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최근에 발굴된 지도 한 장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생각은 금세 달라진다. 지난 1901년 북경 주재 영국 공사관의 육군 무관 브라운 대령이 그린 <서울중심지도>에는 덕수궁(정확히는 '경운궁')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의 서울시청 앞 광장은 절반 가까이 원래 덕수궁 담장 안에 들어 있었고, 안쪽으로는 돈덕전이 있던 언덕 너머로 경희궁이 거의 맞닿은 곳까지 널찍이 펼쳐진 영성문 대궐 즉, 선원전 구역이 있었다. 서편으로는 미국공사관을 에워싸듯이 수옥헌과 중명전 구역이 자리했고, 동편으로는 영국공사관의 앞쪽에 수학원과 경선궁(나중의 덕안궁)이 있었다.
그러니까 정동 안에 덕수궁이 있던 것이 아니라 정동 그 자체가 온통 덕수궁이었던 셈이다. 정동을 알면 덕수궁은 저절로 보이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이러한 점에서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펴낸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은 정동 일대를 오롯이 들여다보는 매우 유용한 길잡이 자료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보듯이 덕수궁과 정동에 관한 거의 모든 사항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각이 애당초 덕수궁 담장 안에만 머무르려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덕수궁을 궁궐로 소개한 책자는 더러 있었지만, 이처럼 동네와 구역을 통째로 조사하고 정리한 자료는 사실상 처음이라는 점에서도 이 책의 가치는 돋보인다.
그렇다면 정동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남아 있는 것일까?
우선 이 책에 따르면, 정동은 '정숙과 안녕의 공간'으로 정리된다. 덕수궁이 자리한 정동 일대가 조선 초기에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파괴된 궁궐이 복구되기까지 국왕이 한동안 머무른 곳인 탓이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우리가 아는 정동은 그다지 '정숙과 안녕의 공간'은 되지 못했던 듯하다. 비록 덕수궁이 넓혀지고 '황제의 거리'가 되긴 했지만, 때로 이곳은 매우 소란한 거리였다. 이곳에서 황제의 자존과 나라의 안녕이 제대로 보존되었는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이곳은 '서양촌(西洋村)' 즉 '외국인의 거리'였다. 당연히 근대문물의 거리기도 했다. 서양외교관, 선교사, 무역상들이 이 지역을 활보하고, 그들이 세워놓은 공사관, 예배당, 신식학교, 호텔, 주택이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곳이 정동이었다. 싫건 좋건 간에 이들의 존재를 빼놓고는 정동과 덕수궁의 얘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아닌게 아니라 적어도 우리가 아는 덕수궁의 역사는 바로 1896년에 일어난 고종의 아관파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서글픈 일이지만 황제는 그 후로도 이 지역을 떠나 경복궁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황제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덕수궁의 영역은 한껏 넓어졌지만 그건 서양인들과의 절묘한 공존이 가져다 준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김정동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외국인들은 한강 마포나루와 서대문과 이어지면서도 성곽 내의 지역인 탓에 정동지역에 주로 정착했던 것이고, 고종황제 역시 필요한 때에 피신할 수 있는 외교적 은신처를 근처에 갖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풀이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법칙은 있었다. 그저 외국인들이 근처에 머물기를 원했을 따름이지 황제의 구역을 기웃거리거나 자칫 넘보는 것은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덕수궁 인근 거리 제한과 고층 건축 금지 조치였다.
실제로 1901년 11월에는 대한제국의 외부가 '정동 황궁 근처의 땅에 고층건물의 신축을 금할 것'을 각국 공관에 통고하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 외국인의 집을 짓는 일은 각자의 자유로운 편의에 따른 문제로 우리와 관계는 없다 할 수 있겠으나 정동 한 곳만은 황궁과 가까이 있어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지역인지라" 고층집을 짓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거리제한조치도 있었다. "간혹 외국인이 양옥을 높이 지어 궁중을 내려다보니 그때마다 공무수행에 곤란한 점이 많아 ······ 궁궐 담장 밖으로부터 5백 미터 이내의 지역에 대해서는 반드시 가옥 건축을 방지하고 제한하는 금령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조차도 궁궐은 지켜주었을지언정 끝내 나라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국권피탈이 이어지면서 덕수궁은 정말 물러난 황제의 궁궐이 되어 버렸으니, 그 의미와 위상이 예전만 같지 않았던 것은 분명했다. 덕수궁의 쇠락은 이미 거기에서 절반쯤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던 것이다.
사실이지 정동 일대의 변모와 덕수궁의 흥망성쇠는 거의 전적으로 고종황제의 거취와 관련이 있었다. 덕수궁의 권역을 한껏 넓혀놓은 것도, 그것을 다시 잔뜩 오그라들게 한 것 또한 바로 고종황제 그 자신이었다. 1912년 태평로 개설과 더불어 야금야금 줄어들기 시작한 덕수궁은 1919년에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이내 본격적인 해체의 길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1920년에 선원전의 훼철과 더불어 영성문 일대에 덕수궁을 가로지르는 신작로가 닦인 것을 시작으로 그 자리에는 불교포교당, 경성여자공립고등여학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섰고, 동편의 언덕 위에는 경성방송국이 들어서더니, 다시 그 앞의 덕안궁은 팔려나가 경성부민관과 조선일보사가 들어서는 변화가 있었다.
을사보호조약의 현장인 중명전은 정동구락부라는 이름으로 겨우 남았고, 지금 남은 덕수궁 역시 1933년에 이르러 공원으로 전락하여 일반에 공개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다시 한참 세월이 흘러 1968년에는 태평로에 접한 덕수궁의 전면이 잔뜩 헐려 나갔고, 1970년에는 느닷없는 도로확장으로 길가에 나앉다시피 했던 대한문이 뒤로 물러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겨우 해방 이후에 벌어진 이러한 사실 정도만을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지 이미 경기여고와 덕수초등학교로 변한 자리가 한때나마 덕수궁이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여느 사람들에게 정동은 그저 서양풍의 건물과 온갖 학교들이 즐비하고, 문화체육관과 덕수궁 돌담길로 기억되는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몇 해 전부터 경기여고 터에 미국대사관을 신축하는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이곳에 덕수궁 선원전이 자리했다는 사실은 정말 까마득한 시절의 일로 간주되었다. 이곳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그리하여 어느 샌가 아주 잊어버린 땅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960년대 이후 꾸준히 정동지역의 변천을 몸소 관찰하고 기록해 온 김정동 교수조차 스스로 인정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적어도 미국대사관의 신축이라는 '현안문제'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이 분야의 학자들마저 덕수궁 너머의 '덕수궁'을 제대로 그려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일찍이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70년 넘게 버려져 있던 경복궁 자선당의 유구를 찾아내 끝내 되돌아오게 한 이가 바로 김정동 교수였는데도 말이다.
이번에 나온 김정동 교수의 책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기억과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는데 든든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