고 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함태감도 전혀 모르는 가운데 일이 진행되고 있다.

갑자기 그의 척추로 오싹한 한줄기의 한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의 뇌리에 두려움과 함께 한 곳이 떠올랐다.

“비원(秘苑), 그곳인가?”

침음성이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스쳤다.

“비원이라니요?”

갑작스러운 상대부의 태도에 전연부가 되물었다. 그의 질문에 상대부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기색과 함께 당황함이 묻어 나왔다. 웬만한 일에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그다. 그런 그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전연부는 자신이 잘못 질문했음을 알았다.

“잊어 버려.”

상대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전연부는 즉각 대답했다. 상대부가 잊어버리라면 잊어 버려야 한다.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하고 누가 묻더라도 들은 바 없어야 한다.

“자네 역시 마찬가지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던 조궁도 급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조궁도 상대부의 성격을 알고 있다. 그리고 상대부의 입에서 실수로 튀어나온 비원이란 말은 이제 입 밖에 내면 안 된다.

“......!”

상대부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다 문득 전연부에게 물었다.

“서가화와 송하령이 돌아가는 길에 이곳을 들른다고 했지?”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소림에서 그냥 보내지는 않을 모양입니다. 해금령과 적멸안, 그리고 황금 1만냥은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소림에서도 뭔가 그 보답을 하겠지요.”

무림과 관련 있는 해금령과 적멸안과 함께 딸려 보낸 황금 1만냥은 시주하는 금액으로 보면 정말 거금이다. 그것을 받고 그냥 돌려보낼 소림이 아니다. 아마 서가와 송가에 보낼 선물을 마련하고 두 여인에게 다른 뭔가를 줄 것이다.

“잘 준비해. 현 황상이 무장이 되기를 원했던 이유가 서달 대장군 때문이라고 하지. 서장군가는 그래서 건들기 힘들어. 최고로 좋은 곳으로 가서 대접하고. 이미 나온 이야기니까 확인해봐. 그동안 같이 있었으니 숨기지만은 않겠지.”

“걱정 마십시오. 이미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상대부는 전연부에서 조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자춘이 보내 온 보고는?”

조궁은 말보다는 자춘이 보내온 전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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