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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향수 ⓒ 열린책들
보기 싫으면 눈을 감으면 그만이고, 듣기 싫으면 귀를 막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냄새가 싫다고 해서 코를 막을 수는 없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냄새를 피할 수는 없다. 숨이 붙어 있는 이상 냄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냄새란 호흡의 한 형제다. 냄새는 우리를 뒤덮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몸 안으로 쉼 없이 침투한다. 침투의 베테랑인 냄새는 숨 쉬는 자의 불가피한 숙명이다.

하나의 냄새는 지나간 시간을 불러온다. 라일락 향기는 봄날의 기억을 불러오고, 비릿한 냄새는 해풍의 기억을 불러온다. 그 기억이 불안과 방황으로 점철된 청춘의 시간이든, 그늘을 모르는 유년의 시간이든 이미 지나간 시간은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 묘한 상실의 감정을 유발시킨다. 그러므로 건조하고 냉정한 역사가의 정신으로 과거를 회상하기는 쉽지 않다. 회상의 순간은 조금은 씁쓸한 신파의 표정을 갖기 마련이다.

냄새의 목록에는 저마다의 역사와 경험이 있다. 냄새와 결부된 역사와 경험, 그것이 '나'를 구성한다. 냄새가 나의 점막을 두드릴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사람이 된다. 하나의 냄새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추억의 공간으로 우리를 데려 간다. 무정형의 냄새가 일정한 형상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냄새의 대여점'에서 냄새를 빌려다 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버튼을 누르면 '나'만의 영상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 영상 속에서 나는 '마들렌' 과자를 먹는 어린아이일 수도 있고, 연인의 머리칼에서 풍기는 향기를 하염없이 들이키는 사내일 수도 있고, 지병으로 육신을 가누지 못하는 아내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를 견디는 남편일 수도 있다.

향기는 모든 사물의 미학적 가치를 극대화한다. 코가 딸기향을 맡지 못한다면 입은 가장 맛있는 딸기를 먹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후각의 상실은 부분적으로 미각의 상실을 동반한다. 어찌 미각뿐이겠는가. 4월의 라일락과 5월의 장미를 향기 없이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밋밋한 일인가. 후각을 잃는 것은 세상의 풍요로움을 잃는 것이다.

냄새를 제 몸 안에 영접하기 위하여 어떤 이는 깊은숨을 들이킨다. 그는 냄새를 가짐으로써 실체를 소유했다는 환상을 가진다. 사랑하는 이의 속옷에 베인 냄새를 소유하려는 열망은 엄밀히 말하면 도착적 열망이 아니다. 모든 욕망이 소유를 열망하는 욕망이라면 냄새에 대한 욕망이라 해서 도드라지게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연인들은 냄새를 소유함으로써 그 냄새에 밀착된 피부와 체온을 소유했다는 환상 속에 사는 존재다.

환상이 없이는 어떠한 사랑도 없다. 아니 사랑은 환상이다. <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냄새에 대한 우리의 도착적 열정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람의 냄새를 미친 듯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아쉽게도 냄새는 냄새일 뿐이다. 사향노루가 지나간 길에 사향 냄새가 풍기듯, 그가 지나간 길에도 그의 냄새는 남는 법이다. 냄새는 있지만 냄새의 발원지인 '그'가 없다는 사실이 모든 슬픈 연애의 알파요 오메가다. 라일락 향기는 봄날의 기억을 불러오지만 그 냄새와 결부되었던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리고 없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냄새는 시간의 비가역적 숙명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연어는 태어나자마자 모천(母川)을 냄새 맡는다. 그 냄새의 기억을 안고 연어는 태평양의 끝 베링해협을 돌아 산란을 향하여 모천으로 돌아온다. 기억에 각인된 냄새의 길을 따라 모천에서 알을 낳고 죽음을 맞는 연어는 탄생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열린책들)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태어날 때부터 냄새가 없는 인간이었다. 냄새의 진공상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핍이 생의 본질이라는 말일까. 결핍의 존재 그르누이는 온갖 것들의 냄새를 맡고 분류하고 합성해낸다.

그는 냄새의 소유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냄새를 창조하고 발명한다. 수많은 음정을 배합해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듯 그는 수많은 냄새를 배합해 '향수의 심장'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는다. 그 야심이 그로 하여금 살인을 부추긴다.

그의 살인은 '너'를 내 뼈와 살 속에 스미게 하겠다는 식인(食人)의 충동에 다름 아니다. 너를 내 속에 삼키고야 말겠다는 에로스의 충동. 한 사람의 향기를 맡는다는 것은 내 존재의 내부에 그의 존재를 흠뻑 빨아들이는 일이다. 그윽한 냄새를 맡는 자는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쉰다. 눈을 감고, 오직 후각에만 감각을 집중시키기 위해 시야를 차단하는 것이다. 냄새를 사랑하려는 자는 감각의 독점권을 후각에게 넘겨주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이다.

그르누이에게 세상의 도덕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거대한 냄새, 그의 관심은 오직 냄새일 뿐, 세상의 계율이 아니다. 그는 한 자락 미풍에 부드러운 냄새의 실마리가 실려 오면 그것을 가슴속 깊숙이 빨아들여 영원히 간직했다. 가장 위대한 향수를 만들겠다는 그르누이의 예술가적 야심은 죽음으로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시즘의 열정과 닮아 있다. 가장 아름다운 향기의 보석과 향수의 심장을 위해서라면 그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다.

<향수>는 가볍고 연약하면서도 단단하고 지속적인 향기의 보석을 발명하기 위한 그르누이의 예술가적 도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몹시 부도덕하지만 그 부도덕함이 아름다움까지 배반하는 것은 아니다. 'Grenouille'라는 이름을 번역하면 '개구리'라던가. 수륙양생의 이 이중적 동물처럼 <향수>는 죄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껴안는다.

늙음은 악취를 동반한다. 노년층은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않아 에너지를 완전히 쓰지 못해 노폐 물질이 많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특히 불포화지방산이 분해되면서 '노네날 알데하이드(C9H16O)'가 생기면 악취가 난다는 것이다. 땀샘, 겨드랑이, 성기 주변 등 분비선이 모여 있는 곳에선 탁하고 쾨쾨한 냄새가 떠나지 않는단다. 사람들은 나를 피한다. 이제 나는 무가치하다. 노년이 슬픈 것은 그 냄새 때문이기도 하다.

괄약근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병약한 자의 손을 잡으려면 악취를 견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휴머니즘이란 악취에 다가설 수 있는 용기다. 우리의 후각은 쉽게 피로를 느낀다. 어떤 악취에도 쉽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쉽게 피로해지는 후각의 메커니즘은 더러움에도 다가서라는 신의 명령인지도 모른다.

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열린책들(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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