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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팔상전과 금산사 미륵전을 모방한 경복궁 민속 박물관. 경복궁에 왜 이런 건물을 세우려고 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법주사 팔상전과 금산사 미륵전을 모방한 경복궁 민속 박물관. 경복궁에 왜 이런 건물을 세우려고 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 신병철
일제는 조선 왕조의 정체성과 조선의 얼을 지니고 있는 경복궁을 온갖 방법으로 훼손하였다. 1915년과 1929년에 조선박람회를 연답시고 수많은 경복궁 전각들을 헐고 새로운 집을 지었다.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값으로 팔아치웠다.

마침내 일제는 1916년부터 10년에 걸쳐 조선총독부 건물을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으리으리하게 지었다. 총독부 건물은 근정전보다 더 높고 더 넓어 경복궁을 확실하게 가렸다. 백악산 주산 아래 조선 왕조의 상징물인 조선 정궁 경복궁을 조선 총독부건물로 대체시켜 한반도가 그들의 완벽한 식민지가 되었음을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광화문은 조선 궁궐의 정문 중에서 가장 멋있는 문이었다. 2층으로 된 지붕이 이루는 곡선과 직선의 아름다운 조화, 그 지붕과 3개의 아치문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비례와 균형으로 인한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눈을 시리게 할 정도였단다. 조선 총독부 건물을 가리는 이 광화문은 결국 뜯겨 서북쪽 담장으로 이전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의 광화문은 박정희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러나 목재로 사용해야 하는 추녀까지도 시멘트로 조잡하게 만들었으니 이전의 균형과 조화를 어찌 바랄 수 있으랴. 게다가 근정전의 지향인 정남향이 아니라, 조선총독부 건물과 같은 남산의 조선 신궁을 지향하고 있으니, 껍데기만 형식을 갖췄을 뿐이다. 광화문 편액도 박정희가 직접 한글로 썼다고 한다. 광화문의 복원이 아니라 또 다른 파괴였던 것이다.

시멘트로 만든 광화문 추녀와 박정희가 썼다는 광화문의 한글 편액. 폭압적이고 왜곡된 민족주의가 광화문에 이런 식으로 남아 있다.
시멘트로 만든 광화문 추녀와 박정희가 썼다는 광화문의 한글 편액. 폭압적이고 왜곡된 민족주의가 광화문에 이런 식으로 남아 있다. ⓒ 신병철
조선총독부 건물은 경복궁을 복원하여 민족정기를 회복시키려는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1995년 철거되었다. 이렇듯 광화문이 복원되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음에도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의 전면 담장은 그대로 두었다.

일제에 의한 경복궁 파괴와 왜곡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는 숭유억불의 조선 정궁에 불교 유물을 옮겨 세움으로써 이념적으로 조선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왜곡했다. 전국의 불상과 탑파, 승탑과 승탑비 등 불교 문화재들 중 '보기에 환장할 만한 것'들을 여차하면 그들의 나라로 옮겨 가기 위해 이곳 경복궁에 이전하였다. 돌 하나에 새 두 마리였다. 경복궁을 제대로 조선의 정궁으로 대접하려면 당연히 이런 유물들은 제자리나 적당한 자리로 옮겨야 할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경복궁에 대한 훼손은 지속되었다. 일제 때보다 어쩌면 더 심각하게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방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의 중앙청으로 사용되었음은 우리의 민족 해방, 광복이 형식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경복궁의 서북쪽 넓은 지역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979년 말 박정희가 죽고부터 1980년에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할 때, 이 군부대는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경회루에서 연회를 베풀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던 그들이니 말이다. 지금은 이 군부대가 떠나고 경복궁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제발 제대로 복원되기를 기원해본다.

해방 이후 경복궁을 가장 크게 훼손한 것은 박정희 정부였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 야욕을 드러낸 것은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2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부터였다. 1969년에 억지로 3선 개헌을 강행하고, 1972년에 온갖 부정을 동원하여 대통령에 3번째로 당선되더니, 아예 영구집권을 획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공포하고 전 국민들에게 암기시켜 유신파쇼 체제의 밑바탕을 닦았다.

이와 함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전 국민에게 강요하고 세뇌시켰다. 그 일환으로 역사상 국난극복에 앞장선 위인의 동상을 세우고 전적지와 사당 등을 건립하였다. 제대로 된 고증도 없이, 역사에 대한 일관된 방향도 없이 전적지와 역사적 인물들이 억지 민족주의 강요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과 그것을 모방한 경복궁의 팔상전 건물. 높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기단 위에 덩그렇게 올라 앉은 경복궁의 팔상전은 유신 파쇼 체제가 만든 괴물외는 아무것도 아니다.
법주사 팔상전과 그것을 모방한 경복궁의 팔상전 건물. 높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기단 위에 덩그렇게 올라 앉은 경복궁의 팔상전은 유신 파쇼 체제가 만든 괴물외는 아무것도 아니다. ⓒ 신병철
경복궁에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 상징물들이 건립되었으니, 지금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들이 그것이다. 이 건물들은 집 모양으로 보아 법주사 팔상전을 본 뜬 건물(모법주사팔상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을 모방한 건물(모화엄사각황전), 김제 금산사 미륵전(모금산사미륵전) 등 3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이 건물들 중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면서 가장 높은 건물이 법주사 팔상전 모방 건물(모법주사팔상전)이다.

불국사 기단과 경복궁 민속 박물관의 기단.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는 산지 가람의 경사를 기단으로 활용한 아름답고 경건한 기단이나, 경복궁 민속 박물관의 기단은 크고 높을 뿐 멋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불국사 기단과 경복궁 민속 박물관의 기단.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는 산지 가람의 경사를 기단으로 활용한 아름답고 경건한 기단이나, 경복궁 민속 박물관의 기단은 크고 높을 뿐 멋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 신병철
이 모든 건물들은 높고 투박하며 튼튼한 기단 혹은 시멘트 성으로 둘러싸인 1층으로 가려져 있다. 모법주사팔상전의 기단은 아랫부분은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를 본땄고, 윗부분은 경복궁 근정전 기단을 본땄다.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기단은 산지 가람의 경사진 축대를 겸하는 기단이며 경복궁 근정전 기단은 평지 전각의 기단인 바, 이 둘을 평지 건물의 기단으로 조잡하게 결합한 것은 건물의 기본 원칙마저 무시한 조악의 극치다. 두 가지 기단을 본땄으니 높이도 대단하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효율지상적 군사 문화가 이 건물군에 면면히 들어 박혀 있다.

이처럼 모법주사팔상전은 그 주위 분위기나 품격을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뛰어난 기단들을 조합해 놓았으며, 그 위에는 우리 건축물 중 가장 높다는 법주사 팔상전을 올려 놓았다. 크기와 높이만 있을 뿐이지 조화와 비례는 어디에도 없다.

법주사 팔상전은 산으로 둘러싸인 거의 평지의 조건 속에 별로 높지 않은 기단을 가진 높은 건물이다. 이 팔상전은 법주사가 자리하고 있는 주위의 산세와 분지의 모습 등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법주사에 높이 솟아 있는 팔상전. 산으로 둘러 싸인 포근한 곳에 넓은 대웅전 앞에 적당하게 솟아 있어 매우 멋있는 목탑이다.
법주사에 높이 솟아 있는 팔상전. 산으로 둘러 싸인 포근한 곳에 넓은 대웅전 앞에 적당하게 솟아 있어 매우 멋있는 목탑이다. ⓒ 신병철
그러나 경복궁의 모법주사팔상전은 법주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거대하고 웅장하며 조잡한 기단 위에 높이 솟아 있을 뿐이다. 법주사 팔상전이 여기에 놓인 유일한 이유는 바로 '높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복궁의 형식상 최고의 권위는 당연히 근정전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근정전보다 높은 건물은 있을 수 없다.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높고 넓게 지어 근정전의 귄위를 짓밟더니, 그 일제 장교를 지낸 박정희가 절대권력의 상징으로 모법주사팔상전을 더 높이 지어 완전히 깔아 뭉개버리고 말았다.

봉건 국왕 전제 체제의 근정전보다 더 높고 더 넓게 만들어 절대권력의 무소불위 폭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불교를 배척하고 오로지 성리학만을 신봉하는 조선의 궁궐에 부처의 유골을 모시는 목탑인 팔상전을 세우는 것 자체가 경복궁을 왜곡한 사실임을 그들이 알기나 했을까?

경복궁 동북쪽에 1972년에 세운 이 건물들은 도무지 건물의 기본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지만, 건물도, 전통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무식하고 조잡한 건물일 뿐이다. 절대적 권력을 도모하고 파쇼체제를 지향하려는 자들의 가부장적 거대 지향, 무조건적 최고 지향적인 건물일 뿐이다.

화엄사 각황전과 경복궁의 모방 각황전. 20세기 거대결핍증 환자가 선택한 가장 규모가 큰 건물, 구례 화엄사에 있어야 멋도 품위도 살아나지.....
화엄사 각황전과 경복궁의 모방 각황전. 20세기 거대결핍증 환자가 선택한 가장 규모가 큰 건물, 구례 화엄사에 있어야 멋도 품위도 살아나지..... ⓒ 신병철
모법주사팔상전 서북쪽에 건립한 모화엄사각황전도 조악하기는 마찬가지다. 구례 각황전 건물은 조선 건물 중 가장 웅대한 건물이다. 각황전도 산지 지형의 경사를 올라가는 계단이자 기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각황전은 이런 기단 위에 높이보다는 넓이를 강조하여 주위의 산세와 옆에 직각으로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17세기 조선의 가장 거대하고 멋들어진 건물이다.

금산사 미륵전과 경복궁의 모방 미륵전. 기단 혹은 1층이 시멘트 옹성으로 둘러쳐 있어 답답하다. 어린이 박물관으로 좀 어울리지 않는다.
금산사 미륵전과 경복궁의 모방 미륵전. 기단 혹은 1층이 시멘트 옹성으로 둘러쳐 있어 답답하다. 어린이 박물관으로 좀 어울리지 않는다. ⓒ 신병철
그러나 경복궁의 모화엄사각황전은 평지에 옹성처럼 둘러친 기단 모양의 1층 때문에 1층 아랫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지금 1층은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정말로 웃기는 건물이 아닐 수 없다. 금산사 미륵전 역시 기단으로 가려져 아랫부분이 보이지 않고, 윗부분만 덩그렇게 떠 있다. 아무런 의미없이 그저 높은 건물과 넓고 웅장한 건물이 나열되고 있을 뿐이다.

경복궁에 갈 때마다 저 높이 솟아 있는 불쌍한 팔상전을 보면서 비애를 느낀다. 가까이 가서 기단으로 가려져 있어 윗부분만 간신이 보이는 각황전과 미륵전을 보면서, 그런 상징물에까지 의존했어야 했던 1970년대 유신파쇼체제에 분노를 느낀다.

저렇게 조악하고 부조화로우면서도 덩치만 크고 높이만 높은 경복궁 민속박물관 건물을 대하면, 그것을 보고 있는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박정희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자,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경복궁이 조선 왕조 정궁의 자리를 제대로 찾을 수는 정녕 없단 말인가? 안타깝고 또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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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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