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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신학의 탐구>
1990년 신학대에 갓 입학한 나는, 그동안 대입 준비에 찌들고 굶주렸던 독서량을 마음껏 채워볼 심산으로 학교 도서관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당시 맨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책들은 한길사에서 '오늘의 사상신서'로 야심차게 기획해 펴낸 백여권이 넘는 사상서들이었다. 왠지 교양 있는 대학생이라면 이 정도의 책들은 읽어 둬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무모하게도 졸업 때까지는 이 책들을 모조리 읽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그 가운데 처음으로 뽑아든 책 한권이 앞으로의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으리라는 예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민중신학'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은 고교 시절 애청하던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였다. 알다시피 CBS는 권위주의 독재 정권 시절, 정직한 언론으로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고자 힘썼다. 그래서였겠지만, 이 방송은 내게 이 땅에 '민중교회'와 '민중신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 그러나 서남동 교수의 <민중신학의 탐구>를 읽기 전까지는 그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민중신학의 탐구>는 어떤 이의 말마따나 '나의 첫 경험'이었던 것이다.

순전히 호기심에 끌려 뽑아든 책을 도서관에 앉아 1부도 채 다 못 읽었을 때 '이거 안 되겠다' 싶었다. 직접 구입하여 줄을 그어 가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어렵사리 호주머니를 털어 책을 구입한 뒤, 처음부터 끝까지 수차례 정독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보수적인 교회의 신앙 울타리 안에서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자랐다. 그러던 나는 우연치 않게 한국 민중신학의 거장을 책으로 만나게 됐고 큰 진통과 혼란을 겪으면서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내 신앙의 근본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고 성서와 세계를 어떻게 읽고 이해할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비상한 결단을 요구했다.

한국 신학의 안테나, 서남동 교수

이 책의 저자인 서남동 교수는 '한국 신학의 안테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최신 서구 신학을 재빠르게 소화해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해 왔다. 그는 일생에 중요한 저서 두 권을 남겼는데, <전환시대의 신학>과 <민중신학의 탐구>가 그것이다.

<전환시대의 신학>의 머릿말에서 서 교수는 자신의 신학 수업 노정을 간략히 스케치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서 교수는 일찍부터 틸리히, 칼 융, 불트만, 본회퍼 등과 같은 서구 신학사상의 총아들에게 매료됐다. 그리고 <세속화 신학> <신 죽음의 신학> <희망의 신학> <과정신학> <생태학> <반문화> <생명과학>과 같은 새로운 서구 신학, 사상적 조류에 전율하면서 몰두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이제사 생태학과 과정신학(철학)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서 교수가 얼마나 한 시대를 앞질러 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신학 조류에 해박했던 서남동 신학의 종착지이자 그 자신의 신학으로 걸러져 나온 결정체는 <민중신학>이었다.

그는 같은 민중신학자로 쌍벽을 이루던 안병무 박사와 더불어 70년대 초반에 한국 민중신학을 처음 제창해 체계화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하다가, 84년 암으로 아쉽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생생한 민중신학의 학문적 유산은 <민중신학의 탐구>라는 책으로 묶여 민중신학 연구를 위해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인용되고 애독되는 기념비적인 책이 됐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민중신학은 한국의 토양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난 현장의 신학으로, 태동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학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빈곤의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민중신학은 다시금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과 맞닿아 있는 한국의 민중신학

<민중신학의 탐구>에서 가장 주목 받았던 논문은 '두 이야기의 합류'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한국의 민중신학은 한국의 민중 전통과 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 전통의 합류이며 그 합류가 70년대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민중신학은 이 합류 과정을 해석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서구신학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이어지는 논문들은 이것이 단지 선언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낸다. 서 교수는 한국 민중사에 면면히 전해 오는 민담을 신학화하여 탈(脫) 신학, 반(反) 신학을 전개했다. 까마득한 시절부터 이 땅의 저류에 흐르고 있던 민중의 한맺힌 소리들을 세상 위로 끌어 올려 증언하고 대변한 것이다.

서남동 교수는 민중신학을 전망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어떤 신학보다도 한국 교회의 삶에 그 호흡과 음정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이 있는 그대로 실현되기까지 민중신학의 갈 길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이제 나는 서 교수의 책을 이십대 초반처럼 글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나를 읽도록 해야 할 시기에 놓여 있다. <민중신학의 탐구>를 통해 처음 접한 민중신학은 어느덧 내 신학의 중심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고, 이에 바탕한 민중교회의 목회자로 살고자 어설픈 몸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의 탐구

서남동 지음, 죽재서남동기념사업회 엮음, 동연(와이미디어)(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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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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