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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익 원장의 바이올린 연주
지정익 원장의 바이올린 연주 ⓒ 지정익
특히 나환자들에게 자주 발병하는 홍체염 수술은 그의 전문이다. 약 40년 동안 그의 손길을 거친 나환자 수만도 4천여 명, 수술을 받은 환자들만도 1천여 명에 이른다. 음악을 전공했던 형님의 영향으로 자신도 음악을 전공하려고 했으나, 6·25 동란은 그를 의학도로 변신시켰다.

59년 광주 의대에 입학, 안과 의사가 되었으며 1964년 여천 보건소장으로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전공을 살려 무료 개안 수술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무료 개안 센터를 개설 운영하기에 이른다. 센터를 찾는 한두 사람, 장님이라고 치부하던 사람들이 지 원장의 손길로 눈을 뜨게 되자 섬에서 조차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인근 율촌면 소재 애양원 원장 미국인 의사 타플(한국명 도성래)씨가 찾아와 앞이 보이지 않는 네 명의 나환자 진료를 부탁했다. 남다른 인간애를 갖춘 지 원장은 손수 애양원을 찾아 수술한 결과, 이들 환자들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

나환자 가운데 안과 질환은 대부분은 나병의 합병증으로 인한 홍체염 환자들이다. 이들은 개안 수술만 하면 세상을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나환자와 접촉하면 전염이 된다는 통설이 난무할 때라 대부분의 의사들은 나환자들의 진료를 꺼려 했다.

그런데 그는 환자와 도 원장이 서로 손을 만지고 반기는 모습을 보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수술을 했고 이를 계기로 1개월에 한 번씩 애양원을 찾게 된다. 그가 나환자들에 대한 무료 진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66년 여수 중앙동에 안과의원을 개설한 때부터였다.

나환자 무료수술
나환자 무료수술 ⓒ 지정익
생활이 어려운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개안수술도 하면서 나환자들에 대한 무료 개안 수술도 계속 했다. 애양원에서 일들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당시 나환자들을 수용하던 안동, 고성, 함안, 익산 등지에서 한 달이면 30∼40명의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과 함께 진료하는 것을 꺼리는 일반 환자들을 위하여 그는 저녁시간과 새벽 시간을 이용하여 진료를 했다.

저녁이면 개안 수술을 하고 새벽에 보내는 일이 계속 됐다. 지금까지 나환자들의 무료 진료는 4천여 명에 달하고 그 가운데 1천여 명을 빛을 본 사람들이다. "외모는 거칠지만 내면은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지 원장의 이들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이 같은 일이 계속 되면서 나환자 가운데는 지 원장을 지 박사로 호칭하기도.

어느 날 18년 동안 장님으로 살아오던 김용휴씨가 지 원장의 개안 수술로 빛을 보게 되었다. 율촌 애양원에서 양계를 하던 그는 달걀 한 꾸러기를 선물로 가져왔다. 나환자들로부터 받은 선물은 순수하고 정겹다. 지 원장만큼 계란과 밤을 많이 얻어먹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 원장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악세계다. 지 원장의 바이올린은 광주, 전남의 현의 역사와 더불어 왔다는 말이 있을 만큼 평생을 함께 해왔다. 지 원장의 음악 인생은 의학도를 선택하기 이전부터 시작한다.

소학 시설 일찍 작고한 큰 형님의 바이올린 연주 모습에 반한 지 원장은 음악을 하기로 작정했다. 바이올린을 시작함과 동시에 봉건적인 집안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자전거를 사준다는 회유를 거절하고 바이올린의 매력에 푹 빠졌다.

결국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사주는 통에 음악의 열정에 빠지게 된다. 가족이 찾아 주지 않는 콩쿠르에서 입선하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은 그를 다른 세계로 이끈다. 음악을 포기하고 당시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광주의대를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에 가서도 음악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 없었다. 광주의대 현악부를 만들어 활동하는 등 안과 의사가 되어 여수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모른다. 여수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 레코드 감상회를 계기로 71년 여수 시립합창단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74년에는 호악회 오케스트라를 구성,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한국의 나폴리라는 여수를 음악이 넘쳐흐르는 항구 도시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날갯짓을 시작한 것이다.

74년에 창립된 호악회
74년에 창립된 호악회 ⓒ 지정익
70년 자신의 첫 연주회를 계기로 90년 회갑 기념 그리고 2000년 개인연주회를 비롯하여 오는 11일은 여수시민회관에서 네 번째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갖는다.

그의 2남2녀 자녀 모두 어릴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바이올린, 피아노, 비엔나에서 첼로를 공부한 둘째 딸과 함께 시민회관 건립기금을 위한 리사이틀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지 원장이 얼마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는 그간 그가 맡은 음악관련 직책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수 시립합창단 발기인, 예총회장, 호악회 맴버, 시민회관 건립추진위 위원 등이며 전남음악상도 수상했고 시민회관에는 CF 피아노를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오는 11일 여수 진남문예회관에서 열릴 칠순 기념 '지정익의 추억의 멜로디'에서 파가니니의 칸타빌레, 몬티 작곡 차르다스 등 10곡의 연주를 위해 손자 지대일군과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이 연주회가 끝나면 여수 필하모니 창단을 위해 또 한 번의 도전장을 내밀 계획이다.

여수 필하모니는 여수에 연고를 둔 음악인을 주축으로 삼을 예정이다. 외국 유학 또는 현직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역연고를 중심으로 하는 것은 열악한 지방에서 활동할 무대가 없어 타지로 반출되는 인재를 되돌아오게 한다는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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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닥다리 기자임. 80년 해직후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밥벌이 하는 평범한 사람. 쓸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것에 대하여 뛸뜻이 기뻐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항상 새로워질려고 노력하는 편임. 21세기는 세대를 초월하여야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

이 기자의 최신기사세계의 아름다운 섬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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