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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4월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개최된 중추원 회의 광경.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립된 중추원은 총독부가 친일귀족과 지방유지들을 무마, 회유할 목적으로 만든 어용으로 일제 총독정치의 거수기 노릇을 하였다. 열린우리당의 안에 따르면, 이들도 구체적인 부일행위가 없을 경우 친일파 조사대상에 넣기 어려울 전망이다.
1935년 4월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개최된 중추원 회의 광경.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립된 중추원은 총독부가 친일귀족과 지방유지들을 무마, 회유할 목적으로 만든 어용으로 일제 총독정치의 거수기 노릇을 하였다. 열린우리당의 안에 따르면, 이들도 구체적인 부일행위가 없을 경우 친일파 조사대상에 넣기 어려울 전망이다.

일제 35년 식민통치 기간을 통털어 조선인으로서 조선총독부 국장(고등관 1등급)을 지낸 사람은 딱 두 명 있었다. 엄창섭과 이진호가 그들로, 모두 총독부 학무국장을 지냈다. 일제 당시 조선인들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직은 지방관인 도지사(고등관 2등급)였으니 이들이 일제 당국에 바친 충성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두 사람 가운데 엄창섭은 구한국 궁내부 주사 출신으로 '한일병합' 후 군 서기로 출발해 군수, 도지사를 거쳐 학무국장에 오른 전형적인 친일관료출신이었다. 반면 이진호는 구한말 일제가 훈련한 교도(敎導)중대 영관(領官)으로 동학혁명군 진압에 참여했고, 또 을미사변 당시에는 훈련대 제3대대장으로 일본군 낭인패거리와 함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무관 출신이었다. 두 사람의 경우 보편 상식으로 봐도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볼만하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내놓은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에 따르면, 엄창섭은 친일 반민족자로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보다 한참 직위가 낮은 군수나 면장을 두고 친일파로 볼 것이냐와는 또다른 문제다. 이런 문제가 생겨난 데는 열린우리당이 조사대상을 '친일반민족 행위자'에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뜻의 '부일(附日) 행위'로 바꾸기로 한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이 조사대상자 선정을 '지위' 중심이 아니라 '행위' 중심으로 바꾼 것은 한나라당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다.

이진호는 친일파지만 엄창섭은 아니다?

친일진상규명법 제정 당시부터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왔던 한나라당은 여야협상 과정에서 "특정 지위에 있었다는 이유로 무조건 친일파라고 하는 것은 위헌 요소가 있을 뿐 아니라,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며 '행위'를 기준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친일여부를 '행위'로 따질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위 엄창섭의 예에서 보듯 누구나 인정할만한 친일파를 구체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줄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진호의 경우 총독부 학무국장 경력 이외에도 일본세력의 지휘 아래 '국모 시해사건'(을미사변)에 가담한 행적이 을미사변 비사(秘史) 등에 상당히 자세히 기록돼 있어 그의 부일행위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반면 엄창섭의 경우는 다르다.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그의 발령사항을 확인할 수도 있고, 또 <조선총독부 직원록>이나 각종 인명록(혹은 '신사록') 등을 통해 그의 총독부 산하 기관 재직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직위에 있으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일행위를 했는지, 그래서 조선민족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를 입증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일제가 패망 후 물러가면서 각종 자료를 불태웠거나, 그나마 몇 안남은 것은 일본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특정 지위에 있었다는 이유로 무조건 친일파라고 하는 것은 위헌 요소가 있을 뿐 아니라,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얼핏보면 일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같은 주장을 자세히 뜯어보면 큰 함정을 가지고 있다. 즉 이런 식이라면 을사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5명과 신문이나 잡지에 친일성향의 글(혹은 작품)을 남긴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등 친일문인이나 친일 지식인 몇 명만을 조사하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그럴 경우 조사대상자는 불과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에 그칠지도 모른다.

업무 성격상 신분노출이 잘 안되고 그래서 존재 자체도 확인이 어려운 '밀정'의 경우 어렵게 이름과 직책 등을 확인했다고 해도 구체적인 행위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친일파로 규정할 길이 없어진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노릇을 하면서 고급 밀정(스파이)노릇을 한 요화 배정자가 그런 경우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수많은 밀정은 어찌해야 하나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노릇을 한 '요화' 배정자. 그는 만주는 물론 총독부 경무국의 밀정노릇을 하였지만 구체적인 자료로 행적을 입증하기 어려워 그 역시 친일파 조사대상에서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노릇을 한 '요화' 배정자. 그는 만주는 물론 총독부 경무국의 밀정노릇을 하였지만 구체적인 자료로 행적을 입증하기 어려워 그 역시 친일파 조사대상에서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토가 죽은 후 만주로 건너간 배정자는 1920년 옛 일진회의 잔당들을 규합, 만주지역 최대 친일단체인 '보민회' 창설의 배후인물로 활동했고, 귀국해서는 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첩보를 총독부에 제공했다.

그러나 배정자의 반민족행위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는 찾기 어렵다. '밀정'이란 그 자체가 비밀요원으로, 존재는커녕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결국 밀정 가운데는 선우순처럼 '재수없이'(?) 흔적이 들통난 경우만 친일파로 규정될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일제하 판검사로 임용된 사람은 모두 221명이나 된다. 그들은 고등관으로서 총독부로부터 높은 대우를 받았다. 또 조선인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직인 도지사를 지낸 사람도 30명이 넘는다. 한일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작위를 받은 수작자들,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참의를 지낸 자들, 그외 고등고시 출신 등 일제하에서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을 모두 합하면 그 수가 1천 명을 훨씬 상회한다. 그러나 이들의 친일행위를 구체적인 문서나 자료로 입증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조선총독부는 부령(府令) 79호로 '조선인 판임문관 시험규칙'을 공표했다. 판임관은 현행으로 치면 7~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하위직이다. 이 '규칙'은 제4조에서 "수험지원자는 원서에 이력서를 첨부하고 공고한 기일까지 이를 문관보통시험 위원장에게 제출한다. 단 신분, 직업, 연령에 관한 경찰관서의 증명서를 첨부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시말해 일제는 고등관도 아닌, 군청이나 면사무소의 서기 등 하급관리 시험을 보는데도 경찰서에서 사전에 사상성, 즉 친일성 등을 검열한 후 시험을 치르게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수 이상의 수많은 고등관들을 구체적인 자료로 친일성 여부를 확인해야 겠다는 정치권의 주장은 전문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의 탁상공론 내지 정치협잡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경성제국대학을 나와 고등문관시험(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일제말기 3년여 경남지역에서 군수를 지낸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은 지난 98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일제 당시 군수 이상은 전부 친일파로 봐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당시 군수는 군의 일반행정 관리업무 이외에 식량 공출, 정신대, 징용 등 인력동원 등을 맡았는데 군수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알고도 군수가 된 사람들이라면 그는 당연히 친일파로 봐야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일제하에서 군수를 지낸 사람의 주장이다. 따라서 '행위'를 기준으로 조사대상을 정하겠다는 열린우리당의 안은 재검토돼야 마땅하다.

'직위'와 '행위'를 동시에 적용해야

필자가 판단컨대 친일혐의자 조사대상은 '직위'와 '행위'를 동시에 적용해야한다고 본다. 즉 직위는 낮아도 친일행위가 현저하고 뚜렷할 경우도 감안해야 하고, 반대로 구체적인 행적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고도의 친일성향을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보임될 수 없는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당연직'으로 포함시켜야할 것이다.

한 예로 총독부의 허수아비 자문기구격인 중추원의 참의 같은 경우 사실 별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그러나 중추원 참의라는 직위만으로도 당시 큰 위세를 부릴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총독정치의 거수기' 노릇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열린우리당 안대로 친일을 '구체적인 행위'로만 판단할 경우 뜻밖에 이런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일제하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해방 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훈장을 반납해야할지도 모른다. 즉 역대 건국훈장 서훈자 가운데 구체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행위가 입증되지 않거나, 또는 구체적인 행위가 없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로 장준하 선생의 경우를 보자. 1944년 1월 20일 일제에 강제로 학도병으로 끌려간 그는 중국 서주에 주둔중인 일본군 부대에 6개월 정도 복무하다가 그해 7월 7일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했다. 그리고는 장장 6천리를 걸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 도착해 한국 광복군에 합류했다. 당시 일본군이 작성한 그의 탈출기록이 최근 국감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장준하 선생의 경우 엄밀히 따지면 일본군과 교전을 했거나 의열투쟁을 벌인 사실은 없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그가 일본군 부대에서 자진 탈출했고, 또 광복군에 편입돼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또 그가 속했던 광복군이 일제말기 국내진공작전을 세웠던 점 등을 감안해서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장준하 선생을 예로 든 것은 그의 독립운동 활동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열린우리당의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만약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사대상을 열린우리당 식으로 할 경우, 즉 일본군과의 교전이나 의열투쟁과 같은 '구체적인 항일투쟁 행위'를 한 사람으로 한정할 경우 그 대상자는 국권상실 전후의 의병, 청산리전투나 봉오동전투 등에 참가한 만주지역의 무장 독립군, 그리고 총독부 등에 폭탄을 던지거나 일본인 고관 등을 척살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강우규, 김지섭 등 의열사 몇 명 밖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말해 무장투쟁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구체적인 항일투쟁 행위'를 입증하지 못해 독립운동가 대열에서 배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치협상에서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과 관련, 열린우리당은 야당과의 정치협상에 앞서 먼저 합리적인 원칙을 바로 세워야한다. 아울러 특별법 제정에 반대입장인 한나라당과의 협상이 현실이라고 해도 본질적인 사안에서는 후퇴해선 안된다.

즉 위원회의 소속을 어디로 할 것인지, 동행명령 거부자에 대한 과태로 부과 등은 협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만약 친일혐의자 조사대상 범주를 '지위'에서 '행위'로 양보하거나, 위원 구성을 나눠먹기식으로 할 경우, '친일청산위원회'가 아니라 '친일면죄위원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정은 앞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내년이면 60년이 된다. 그간 역사의 숙제로 남아왔던 친일청산문제는 이제 더이상 미룰 수 없다. 특히 이번 친일진상규명특별법에 의거한 친일청산은 대상자 처벌 등 법적 처벌이 아니라 진상을 조사, 기록해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것이다. 17대 국회가 이마저도 정쟁으로 절름발이를 만들 경우 후세에 두고두고 비판대상이 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친일청산이 시대적 소명임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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