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집 두 '꿈나무' 딸은 86년, 아들은 88년 생으로, 두 아이들이 10세 전후인 지난 97년 봄 '예술의 전당'으로 전시회를 보러갔다가 경내에서 찍은 모습.
우리집 두 '꿈나무' 딸은 86년, 아들은 88년 생으로, 두 아이들이 10세 전후인 지난 97년 봄 '예술의 전당'으로 전시회를 보러갔다가 경내에서 찍은 모습. ⓒ 정운현

우리 집엔 86, 88 두 ‘꿈나무’가 있습니다.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때 ‘꿈나무’라는 말을 많이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 86년생 범띠 큰 애(딸)가 어느새 커서 오늘 대입 수능시험을 보았습니다.

두 아이 중 큰 애는 낙천적인 성격의 저를 닮은 편이고, 반대로 둘째 아들은 성격이 급한 엄마를 닮은 편입니다. 그런 사정으로 평소 큰 애가 뭘 꾸물거리다가 제 엄마에게 혼이라도 나면 아내는 “쟤는 느려터진 제 아빠를 닮아서...”라며 저를 물고 들어가기 일쑤입니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이 괴롭혀도 짜증 한번 내는 법이 없고, 먹을 것 입을 것 타박 한번 한 적이 없습니다. 열 여덟살이 되도록 여태 제 엄마를 힘들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는 제 엄마의 얘깁니다. 딸 아이는 선천적으로 낙천적이며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습니다.

다만 문제는 너무 '천하태평'이라는 겁니다. 그건 고3이 돼서도 매 한 가지였습니다. 아침에 제 엄마가 등굣길에 챙겨가라고 식탁에 수저를 놔둬도 그냥 가기가 일쑤이며, 버스카드를 안가지고 가서 버스 정류장에서 전화를 해 제 엄마를 귀찮게 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딸 애를 저는 나무라기보다는 늘 빙긋 웃으며 바라보곤 했습니다. 마치 저를 보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고3이라고 하면 꼭두새벽에 나가서 자정이 넘어 파김치가 돼 들어와 새벽까지 공부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 집에선 마치 남 얘기 같습니다. 큰 애는 보통 저녁 9시경에 귀가해서는 밤 10시 정도면 잠자리에 들곤했습니다. 그냥 피곤하고 잠이 와서 공부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걸 어떡합니까. 재워야지요.

오늘이 수능일인 걸 알고 어제 아침 출근하면서 평소보다 좀 일찍 퇴근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불가피한 약속 등으로 새벽 2시가 넘어 집엘 들어갔습니다. 이미 딸 애는 잠이 들어 있었고, 아내는 소파에서 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서 저는 아내에게 내일 아침 딸 애가 시험보러 가는 길을 전송해주고 싶으니 아침 일찍 깨워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이미 마루에 불이 켜 있었고, 아내는 딸 아이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아내와 딸이 뭘 찾느라고 부산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수험표 이외에 별도로 신분증을 챙겨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신분 확인용으로 필요했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겁니다. 딸 아이는 학생증도 없는데다 작년에 만든 주민등록증을 어디에 뒀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나서서 서랍이란 서랍은 다 뒤져도 딸 아이 주민증이 안나오는 겁니다. 딸 아이에게 주민증을 어디에 둔 것 같냐고 물었더니 도대체 기억이 없다는 겁니다.

제 엄마가 “오늘 시험은 다 봤다“며 걱정이 늘어지자 딸아이는 “엄마, 괜찮아. 지난번 (예비)시험 때도 주민등록증 보자고 안하던데 뭘...”하면서 무사태평, 태연자약 말 그대로였습니다. 저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끝내 주민증을 찾지 못해 결국 딸 아이는 주민증 대신 의료보험카드를 가지고 제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하도 호들갑을 떨었던지 잠이 확 달아나버려 조간을 펴들었는데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낭패다 싶었습니다. 수험생이 진짜인지 여부를 얼굴을 보고 대조하려고 얼굴사진이 붙은 신분증을 가지고 오라고 한 건데 사진 한 장 없는 의료보험카드가 결코 통할 리 없다고 생각됐습니다. 딸 아이에게 보험카드를 쥐어주면서 시험감독 선생님이 신분증을 보자고 하면 신분증 대신 보험카드에 나와 있는 딸 애 주민번호와 수험표 주민번호가 같다는 걸 증명해 보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도 참 딱했죠.

두 사람이 집을 나선지 1시간여 만에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얼굴이 그리 어둡지 않았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아내 왈, 동사무소나 딸 애 학교에 가서 주민증이나 학생증을 만들어 오면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아내는 다시 안방 경대 아랫서랍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묵은 신용카드를 보아둔 통을 뒤적이던 아내가 순간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거기에 딸 아이의 주민증이 같이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다시 선 걸음에 학교로 내달았습니다.

긴장이 풀렸던지 그 새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아내는 확 핀 얼굴로 방안에 들어섰습니다. 너무 늦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아침 일찍부터 챙긴 탓에 수험장에 두 번째로 다녀와도 그 때까지 아직 시험이 시작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다섯살 적 딸 아이 딸아이는 요만할 때부터 꿈이 동물병원 의사였다. 91년 봄 처가 식구 결혼식에 갔다가 원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산보를 하다가 원주역 인근에서 찍은 딸아이 모습. 이 아이가 벌써 커서 오늘 대입 수능시험을 보았다.
다섯살 적 딸 아이 딸아이는 요만할 때부터 꿈이 동물병원 의사였다. 91년 봄 처가 식구 결혼식에 갔다가 원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산보를 하다가 원주역 인근에서 찍은 딸아이 모습. 이 아이가 벌써 커서 오늘 대입 수능시험을 보았다. ⓒ 정운현
가끔 시험시간에 늦은 수험생이 경찰차를 타고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갔다느니 하는 등의 얘기는 더러 들었지만 신분증이 없어 난리법석을 피웠다는 얘긴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애가 그런 해프닝의 주인공이 될 줄이야.

'천하태평'인 큰 애의 학교 성적은 중상위권입니다. 그러나 큰 애는 진로가 분명해 우리를 힘들게 하진 않습니다. 꼬마시절부터 딸 아이는 동물병원 의사가 꿈이었으며, 아직도 그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딸 애는 동물을 참 사랑합니다.

느리고 물러터진 성격의 또다른 면에는 나이답지 않게 너그럽고 온순한 성격을 가진 딸이 저는 그리 밉지는 않습니다. 저를 닮은 딸을 자랑하는게 꼭 제 자랑 같지만 ‘빨리빨리’ 세태에 딸애 같은 사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 모르긴 해도 저와 제 엄마만큼 내심 놀랐을 딸 아이를 위로, 치하해주고 싶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수저, 버스카드, 핸드폰 등 제 몸뚱이 같은 물건들을 좀 잘 챙기라고 단단히 주의를 줘야할 것 같습니다. 또 주민증을 넣고 다닐 지갑도 하나 사주라고 제 엄마에게 부탁해야할 것 같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